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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A E RICONCILIAZIONE LA CHIESA E LE COLPE DEL PASSATO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

 

차 례

머리말

서론

제1장 문제: 어제와 오늘

1.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1.2 공의회의 가르침

1.3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용서 요청

1.4 제기된 문제들            

제2장 성서적 접근

2.1 구약성서

2.2 신약성서

2.3 성서의 희년 

2.4 결 론

제3장 신학적 토대

3.1 교회의 신비 

3.2 교회의 거룩함

3.3 지속적 쇄신의 필요성

3.4 교회의 모성 

제4장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

4.1 역사에 대한 해석

4.2 역사적 연구와 신학적 평가

제5장 도덕적 식별

5.1 몇 가지 도덕적 기준들

5.2 그리스도인의 분열

5.3 진리를 위한 폭력의 행사

5.4 그리스도인과 유다인

5.5 오늘날의 죄악에 대한 우리의 책임

제6장 사목적 선교적 관점

6.1 사목적 목적

6.2 교회에 미치는 영향

6.3 대화와 선교에 미치는 영향

결론

 

머리말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장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2000년 대희년을 경축하고자 국제신학위원회에 “교회와 과거의 잘못”이라는 주제를 연구하도록 제안하였다. 이 연구의 준비를 위하여 크리스토퍼 베그 신부, 브루노 포르테 주교(위원장), 제바스티안 카로템프렐 신부, 롤랑 미네라트 주교, 토마스 노리스 신부, 라파엘 살라자르 카르데나스 신부, 안톤 스트루켈 주교로 구성된 소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수차례에 걸친 소위원회 회의와 1998년에서 1999년까지 로마에서 열린 국제신학위원회 총회에서 이 주제에 대한 전반적인 토론이 이루어졌다. 이 문헌은 기명 투표를 통하여 특수 형태(forma specifica)로 국제신학위원회의 승인을 받았으며, 신앙교리성 장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에게 제출되어 발표를 허가받았다.

서론

2000년 대희년 칙서인 「강생의 신비」(Incarnationis Mysterium, 1998.11.29.)는, ‘사람들이 희년의 특별한 은총을 더욱 열렬히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표지들 가운데 하나로 기억의 정화를 꼽고 있다. 기억의 정화는 과거의 잘못들을 역사적 신학적으로 새롭게 평가함으로써, 그 유산으로 남아 있는 온갖 형태의 증오와 폭력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양심을 자유롭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기억의 정화는─올바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그에 상응하여 죄를 인정하게 되고, 화해의 길에 이바지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은 과거의 영향이 현재에도 느껴지고 긴장으로 지속될 수 있기 때문에 현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기억의 정화는 “과거와 현재의 그리스도인이 저지른 잘못들을 인정하는 용기 있고 겸손한 행위”이다. 그 행위는 “신비체 안에서 우리를 서로 결합시켜 주는 유대 때문에, 우리가 비록 우리를 앞서 간 이들의 과오와 잘못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는 책임이 없고 그 심판은 오직 모든 이의 마음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 맡겨 드린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이 자비의 해에 교회가 주님께 받은 성덕을 강화하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과거와 현재에 자녀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를 간청하도록 촉구하신다.”1) 교황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자신들의 그릇된 행동으로 해를 입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도록 권고받고 있다.”고 거듭 강조하시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말고 그렇게 하여야 하며, 오직 ‘우리의 마음 속에 부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로마 5,5)으로 힘을 얻어야 한다.”고 결론지으신다.2)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는 진실한 마음으로 이루어진 교황 성하의 용서 요청은 다양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교황님께서 보여 주신 진리의 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는 교회 안팎에서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행동의 결과로서 교회의 발언에 대한 신뢰가 증대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특별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서 교회의 자녀들이 저지른 잘못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은 교회에 편파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비난을 묵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일부 유보적 입장의 목소리도 있었다. 호응과 우려 사이에서,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는 이유, 조건, 정확한 형태를 명확히 하려는 성찰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다양한 문화와 정서를 하나의 가톨릭 신앙 안에서 표현하고 있는 국제신학위원회는 이 문서로써 이러한 필요성에 응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문서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인정과 관련하여 󰡐기억의 정화󰡑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대하여 신학적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 이 문서가 제기하고자 하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여야 하는가? 누가 인정하여야 하는가? 그 목적은 무엇이며, 역사적 신학적 판단을 올바로 결합시켜 그 목적을 어떻게 정하여야 하는가? 누구에게 잘못을 인정할 것인가? 도덕적 의미는 무엇인가? 교회와 사회 생활에 어떤 영향이 미칠 수 있는가? 따라서 이 문서의 목적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을 조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에 대한 참회의 바탕이 되는 전제들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소개될 성찰의 성격을 언급하였으니, 이 문서가 교회에 대하여 말할 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겠다. 교회는 단지 역사적 제도만도 아니고, 신앙의 빛을 받은 사람들의 영적 친교만도 아니다. 교회는 그 목자들의 인도 아래 역사 안에서 불가분적이고 가시적으로 활동하면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깊은 신비로 일치되어 있는, 세례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 이해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르면, “말씀이 혈육을 취하신 신비에 교회를 비교하는 것은 약한 비유가 아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이 취하신 인성도 생명을 가진 기관으로서 말씀과 갈릴 수 없도록 결합되어 말씀에 봉사하는 것처럼, 비슷한 모양으로 교회의 사회적 기구도 교회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성령께 봉사함으로써 몸을 자라게 한다(에페 4,16 참조).”3) 실질적이고 깊은 친교 안에 과거와 현재의 자녀들을 품고 있는 교회는 주님의 뜻에 따라 기억을 정화하고 마음과 삶을 쇄신하고자 과거 잘못들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유일한 은총의 어머니이다. 교회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신비체인 교회를 역사를 통하여 확장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에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이다.

이 문서의 구조는 제기된 물음들을 반영하고 있다. 먼저, 주제에 대한 간략한 역사적 고찰(제1장)에 이어서, 용서 요청의 성서적 바탕에 대한 연구(제2장)와 신학적 조건들에 대한 더욱 깊은 탐구(제3장)로 옮아간다. 문제의 행위들이 일어났던 시간과 장소, 상황을 적절히 고려한 올바르고 효과적인 진술에 이르려면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을 정확히 결부시켜야 한다(제4장). 가톨릭 교회에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마지막 고찰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회개 행위의 도덕적(제5장), 사목적, 선교적 의미(제6장)에 할애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필요성은 누구에게나 또 어느 종교에서나 요구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제시된 성찰이 모든 이를 진리와 형제적 대화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도록 도와 주기를 바란다.

이 서론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신자들이 하는 모든 󰡐기억의 정화󰡑 행위의 목적을 상기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바로 이 위원회의 활동을 이끌어 온 정신이며, 하느님의 진리와 그 진리의 요구에 순종하며 살 때 우리의 잘못과 함께 주님의 영원한 자비와 정의를 고백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유와 구원을 주는 진리에 대한 믿음(‘신앙 고백〔confessio fidei〕’)으로 힘과 빛을 얻는 ‘죄의 고백(confessio peccati)’은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고백(confessio laudis)’이 된다. 오로지 하느님 앞에서 과거와 현재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가능해짐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용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상 가한 수많은 박해를 생각할 때 특히 의미가 깊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황님께서 과거의 잘못과 관련하여 하신 행동과 요청하신 것들은 가톨릭 교회에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와 정부, 민족에게도 모범적이고 예언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리하여 교회는 모든 이를 위한 은총과 화해의 사건인 강생의 대희년을 더욱 효과적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얻는다.

제1장 문제: 어제와 오늘

1.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교회는 언제나 희년을,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구원을 기뻐하는 때이며, 하느님 백성의 삶 속에 현존하는 죄에 대한 참회와 화해의 특별한 시기로 지내 왔다. 1300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 성하 시대에 최초로 거행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에 대한 참회의 순례는 성사적 용서를 통하여 죄에 따른 잠벌을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사면해 주고자 특별 대사를 주는 것과 연관지어졌다.4) 이러한 맥락에서, 성사적 용서와 잠벌의 사면은 개인적인 성격을 지닌다. ‘용서와 은총의 해’5) 동안,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마련하신 은총의 보화를 특별한 방법으로 나누어 준다.6) 그러나 지금까지 거행된 어떠한 대희년에서도, 교회의 과거 잘못에 대해서 양심을 일깨우거나, 가깝거나 먼 과거의 행동에 대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청할 필요성을 인식한 적은 없었다.

실제로 교회 역사를 통틀어, 교도권이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청한 전례가 없다. 물론 공의회와 교황의 칙서들이, 성직자와 평신도가 저지른 폐해에 대하여 제재를 가하고, 많은 목자들이 이를 바로잡으려고 성심껏 노력한 적은 있으나, 교회 권위─교황, 주교 또는 공의회─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나 폐해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한 예의 하나로 유명한 것은, 개혁적이셨던 교황 아드리아노 6세 성하께서 1522년 11월 25일에 뉘른베르크 의회에 보내신 담화에서, 당시의 ‘로마 법정’이 저지른 ‘가증스러운 행위와 폐해, 거짓’과 󰡒위에서 아래까지……뿌리 깊이 퍼져 있는 의원들의 고질적인 병폐󰡓를7) 공개적으로 인정하신 것이었다. 교황 아드리아노 6세 성하께서는 그 시대의 잘못들, 정확히 말하자면 바로 앞의 선임자이신 교황 레오 10세 성하와 교황청이 저지른 잘못을 개탄하셨지만, 용서를 청하지는 않으셨다. 교황이 하느님과 동시대인들에게 용서를 청하게 된 것은 바오로 6세 성하에 이르러서였다. 교황 바오로 6세 성하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두 번째 회기 개막 연설에서, “우리(가톨릭 교회)에게” 해를 입었다고 느껴 왔을 동방의 “갈라진 형제들과……하느님의 용서”를 청하셨으며, 가톨릭 교회가 입은 해에 대해서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히셨다. 바오로 6세 성하의 관점에서,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하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의 죄와 상호 잘못으로 추정되는 죄에만 관련되었다.

1.2 공의회의 가르침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 바오로 6세 성하와 같은 접근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일치를 거스른 잘못들에 대하여, 공의회 교부들은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우리가 용서하는 것처럼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도록 하느님과, 갈라진 형제들에게 겸손되이 용서를 청한다.”8) 하고 말한다. 일치를 거스른 잘못에 더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부 책임이 있는 과거의 다른 부정적인 사건들도 언급되었다. 그러므로 “공의회는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일부 태도들을 개탄한다.”9)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신앙과 과학이 서로 대립한다고 생각하게 만든 태도들이다. 마찬가지로, 공의회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종교의 참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 버리는”10) 태만함을 보임으로써 ‘무신론의 발생’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주시한다. 덧붙여, 공의회는 “언제, 누가 감행하였든지” 온갖 박해와 반유다주의의 표명을 “통탄한다.”11) 그러나 공의회는 위에서 언급한 사실들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지는 않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학적 관점에서, 교회의 흠 없는 충실성과 그 구성원들인 과거와 현재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나약함을 구분하였다.12) 따라서 “티나 주름도 없이……거룩하고 흠 없는”(에페 5,27) 그리스도의 신부와, 성령 안에서 영원한 내적 쇄신(metanoia)으로 부름 받은 용서받은 죄인인 그 자녀들을 구분하였다. “교회는 그 품에 죄인들을 품고 있으므로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겠기에 끊임없이 회개와 쇄신을 계속하는 것이다.”13)

공의회는 또한 과거의 잘못을 현재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죄의식과 책임에 관하여 어떤 식별 기준을 마련하였다. 실제로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맥락에서, 과거에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현재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가할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 “그리스도 수난하실 때에 저질러진 범죄를,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유다인에게 차별 없이 책임지우거나 더구나 오늘날의 유다인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14)

● “적지 않은 단체들이 가톨릭 교회와 완전한 일치에서 갈라지게 되었으며, 때로는 양쪽 사람들에게 탓이 있었다. 이러한 단체들 안에서 지금 태어나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을 분열의 죄과로 몰아세울 수는 없으므로, 가톨릭 교회는 그들을 형제적 존경과 사랑으로 받아들인다.”15)

공의회가 끝나고, 1975년에 첫 성년이 거행되었을 때, 교황 바오로 6세 성하께서는 ‘쇄신과 화해’를16) 성년의 주제로 정하시고, 교황 권고 Paterna cum benevolentia에서, 화해는 먼저 가톨릭 교회의 모든 신자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셨다.17) 그리하여 성년은 그 기원처럼, 죄인들이 교회의 성사 경륜을 통하여 하느님께 회개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1.3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용서 요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바오로 6세 성하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18)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의 역사를 특징짓는 󰡐슬픈 기억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유감을 표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교회나 그리스도인 개인과 집단이 여러 모로 연루된 수많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용서를 청하셨다.19)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Tertio Millennio Adveniente)에서,20) 교황님께서는 2000년 희년이 과거 천 년 동안 일어났던 온갖 ‘반증거와 추문’의 행태들에서 교회의 기억을 정화시켜 줄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히셨다.21)

교회는 ‘자기 자녀들의 죄과를 더욱 철저하게 의식하도록’ 권고받고 있다. 교회는 ‘언제나 자기 자녀들에게 죄가 많음을 인정하며’, ‘자기 자녀들이 참회를 통하여 과거의 과오와 불충한 사례들, 항구하지 못한 자세와 구태 의연한 행동에서 자신을 정화하도록’22) 권유한다. 우리 시대의 죄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도 마찬가지로 언급되고 있지만,23) 과거의 잘못과 함께 오늘날의 교회의 연대가 특히 강조되고 있다. 과거의 잘못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이나24) 과거에 복음화를 위하여 사용되었던 ‘폭력적이고 편협한 방법’25) 같은 것들이 명백히 언급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또한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문제와, 어떻게든 동시대인들의 용서를 구하는 문제를 신학적으로 더욱 깊이 발전시켜 나가셨다.26) 교황 권고 「화해와 참회」(Reconciliatio et Paenitentia)에서, 교황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할 때 “죄인은 자기 죄와 이에 대한 참회 그리고 신뢰심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홀로 서게 되며……아무도 다른 이를 대신해서 참회를 하거나 용서를 청할 수는 없다.”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죄는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참회자의 죄 때문에 상처를 입는 것은 참회의 교역자인 사제로 대표되고 또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는 은총의 성사적 중개자인 교회 전체이다.27) 또한 정의, 자유, 평화가 손상될 때 인간 공동체 안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사회적 죄’의 상황은 언제나 ‘많은 개인적 죄가 쌓이고 응집된 결과’이다. 도덕적 책임이 익명성을 띠고 희석되어 버릴 때, 우리는 유추적으로만 사회적 죄라는 말을 쓸 수 있다.28) 따라서 잘못에 대한 책임 전가를, 작위나 부작위 또는 태만으로 자발적으로 거기에 동의하였던 사람들의 집단 너머로 확대하여서는 안 된다.

1.4 제기된 문제들

교회는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살아 있는 사회이다. 교회의 기억은, 사도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고 교회의 믿음과 생활의 규범이 되는 전통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자신이 겪어 온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역사적 경험의 다양성으로 풍부하다. 교회의 과거는 대체로 교회의 현재를 구성한다. 교의적, 전례적, 교회법적, 수덕적 전통은 신앙 공동체의 삶을 풍부하게 하고 본받아야 할 전형을 제시한다. 그러나 지상 순례의 여정에는, 좋은 씨와 가라지가 언제나 함께 자라고, 거룩함과 불충과 죄가 나란히 있다.29) 그러므로 과거의 추문에 대한 기억은 오늘날 교회의 증거에 장애가 될 수 있지만, 지난날 교회의 자녀들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들에 대한 인정은 현재에 쇄신과 화해를 촉진할 수 있다.

과거의 잘못을 규정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역사적 판단을 요구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따른다.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책임이나 잘못을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들의 탓으로 돌려야 할지, 아니면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국가’를 이루었던 사회나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긴밀히 얽혀 있던 권력 구조의 탓으로 돌려야 할지를 언제나 구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당시에 신앙 공동체로서 교회의 행위와 사회의 행위 사이에 삼투 작용이 있었다면 이를 올바로 식별하려는 역사적 해석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행동은 여러 집단에게 교회의 생명력과 진실성의 표지로 이해되어, 교회에 대한 신뢰를 강화시켰다. 더욱이, 일부 의견들이 무지나 잘못된 믿음으로 교회를 반계몽주의나 불용과 동일시하려는 분야들에서 특히, 교회가 자신에 대한 왜곡되고 수용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바꾸는 데 이바지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교황님의 용서 요청은 교회 안팎에서 긍정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국가나 정부의 수반들, 민간 단체와 공공 단체, 종교 집단들이 오늘날 불의로 얼룩진 역사적 사건이나 시기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단순한 말장난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과거 잘못에 대한 인정에 따르는 비용─그 가운데에는 법률적 차원의 것들도 있다.─을 계산하여, 과거 잘못에 대하여 용서 청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엄격한 식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부 신자들은 혼란에 빠져 교회에 대한 충성이 흔들리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만약 교회가 죄와 잘못을 저질렀다면 젊은 세대들에게 어떻게 교회에 대한 사랑을 전해 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또 어떤 이들은, 잘못에 대한 인정이 대부분 일방적이며, 교회를 비방하는 자들, 곧 교회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편견을 교회가 확인시켜 주고 있다고 기뻐하는 자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오늘날의 세대들이 전혀 동의하지 않은 잘못을 가지고 그들에게 임의로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데 대하여 경고하면서도, 일부 집단의 사람들이 과거에 그들의 조상이 겪었던 불의의 결과로 오늘날에도 피해를 입고 있다고 느끼는 정도만큼 그에 대하여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한다. 또 다른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발전되어 온 기억에 대한 비판 작업에 참여하는 일만으로도, 과거에 교회가 연루된 모호한 행동들을 정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과거의 죄악에 책임이 있는 유일한 집단으로 자처하지는 않지만, 동시대인들과 연계하여 우리 시대의 도덕적 양심이 비난하는 것들을 거부하고, 교회의 자녀들이 저지른 과거의 행동으로 아직도 상처 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상호 이해 안에서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어떤 집단들은 다른 집단들에게서 유추하거나 또는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 왔다고 생각하여 자신들에게 용서를 구할 것을 요구할 수 있음도 예상하여야 한다. 어쨌든, 기억의 정화는 교회가 신앙이나 도덕의 영역에서 교회에 위임되어 온 계시된 진리의 선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많은 문제들이 규명될 수 있다.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 재판과 같은 먼 역사적 현상에 대하여 오늘날의 양심에 ‘죄의식’을 부여할 수 있는가? 도덕적 양심은 시대와 상관 없는 것처럼, (마태오 복음 23장 29-32절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였던 것처럼) 과거의 사람들을 오늘의 양심으로 판단하는 것은 너무 안이하지 않은가? 반면, 하느님의 진리와 그것의 도덕적 요구는 변함 없는 가치를 지닌다는 단순한 사실을 바탕으로, 윤리적 판단은 언제나 유동적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가? 어떠한 태도를 취하든 간에 이러한 문제들을 잘 수용하여 교회에 대한 믿음 안에서 계시와 그것의 활발한 전수에 바탕을 둔 답을 모색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 문제는, 과거 잘못에 대하여 특히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여야 한다면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화해라는 성서적 신학적 지평 안에서 명확하게 밝히는 일이다.

제2장꺖볼↨û 접근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이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 관한 연구와, 신약성서의 전승에 나오는 것처럼 잘못을 고백하는 주제는 여러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다.30)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성찰의 신학적 성격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교회에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도록 권유하신 배경이 되는 성서의 증언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주제에 접근하게 한다.

2.1 구약성서

죄의 고백과 그에 따른 용서의 요청은 성서 전체에 걸쳐서─구약성서의 이야기들, 시편, 예언서, 신약성서의 복음들에서─발견된다. 또한 지혜서와 신약성서의 서간들에서도 드문드문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증언들이 두루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 방대한 양의 주요 본문들을 어떻게 선택하고 분류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여기에서 죄의 고백과 관련된 성서 본문들에 대하여,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어떤 종류의 잘못을) 고백하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이런 방식의 질문은 두 가지 주요한 범주의 ‘고백문’을 구분하도록 도와 준다. 각 범주의 고백문은 또 다른 부차적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 곧, 가) 개인의 죄에 대한 고백문, 나) 백성 전체의 죄(와 그 조상들의 죄)에 대한 고백문이다. 이러한 연구에 동기를 부여한 최근의 교회 활동과 관련하여, 우리의 분석은 두 번째 범주에 국한될 것이다.

이 두 번째 범주에서는, 누가 백성의 죄를 고백하는가에 따라서, 또 개인의 책임에 대한 자각(은 점진적으로 성숙해 왔을 뿐이다: 에제 14,12-23; 18,1-32; 33,10-20 참조)의 유무(有無)를 떠나, 누가 공동의 죄와 연관되어 있는가 또는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다양한 표현들이 발견될 수 있다. 이러한 기준에 바탕을 두어, 다음과 같이 다소 유동적인 경우들을 식별할 수 있다.

● 첫째 부류의 본문들은 그 백성 전체(때때로 ‘나’라는 단수로 개인화된다.)를 나타낸다. 그들은, 자기들 역사의 특정한 순간에, 그 전 세대들의 잘못에 대한 어떤 (명백한) 언급도 없이, 하느님을 거슬러 지은 죄를 고백하거나 암시한다.31)

● 둘째 부류의 본문들은 그 백성의 현행 죄에 대하여 한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종교) 지도자들의 입을 통하여 하느님께 고백한다. 이들 지도자들은 그들 기도의 대상인 죄 많은 백성 속에 자신들을 명백히 포함시킬 수도 있고 포함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32)

● 셋째 부류의 본문들은 그 백성이나 그들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조상들의 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당대 세대의 죄는 언급하지 않는다.33)

● 조상들의 잘못을 당대 세대의 잘못과 명백히 연관시켜 언급하는 고백들이 더욱 자주 나온다.34)

우리는 수집된 증거들을 바탕으로, ‘조상의 죄’가 언급되고 있는 모든 경우에 죄의 고백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상대로 하며, 그 백성이 고백하거나 또는 그 백성을 위하여 고백하는 죄는 다른 사람들에게 범한 죄라기보다는(민수기 21장 7절에서만 해를 입은 당사자인 모세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하느님께 직접 범한 죄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35) 성서 저자들이 선과 악에 대하여 세대간에 걸쳐 강한 연대 의식을 보였다고 한다면(‘집단적 인격’의 개념을 생각해 보라.), 왜 그들이 당대의 대화 상대자들에게 그들의 조상이 저지른 죄에 대한 용서의 요청을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다양한 가정들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성서는 주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므로, 하느님께 범한 잘못이 개인적인 것이든 민족적인 것이든 그러한 잘못에 대한 인정을 우선으로 한다. 더욱이,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에게 저지른 폭력 행위, 곧 그 민족들이나 그 후손들에게 용서를 청하여야 할 행위들은 창세기 2─11장, 신명기 7장 2절(가나안족의 멸족)이나 사무엘 상권 15장과 신명기 25장 19절(아말렉의 멸망)에서와 같이, 하느님의 지시를 따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한 경우들에서, 하느님의 명령이라면 어떠한 용서의 요청도 배제되는 것 같다.36)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들에게 당한 학대의 경험과 거기에서 온 증오는 그들 자신이 다른 민족에게 저지른 악행에 대하여 용서를 청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였을 수도 있다.37)

어떤 경우이든, 죄에 대한(또한 은총에 대한) 세대간의 연대 의식은 성서의 증언과 연관되어 있고, ‘조상의 죄’에 대하여 하느님 앞에서 드리는 고백에서 잘 드러난다.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유명한 아자리야의 기도를 인용하시며 이렇게 언급하셨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시며 공경하올 주님, 찬미 받으소서.……우리는 죄를 지었으며 당신을 떠남으로써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과연 우리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율법이 명하는 것을 귀담아듣지 않았으며 그것을 지키지도 않았습니다’(다니 3,26.29-30). 따라서 유다인들은 이집트 탈출 이후에 드린 기도에서 자기 조상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였습니다(바룩 2,11-13 참조). 교회는 그들을 본받아, 교회의 자녀들이 저지른 역사적 죄에 대하여 용서를 청합니다.”38)

2.2 신약성서

죄의 개념과 관련된 근본 주제로서 신약성서에서 폭넓게 나타나는 주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거룩함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의 하느님은 ‘거룩하신 아버지’(요한 17,11)이시며, 요한 1서 2장 20절에서 ‘거룩하신 분’(묵시 6,10 참조)으로 지칭되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다(요한 4,22 참조). 이사야서 6장 3절에서 하느님을 세 번이나 ‘거룩하시다’고 한 선언은 묵시록 4장 8절에서도 되풀이되며, 베드로 1서 1장 16절은 “성서에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레위 11,44-45; 19,2 참조) 하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거룩함에 대한 구약성서의 개념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은 나자렛 예수님이라는 인간을 통하여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강생하신 성자의 거룩함으로 나타나게 된다(마르 1,24; 루가 1,35; 4,34; 요한 6,69; 사도 3,14; 4,27.30; 묵시 3,7 참조)는 의미에서, 구약성서의 개념은 무시되기보다는 발전되어 왔다. 성자의 거룩함은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갈라 4,4-6; 로마 8,14-17 참조) “예수님의 제자들”과 공유되었다(요한 17,16-19 참조).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이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열망할 수 없다(마르 12,29-31; 마태 22,37-38; 루가 10,27-28 참조).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절대적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웃 사랑은 요한 복음서에서 “새 계명”이 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더할 나위 없이 “극진히”(요한 13,1)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요한 13,34-35; 15,12.17 참조). 그리스도인은 모든 인간적 정의의 기준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와 성부의 상호 사랑을 반영하는 인간 사이의 상호 사랑이 생겨날 수 있게(요한 13,34 이하; 15,1-11; 17,21-26 참조) 사랑하고 용서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화해와 죄의 용서라는 주제가 크게 강조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처럼, 그들에게 잘못한 이들을 언제나 기꺼이 용서해 주도록 요구하신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잘못을 용서하소서”(마태 6,12.13-15 참조). 자기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도 하느님의 용서를 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 사람임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비록 그가 용서를 청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도록 요청받고 있다(마태 18,21-22 참조).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받은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모욕받은 사람이 자신도 하느님 앞에서는 죄인이며, 하느님께서는 진실로 간청하면 결코 용서해 주지 않으시는 법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여, 자신이 먼저 “진심으로” 용서함으로써 잘못을 덮어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마태 18,35; 마르 11,25 참조). 마태오 복음 5장 23-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하고 말씀하신다. 자기 이웃에게 입힌 피해를 먼저 보상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의 예배는 하느님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돌리어 진실로 화해를 바란다는 것을 적절히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죄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 그리고 이웃과 맺는 관계를 손상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죄인(루가 15,21 참조)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용서를 기대할 수 있다. 하느님만 홀로 언제나 자비로우시고 우리의 죄를 기꺼이 덮어 주실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이는 또 단 한 번에 우리의 죄를 정화시켜 주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갖는 의미이기도 하다(히브 9,22; 10,18 참조). 그리하여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그 피해자는 모든 사람을 그분의 자비 안에 받아들이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과 화해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오로의 편지들과 그 외의 가톨릭 서간들을 분석해 볼 때, 초기 교회가 과거의 죄로 관심을 돌려 용서를 청하였다는 언급은 없다. 이는 공동체를 과거보다는 미래로 향하게 하였던 그리스도교의 강력하고 철저한 쇄신 의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 전체에 걸쳐 더욱 광범위하고 세밀하게 강조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복음서와 서간들에서 그리스도교 체험의 양면 가치가 온전히 인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바오로에게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새롭게 태어나는”(2고린 5,17; 갈라 6,15 참조) 경험을 한 종말론적 백성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써만 가능한 그 경험(로마 3,21-26; 5,6-11; 8,1-11; 1고린 15,54-57 참조)은 우리가 아담의 죄 때문에 세상 속에 현존하는 죄로 기울어지려는 것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느님의 개입은 두 가지 계획을 가능하게 한다. 곧 아담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이 두 역사는 나란히 나아가며, 신자는 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은총이 흘러 넘치는”(로마 5,12-21 참조) 역사의 일부가 되기를 기대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을 신학적으로 다시 읽으면, 초기 교회가 세례 받은 신자의 결함 가능성을 얼마나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바오로는 온몸으로, 신자들이 인간 조건의 나약함을 깊이 자각하더라도 그들의 존엄성을 온전히 인식하도록 일깨워 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1). 복음서에서 우리는 유사한 동기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나약함이 이야기의 주된 주제의 하나를 이루고 있는 마르코 복음에서이다(마르 4,40-41; 6,36-37.51-52; 8,14-21.31-33; 9,5-6.32-41; 10,32-45; 14,10-11.17-21.27-31.50; 16,8 참조). 비록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모든 복음사가에게서 같은 동기가 발견된다. 유다와 베드로가 각각 배반자와 스승을 부인하는 사람으로 나오지만, 유다는 자신의 행동을 비관하여 목숨을 끊는 반면(사도 1,15-20 참조), 베드로는 회개하고(루가 22,61 참조) 세 번이나 주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요한 21,15-19 참조). 마태오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그분을 찬미하였지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마태 28,17). 제자들이 비록 무지와 결함, 부인, 배반의 반응을 보였지만(요한 13,1-38 참조), 네 복음서는 그들을 비할 데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 제시한다.

죄에 굴복하여 마음이 흔들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이처럼 계속해서 소개하는 이유는 단순히 초기 역사를 비판적으로 다시 읽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들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복음서를 길잡이이며 영감의 샘으로 여기는 다른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를 대상으로 하도록 짜여져 있다. 더욱이 신약성서에는 바르게 행동하고, 더 높은 수준의 봉사를 하며 살고, 악을 피하라는 권유들로 가득하다(예를 들면, 야고 1,5-8.19-21; 2,1-7; 4,1-10; 1베드 1,13-25; 2베드 2,1-22; 유다 3,13; 1요한 3,5-10; 2,1-11.18-27; 4,1-6; 2요한 1,7-11; 3요한 1,9-10 참조).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라는 명백한 권유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그리스도인의 조건에 맞는 종말론적 삶을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죄와 악이 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요한 묵시록에서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 담긴 책망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청원에 따라, 그들은 이렇게 기도한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루가 11,4; 마태 6,12 참조).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들어가는 세례에 따라 살지 않을 때 그들의 소명에 부합하는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2.3 성서의 희년

과거 상황의 극복과 화해를 위한 중요하고 대표적인 성서 전례는 레위기에 규정되어 있는 희년 경축이다(25장). 부족, 씨족, 가문으로 이루어진 사회 조직에서, 개인이나 가문 사이의 싸움은 목숨을 “건지려고” 자기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 땅이나 집, 종 또는 자식들을 속전(贖錢)으로 내어 줌으로써 불가피하게 무질서의 상황을 가져왔다. 그러한 제도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위하여 주신 같은 땅에서 일부 이스라엘인들을 빚이나 가난, 종살이와 같은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일정 지역이나 지파가 길거나 짧은 기간 동안 소수 부자들의 손에 넘어가고, 그 지파의 나머지 가문은 빚을 떠안거나 종살이의 처지로 전락하게 되어,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여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레위기 25장의 규정은 이러한 사태를 뒤집으려는 시도이다(그 규정이 온전히 실천되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규정은 50년마다 희년을 거행하여, 하느님 백성의 사회 조직을 보존하고 그 나라에서 가장 소수인 종족에게까지 독립을 회복시켜 주고자 하였다. 레위기 25장에서, 그분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어 해방시키신 하느님께 이스라엘이 일정하게 신앙 고백을 되풀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 주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 하느님이다. 나는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어 너희의 하느님이 되리라”(레위 25,38.42.45 참조). 희년 거행은 잘못에 대한 암묵적 자인이었고, 올바른 질서를 재확립하려는 시도였다. 한때는 종이었지만 이제 하느님의 강력한 팔로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 사람을 이간하려는 어떠한 제도도 이집트 탈출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희생자들과 고통 받는 이들의 해방은 예언자들의 계획에서 훨씬 더 넓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신명기와 이사야서에서, 고통 받는 종의 노래(이사 42,1-9; 49,1-6; 50,4-11; 52,13─53,12 참조)는 이러한 암시들을 해방, 자유, 회귀, 구원을 주제로 하는 희년의 실천으로 발전시킨다. 이사야서 58장은 사회 정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예식의 준수를 비난하며,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을 요구한다(이사 58,6 참조). 이는 특히 골육에 대한 의무에 집중된다(이사 58,7 참조). 더욱 명백하게, 이사야서 61장은 희년의 상징을 사용하여, 기름부음 받은 이를 억눌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리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러 파견된 하느님의 전령으로 묘사한다. 의미 심장하게도,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루가 복음 4장 17-21절에서 이사야서 58장 6절을 암시하시며 자신의 삶과 직무를 소개하시고자 사용하신 바로 그 대목이다.

2.4 결 론

이상에서 우리는, 과거에 교회의 자녀들이 저지른 잘못과 그 피해에 대하여 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길을 통하여 희년을 특별한 해가 되게 하라고 교회에 요청하신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호소는 성서에서 그와 같은 예를 찾을 수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거룩함, 하느님 백성의 세대간의 연대, 그 백성의 죄에 관한 성서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교황님의 호소는 하느님께서 태초에 계획하셨던 창조 질서의 회복을 위하여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성서의 희년 정신을 올바로 포착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희년의 “오늘”(루가 4,21 참조)이 그분 교회의 희년 거행을 통하여 계속해서 선포되어야 한다. 그에 더하여, 이러한 유일무이한 은총의 체험은 하느님 백성 전체와 세례 받은 모든 이를 재촉하여, 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언제든지 기꺼이 용서해 주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한다.39)

제3장 신학적 토대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제이천년기가 그 끝에 이르면서, 교회는 자기 자녀들의 죄과를 더욱 철저하게 의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가치에 영감을 받은 삶을 세상에 증언하기는커녕, 참으로 반증거와 추문의 행태를 보이는 사고 방식이나 행동 양식에 빠져들어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 정신에서 벗어났던 역사의 모든 시대를 그 자녀들에게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거룩하기는 하지만,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앞에서 교회는 언제나 자기 자녀들에게 죄가 많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40)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이 말씀은 교회가 그 자녀들의 죄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고 있는지를 강조한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성부께서 성자의 희생제물과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교회를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실제로 자신의 어깨 위에 세례를 통하여 낳은 자기 자녀들의 죄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의미에서는 죄인이기도 하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방식과 유사하다(로마 8,3; 2고린 5,21; 갈라 3,13; 1베드 2,24 참조).41) 더 나아가 교회는, 시간 안에서 철저하고 깊은 자각을 통하여, 자신이 선택받은 이들의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구성하는 신비의 일치 안에서 현재와 과거의 의인과 죄인을 함께 품고 있는 공동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로 은총과 죄의 상처를 통하여 오늘 세례 받은 이들은 어제 세례 받은 이들과 긴밀히 결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시간적 공간적으로 하나인 교회는 참으로 “거룩하면서 언제나 정화되어야 한다.”42) 교회의 신비를 특징짓는 이러한 역설에서 다음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하나는 교회가 자신의 거룩함에 대한 믿음을 단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에 참회와 정화가 끊임없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3.1 교회의 신비

“교회는 역사 안에 있으나 동시에 역사를 초월한다. 우리는 오직 ‘신앙의 눈으로’만 교회의 가시적 실재와 동시에 하느님의 생명을 지닌 영적 실재를 볼 수 있다.”43) 교회의 가시적이고 역사적인 모든 측면은, 하느님 말씀의 강생 안에서 성자께서 받아들이신 인성이 하느님의 위격이신 성자의 활동을 나타내는 표지이며 도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과 관련되어 있다. 두 차원의 교회는,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하는 동시에 세례 받은 이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역사적 차이를 넘어 서로 일치감을 느끼게 하는 친교 안에서,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로 합성된 하나의 복잡한 실체”를44) 이룬다. 이러한 친교에 힘입어, 교회는 자신을 어제와 오늘의 자기 자녀들의 재능과 공로와 잘못을 짊어질 수 있는, 인간사에서 단연 유일한 주체로 제시한다.

그러나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에 대한 이러한 뚜렷한 유비에는 근본적인 차이도 내포되어 있다.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흠도 죄도 없으신’ (히브 7,26)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모르셨지만(2고린 5,21 참조), 오로지 백성들의 죄를 없이하시러 오셨으므로(히브 2,17 참조), 자기 품에 죄인들을 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하는 것이다.”45) 강생하신 말씀 안에 죄가 없다고 해서 그 교회도 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없다. 반대로,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되고, 끊임없이 정화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다른 사람들의 나약함을 공유하고 있다. “성직자들을 포함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1요한 1,8-10 참조). 세상 종말까지 모든 사람 안에 죄의 가라지와 복음의 좋은 씨가 함께 자라고 있다(마태 13,24-30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손길에 붙들렸지만 아직은 언제나 성화의 길을 가야 하는 죄인들을 교회는 불러모은다.”46)

교황 바오로 6세 성하께서 이미 장엄하게 선언하신 것처럼, 교회는 “그 품에 죄인들을 품고 있기는 하지만 은총 생활만을 영위하기 때문에 거룩하다.……따라서 교회는 이러한 잘못들로 고통 받으며 그 잘못들을 속죄하지만,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자기 자녀들을 그 잘못에서 해방시킬 힘이 있다.”47) 교회는 그 ‘신비’ 안에 거룩함과 끊임없이 보완되어야 할 나약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언제나 구원의 힘을 필요로 한다. 참된 ‘믿음의 법(lex credendi)’인 전례가 가르쳐 주는 것처럼,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성인(聖人)들의 공동체는 자기 신앙을 부정하는 개인들의 죄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의 믿음을 굽어보시도록(Ne respicias peccata nostra, sed fidem Ecclesiae Tuae!) 하느님께 간청한다. 시간과 공간을 통한 교회의 신비의 일치 안에서, 거룩함의 측면과 회개와 쇄신의 필요성, 그리고 어머니인 교회의 활동 안에서 그것들이 갖는 분명한 성격을 고려할 수 있다.

3.2 교회의 거룩함

교회는 거룩하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죽음에 넘겨 주고 얻으신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게 하셨고, 끊임없이 교회를 충만하게 하시는 성령의 거룩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결함 없이 거룩하다.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홀로 거룩하시다’고 칭송받으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신부로 삼아 사랑하셨고 그를 거룩하게 하시고자 자신을 바치셨으며(에페 5,25 참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당신과 결합시켜 당신 몸으로 삼으셨고 성령의 특은으로 가득 채워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모든 사람은 거룩함으로 부름 받았다.”48)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처음부터 “성도”라 불리었다(사도 9,13; 1고린 6,1; 16,1 참조). 그러나 교회의 거룩함과 교회 안의 거룩함은 구별될 수 있다. 성자와 성령의 사명에 바탕을 둔 교회의 거룩함은 시간의 종말까지 하느님 백성의 사명의 영속성을 보장하고, 신자들이 주체적이고 개인적으로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재촉하고 도와 준다. 거룩함의 형태는 각자가 받은 성소에 뿌리박고 있으며, 각자에게 자기 성소와 사명의 완성으로 주어지고 요구된다.

개인의 거룩함은 언제나 하느님과 다른 이들을 향하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사회적 성격을 띤다. 그것은 곧 모든 이의 선익을 지향하는 ‘교회 안의’ 거룩함이다.

따라서 교회 안의 거룩함은 교회의 거룩함과 일치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의 업적 때문에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부름 받아 주 예수님을 통하여 의화되었으며, 믿음의 세례로써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고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였기에 참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거룩하게 삶으로써 받은 성덕을 보존하며 완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49) 세례 받은 사람은 자신의 세례 축성으로 이미 거룩하여졌지만 자신의 온 존재로써 거룩하게 되도록 부름 받고 있다. 이는 자신의 자유로운 동의와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은총의 도움으로 자신의 온 존재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획에 일치시키는 성인처럼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지는 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인들은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비추시고자 교회 한가운데 밝혀 주시는 빛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빛은 전세계에 대한 예언이다.

3.3 지속적 쇄신의 필요성

이러한 거룩함을 흐리게 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죄의 존재 때문에 하느님 백성의 끊임없는 쇄신과 지속적인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교회는 지상에서 “참된 성덕을 지니고” 있지만 “불완전하다.”50) 아우구스티노는 펠라기우스파에 맞서서 이렇게 말한다. “온 교회가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하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흠과 주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백을 통하여 주름은 펴지고, 흠은 깨끗이 씻을 수 있다. 교회는 고백을 통해서 정화되고자 기도하며, 지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 일은 계속될 것이다.”51) 한편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온전한 거룩함은 종말론적 시간에 속한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그러나 아직 순례의 여정에 있는 교회는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기만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하여 이르러야 할 궁극 목적은 흠도 주름도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직 천상 본향에서만 가능할 뿐이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 것’인 지상 순례의 여정에서는 가능하지 않다.”52) 실제로, “세례의 옷을 입었지만, 우리는 죄를 짓고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새로운 청원(‘저희 죄를 용서하소서.’)으로써, 탕자가 그러하였던 것처럼(루가 15,11-32 참조) 아버지께 돌아서고, 세리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한다(루가 18,13 참조). 우리의 비참함과 하느님의 자비심을 동시에 ‘고백’하면서 우리는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53)

그러므로 온 교회는 자기 자녀들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그분의 무한한 선하심과 용서의 능력을 세상에 알린다. 성령께서 맺어 주신 유대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세례 받은 모든 신자 사이에 존재하는 친교는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이 되게 하는 동시에, 활발한 영적 선익의 교류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고 또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한다. 이처럼 각 사람의 성덕은 다른 사람들의 선익 증대에 영향을 주며, 죄 또한 모든 사람의 구원의 길에 따르는 무거운 짐이며 저항 세력이므로 오로지 개인에게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죄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진정 교회 전체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이를 인식한 교회 교부들은, “우리의 타락이 교회의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고54) 한 암브로시오처럼 예리한 말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거룩하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참회하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 앞에서 교회는 언제나 (어제와 오늘의) 자기 자녀들에게 죄가 많음을 인정하고 있다.”55)

3.4 교회의 모성

교회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활동에 결합되어 있어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그들 사이에 연대가 존재하므로 교회는 그 자녀들의 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확신이 특히 “어머니인 교회(Mater Ecclesia)󰡑의 개념에서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이 개념은 󰡒초기 교부들의 생각에는, 전체 그리스도인의 열망을 요약하고 있다.”56)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단언하는 것처럼, 교회는 “성부의 뜻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자신이 어머니가 된다. 교회는 복음 전파와 세례성사로써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느님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을 낳아 줌으로써 그들에게 영원한 새 생명을 준다.”57)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생각들이 반영된 방대한 전통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 거룩하고 존경받는 어머니인 교회는 마리아와 같다. 그리스도를 낳으시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신 마리아와 같이, 교회는 생명을 주는 동정녀이며, 여러분은 그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58) 카르타고의 성 치프리아노는 “교회를 어머니로 두지 않는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섬길 수 없다.” 하고59) 짧게 말하였다. 놀라의 성 바울리노는 교회의 모성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어머니인 교회는 영원한 말씀의 씨앗을 받아, 태내에 인간을 잉태하고 그들에게 생명을 준다.”60)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교회는 신앙과 성덕을 생겨나게 하는 환경으로서, 형제적 친교, 기도 안의 일치, 십자가에 대한 결속, 공통된 증언을 통하여 이 신자에게서 저 신자에게 성령을 전해 주고 교류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활발한 통공으로써, 세례 받은 모든 신자는 교회의 자녀인 동시에 어머니인 교회로 여겨질 수 있다. 모든 신자가 교회의 자녀인 까닭은 교회 안에서 태어나 하느님의 생명을 얻기 때문이며, 어머니인 교회인 까닭은 자신의 신앙과 사랑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새 자녀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에 협력하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가 어머니인 교회가 되면 될수록 그의 성덕은 더욱 커지고, 자신이 받은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려는 노력은 더욱 강하여진다. 반면, 세례 받은 신자는 죄 때문에 마음으로 교회와 갈라질 때조차도 계속해서 교회의 자녀로 남는다. 그는 언제든지 은총의 샘으로 다시 돌아와, 그의 죄가 어머니인 교회의 공동체 전체에 지운 짐을 벗겨 낼 수 있다. 한편, 교회는 진정한 어머니로서 어제와 오늘의 자기 자녀들의 죄로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지만, 자기 자녀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어느 때나 책임을 질 만큼 언제나 변함 없이 그들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교부들은 외부에서 오는 박해 때문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기 자녀들의 배신, 잘못, 늑장, 죄과 때문에 교회를 슬픔의 어머니로 여긴다.

따라서 교회 안의 성덕과 죄는, 비록 성덕이 하느님 은총의 열매이기 때문에 죄보다 더욱 강하다는 신념이 있기는 하지만, 그 성덕과 죄가 전체 교회에 미치는 영향 안에서 드러난다. 성인들은 이에 대한 빛나는 증거이며, 모든 이에게 전형이고 조력자로 인식되고 있다. 은총과 죄 사이에는 어떠한 병행 관계도 없으며, 대칭 관계나 변증 관계 같은 것도 있을 수 없다. 악의 영향은 결코 은총의 힘을 이길 수 없으며, 가장 깊이 숨겨진 선의 광채조차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그 성인들 안에서 자신을 거룩하다고 여긴다. 교회는 이러한 성덕을 기뻐하며 그 유익함을 알지만, 동시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 죄를 지은 주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성애적 연대 안에서 자기 자녀들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짐으로써 참회와 새로운 삶을 통하여 그러한 잘못을 극복하는 데 협력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회는, “인내로운 사랑과 겸허한 온유의 지고한 증인이신,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의 모습을 온전히 반영하는 것을 저해함으로써 교회의 면모를 더럽힌 자신의 수많은 자녀들의 나약함에 대하여 깊이 사과하여야 할”61) 의무를 인정한다.

이러한 유감의 표시는 특별히 은사와 직무를 통하여 하느님 백성의 친교를 가장 비중 있게 드러내는 사람들이 할 수 있다. 곧, 지역 교회를 대표하여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은 주교들이며,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전체 교회를 대신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일치의 보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 곧 “사랑으로 통치하는”62) 교회의 주교인 교황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교황님의 다음과 같은 촉구는 특히 의미 심장한 것이다. “교회는 자기 자녀들의 죄과를 더욱 철저하게 의식하고”, “(과거의 죄들)을 보상하고 간절하게 그리스도의 용서를 청하여야”63) 할 필요성을 인정하여야 한다.

제4장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

과거의 잘못을 규정하여 그것을 보상하려면 먼저 올바른 역사적 판단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학적 평가를 내려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정확하게 무슨 말과 행위가 이루어졌는가? 엄밀한 역사적 분석을 통하여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이 주어질 때 비로소, 일어났던 일과 말과 행위가 복음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 그럴 수 없다면 그렇게 행동하였던 교회의 자녀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이를 인식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교회의 일부 자녀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복음과 모순되게 행동한 일들이 복음에 어긋난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고 또 이를 피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도덕적 확신이 설 때에만, 오늘의 교회가 과거의 잘못을 보상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의 관계는 필수적이고 결정적인 것인 만큼 복잡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러한 판단은 어느 쪽에서든 거짓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호교론은 피하여야 하며, 역사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책임 전가로 부당하게 죄를 뒤집어씌워서도 안 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종교 재판에 관한 역사적 신학적 평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교회의 교도권은, 먼저 당시 상황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분명히 자연적인 윤리 행위, 곧 용서에 대한 요청을 할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의 교도권은 여론이 형성한 과거에 대한 모습도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습들은 흔히 격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 냉정하고 객관적인 식별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연유로, 제일 먼저 하여야 할 일은 역사가들에게 물어 보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역량권을 벗어날 수 있는 자연적인 윤리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사건과 관습, 사고 방식을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입니다.”64)

4.1 역사에 대한 해석

역사적 지식의 관점에서 과거를 정확히 해석하기 위한 조건들은 무엇인가? 그러한 조건들을 규정하기에 앞서, 우리는 해석의 주체와 해석의 대상인 과거의 객체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고려하여야 한다.65) 첫째, 해석하는 주체와 그 대상 사이의 이질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과거의 사건이나 말들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현재의 틀 속으로 완전하게 끌어들일 수는 없다. 과거의 사건이나 말들은 객관적인 비중과 복잡성을 가지고 있어서 현재의 관심사에 편의대로 맞출 수가 없다. 그러므로 활용 가능한 모든 정보를 이용하여 그러한 사건과 말들이 발생하게 된 정황과 사고 방식, 여건, 생생한 역동성을 복원하려면, 역사 비평적 연구를 통하여 그것들에 접근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방법으로, 그것들이 우리 시대에 다양하게 제기하는 내용과 과제들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해석하는 주체와 해석되는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공통점을 인식하여야 한다. 그러한 공통점이 없다면 과거와 현재 사이에 어떠한 유대나 소통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소통과 유대는, 어제의 인간이든 오늘의 인간이든 모든 인간은 복잡한 역사적 관계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관계를 이어 가려면 언어라는 매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매개 자체는 언제나 역사적으로 결정된다. 인간은 누구나 역사에 속하여 있다! 해석하는 주체와 해석되는 대상 사이의 이러한 공통점을 밝히는 일은, 과거가 증거로 남긴 여러 형태들(자료, 기념물, 전통 등)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과거의 말과 사건들에 대한 각자의 이해에서 드러나는 바에 따라, 과거와 현재 사이에 가능한 교류의 정확성과 소통의 어려움을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의 동기가 된 문제들과 그것들이 밝혀진 답들에 미치는 영향, 연구 작업이 착수되는 실제적 맥락, 해석하는 공동체와 그 언어 그리고 발언 대상 공동체를 고려하여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모든 해석 행위의 요소인 사전 지식이 될 수 있는 대로 반성적이고 의식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해석 과정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을 조정하고 조절하기 위해서이다.

끝으로, 알고 평가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해석하는 주체와 해석되는 과거의 대상 사이에 삼투 작용(‘지평의 융합’)이 일어나는데, 여기에서 바로 이해 행위가 이루어진다. 이것은 과거의 사건이나 말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판단되는 것의 표현이며, 그 사건이 해석하는 사람과 그의 세계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살아 있는 이 두 세계의 만남으로, 과거에 대한 이해는 그것을 현재에 적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과거는 그것이 드러내는 잠재성과, 현재를 변화시키도록 하는 자극을 통해서 파악되며, 기억은 새로운 미래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과거와 이루는 효과적인 삼투 작용은 이질성, 공통성, 참되고 올바른 이해의 단계들에 해당하는 일종의 기초적인 해석학적 작업들의 상호 작용으로써 이루어진다. 과거의 ‘자료’(일반적인 의미에서 기록이나 구술, 기념물, 비유 등의 증거로 이해된다.)와 관련하여, 이러한 작업들은 다음과 같이 나타날 수 있다. “1) 자료 이해, 2) 자료 해석의 정확성 판단, 3) 자료의 올바른 이해라고 판단되는 것에 대한 진술.”66) 과거의 증거에 대한 이해는 활용 가능한 모든 사료를 통하여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해석에 대한 정확성을 판단하는 것은 그 해석이 자신의 사전 지식이나 잠재적 편견에 이끌리거나 좌우되지는 않았는지 정직하고 엄격하게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결론에 이른 해석을 진술하는 것은 그 해석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다른 가능한 해석들을 알아보고자 다른 사람들을 과거와 나누는 대화로 초대하는 것을 말한다.

4.2 역사적 연구와 신학적 평가

모든 해석학적 행위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작업들은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을 통합하는 해석 과정에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이러한 방식의 해석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상이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있을 수 있는 과거의 잘못들을 판단하고자 할 때, 역사적인 시대가 다르다는 사실, 교회가 행동하는 사회적 문화적 시기가 다르다는 사실, 따라서 어느 한 사회와 시대에 적절하였던 전형(패러다임)과 판단으로 역사의 다른 시기를 평가한다면 잘못 적용되어 많은 오해를 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인물들과 제도들과 그들 각자의 역량이 다르며, 사고 방식과 조정 방식도 다르다. 그러므로 과거의 말과 행위에 대한 책임은 정확하게 규명되어야 하며, 교회의 용서 요청은 개별 인물들이 교회를 드러내는 다양한 방식과 수준, 그리고 지극히 다양한 역사적 지리적 상황에서 발생된 교회의 단일한 신학적 문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일반화는 피하여야 한다. 오늘날의 모든 가능한 진술은 현재의 상황 안에 놓여져야 하며, 적절한 주체(보편 교회, 한 나라의 주교들, 개별 교회들 등)가 맡아서 하여야 한다.

둘째,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의 상호 관계에서 고려하여야 할 점은, 신앙의 해석에서 과거와 현재의 유대는, 현재의 관심사와, 모든 인간은 공통적으로 역사에 속한다는 사실, 그리고 표현 매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치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성령의 활동과 신자들의 친교를 이루는 원리인 계시의 항구한 본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는─시간과 공간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교회 안에 이루어 주시는 친교에 힘입어─부족함이 많은 그들이지만, 자기 자녀들의 선택을 통하여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형태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에 응답하도록 부름 받은, 어떤 면에서는 유일한 주체로서, 모든 시대에 존재하고 활동하는 자신의 초자연적인 측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분이신 성령 안의 친교는 또한 통시적인 의미에서 ‘성인들’의 통공을 입증한다. 이로써 오늘날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은 어제 세례 받은 모든 사람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옛 사람들의 공로에서 이익을 얻고 그들의 성덕의 증거에서 양분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사람들은 철저한 역사적 신학적 연구를 통하여 옛 사람들의 잘못을 식별하고 거기에서 비롯된 모든 책임을 져야 할 의무를 느낀다.

다양한 역사적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백성의 이러한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친교의 토대 덕분에, 신자들은 교회의 과거를 해석하면서 이것이 현재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해석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과거와 맺는 만남은 현재에 특별한 가치를 지니며, 언제나 미리 예측할 수는 없는 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한다. 물론 해석학적 지평과 해석의 주체인 교회 사이의 강한 일치는 신학적 관점을 호교론적이고 편향적인 해석 쪽으로 기울게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과거의 사건과 진술들을 이해하고 오늘날의 시점에서 그 해석의 정확성을 평가하는 해석학의 활용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판단을 내릴 때 역사학적 방법과 해석학적 방법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역사적 해석학의 활용이 신앙적 평가를 방해하여 그 고유의 독특한 시각에 따라 자료들을 연구하는 것을 가로막거나, 자료들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주체의 하나인 교회의 양심 안에서 과거와 현재가 상호 작용하는 것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이는 과거 잘못들의 책임을 상대화하고 역사가 모든 것을 정당화하도록 하는 모든 역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정확한 역사적 판단은 그 시대의 문화적 조건에 대한 면밀한 연구와 분리시킬 수 없다.……그러나 잘못을 경감시켜 주는 요인들을 고려한다고 해서……수많은 자기 자녀들의 나약함에 대하여 깊이 사과하여야 할 의무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67) 교회는 “역사에서 드러나는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잘못이 확인되면, 특히 그러한 잘못이 여러 개인과 공동체와 관련될 때 모든 잘못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교회는 역사의 여러 시기를 정당화하거나 단죄하는 일반론들을 믿지 않는다. 교회는 과거에 대한 연구를 끈기 있고 솔직한 학문적 재구성에 맡기며, 교회와 교회가 저지른 잘못들에 대한 비난에 대하여 신조나 이념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68) 다음 장에 제시된 사례들은 그 구체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제5장 도덕적 식별

교회가 하느님 앞에서 적절한 역사적 양심 성찰을 함으로써 내적으로 쇄신되고 은총과 성덕으로 성숙하려면 교회 역사, 특히 지난 천 년 동안에 있었던 ‘여러 가지 반증거와 추문들’을 인정하여야 한다. 양심 성찰의 도덕적 영성적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면 그러한 일을 수행할 수 없다. 여기에는 몇 가지 핵심 용어에 대한 정의와 윤리적 해명이 필요하다.

5.1 몇 가지 도덕적 기준들

도덕적 차원에서 용서의 요청은 언제나 책임의 인정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이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보통 도덕적 책임은 행위와 그 행위를 한 사람의 관계를 말하며, 어떤 행동에 대하여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 책임을 특정 개인이나 사람들에게 귀속시킨다. 책임은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이 있다. 객관적인 책임은 선행이든 악행이든 행위 자체의 도덕적 가치를 말하며, 따라서 그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울 수 있음을 말한다. 주관적인 책임은 행한 행위의 선악에 대하여 개인의 양심이 실제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와 관계가 있다. 주관적인 책임은 행위를 한 사람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며, 다음 세대로 전가되지 않는다. 곧 자손들은 조상들의 행위에 대한 (주관적인) 책임을 물려받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용서를 청하는 것은 어떤 행위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과 그 행위를 한 사람들이 같은 시대에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역사를 통하여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책임은 객관적인 책임일 수 있으며, 주관적으로든 아니든 그 책임에 충실하는 데에는 누구나 자유롭다. 그러므로 악행은 행동의 결과 때문에 흔히 악행을 저지른 사람보다 오래가며, 후손들의 양심과 기억에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상호 관계를 통하여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연대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양심을 짓누르는 짐이 너무 무거워서, 저질러진 악행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 종교적 기억이 형성될 수 있는데, 이러한 기억은 본질적으로 공동의 기억이다. 이러한 공동의 기억은 과거에 악행을 저질렀던 사람들과 현재를 사는 후손들 사이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연대성을 뚜렷이 증언한다. 이 때에 객관적인 공동의 책임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나는 해방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청함으로써 얻어지며, 다음으로는 적절한 때에, 현재의 죄악과 잘못을 서로 용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는 ‘기억의 정화’를 통해서 얻어진다.

기억의 정화란, 새롭고 엄격한 역사적 신학적 판단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의 유산이 개인과 집단의 양심에 남겨 놓은 모든 형태의 원한과 폭력을 근절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새로운 도덕적 행동 방식의 바탕이 된다. 기억의 정화는, 진리와 정의와 사람들 사이의 사랑, 특히 교회와 교회가 관계하는 다양한 종교, 문화, 사회 공동체들 사이의 사랑을 통하여 화해를 증진할 목적으로 과거의 역사적 행위에 색다른 특성을 부여하여 현재에 새롭고 색다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공의회들의 수용이나 상호 파문의 폐기와 같은 법령들은 사후에 이루어지는 권위 있는 해석학적 판단이 교회의 모든 생활에 미칠 수 있는 이러한 영향을 상징하는 본보기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과거 역사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나타내며, 이는 현재 맺고 있는 관계들에 다른 성격을 부여할 수 있게 한다. 분열과 적대에 대한 기억은 화해의 기억으로 정화되고 대체되며, 교회의 모든 사람은 이를 받아들이고 마음에 새기도록 권유받는다.

과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의 결합은 그것이 현재에 미칠 수 있는 윤리적 반향과 연결되며, 도덕적 측면에서는,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의 관계가 갖는 해석학적 토대에 상응하는 몇 가지 원리들을 수반한다. 그 원리들은 다음과 같다.

가. 양심의 원리 ‘도덕적 판단’과 ‘도덕적 명령’인 양심은 하느님 앞에서 선행과 악행에 대한 최종 평가를 하는 것이다. 교회도 예수님처럼 어떤 행위들에 대하여 분류하고 판단하고 때로는 단죄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마태 18,15-18 참조), 사실 하느님만이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한 도덕적 가치를 알고 계신다.

나. 사실성(史實性)의 원리 모든 인간의 행위는 행동하는 주체에 속하므로, 모든 개인의 양심과 모든 사회는 한정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선택하고 행동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의 행위나 그 행위들의 상관적 역동성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러한 행동을 한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그러한 행동의 동기와 도덕적 원리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시간의 경과를 통하여 특정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연대성에 대한 편견 없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다. ‘전형(패러다임) 변화’의 원리 계몽주의 운동 이전에는 교회와 국가, 신앙과 문화, 도덕과 법률 사이에 일종의 삼투 현상이 존재하였으나, 18세기 이후부터 이러한 관계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종교적인 사회에서 다원적인 사회로, 더 나아가 일부 경우에는 세속적인 사회로 변화되었다. 사고와 행동의 모형, 이른바 행동과 평가의 󰡐전형󰡑이 바뀐다. 이러한 변화는 도덕적 판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이 도덕 원리나 도덕 자체의 본성에 대한 상대주의적 사고를 결코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기억을 정화하는 총체적 과정은 역사적 평가와 신학적 인식의 올바른 결합을 요구하므로, 교회의 자녀들은 위에서 지적한 기준과 원리들을 엄격히 고려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성령의 도움을 청하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 이는 원한이나 그릇된 자기 비난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대대로 자비를 베푸시는”(루가 1,50) 하느님, 죽음이 아닌 생명을, 단죄가 아닌 용서를, 두려움이 아닌 사랑을 바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정직한 시인이 교회와 시민 사회의 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범의 성격에 대해서도 주목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마음으로 진리에 순종하고, 다른 사람들 특히 힘 없는 사람들의 존엄과 권리를 존중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밝히신 수차례의 용서 요청은 개인과 집단에 새로운 화해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정직하고 결실 풍부한 양심 성찰을 촉구하며, 참된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본받도록 격려하는 모범이 된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윤리적 해명에 바탕을 두어, 교회 자녀들의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크게 대치되어 보이는 상황에 대한 몇 가지 예를 연구하고자 한다. 그 가운데에는 「제삼천년기」에 언급된 것들도 있다.69)

5.2 그리스도인의 분열

일치는 성자를 통하여 세상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의 법이다(요한 17,21 참조). 성자께서는 성령의 권능 안에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요한 13,1 참조), 그 생명을 전하여 주셨다. 이 일치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인류의 삶이 친교를 맺는 원천이며 방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상호 사랑의 법을 실천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하나가 되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되며”(요한 17,21), “세상 사람들이 그들이야말로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특히 이제 막 막을 내린 지난 천년기에는, 그리스도의 명백한 뜻과는 반대로, 마치 그리스도가 갈라진 것처럼(1고린 1,13 참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큰 분열이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사실을 이렇게 판단한다. “이 같은 분열은 분명 그리스도의 뜻에 위배될뿐더러, 세상에는 걸림돌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 수행에 지장이 되고 있다.”70)

“그리스도의 혼솔 없는 속옷을 찢어 놓은”71) 지난 천 년 동안의 주된 분열은 천년기 초기에 있었던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과, 그 후 4세기 뒤에 서방 교회에서 있었던 “일반적으로 ‘종교 개혁’이라 불리는”72) 사건에서 발단된 분열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분열은 그 발단과 시대와 장소 때문만이 아니라 특히 신앙과 교회 제도에 관련된 문제의 성격과 중요성에 따라 서로 매우 다르다.”73) 11세기의 분열에서는 문화적 역사적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반면, 교리적인 면은 교회와 로마 주교의 권위와 관련이 있었다. 이 주제는 지난 천 년 동안 교리의 발달로 오늘날에는 명백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경우에서는 또 다른 계시와 교리가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 차이점들을 극복하고자 시작된 방법은 서로 사랑으로 교리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초자연적 사랑인 아가페의 결핍이 양대 불화의 공통점이었던 것 같다. 이 사랑이야말로 복음의 최고 명령이며, 이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다.”(1고린 13,1)고 한다면, 우리는 교회와 역사의 주님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그러한 사랑의 결핍을 진지하게 인정하여야 한다. 교황 바오로 6세 성하께서도 이러한 사랑의 결핍을 인정하셨기에, ‘우리(가톨릭 교회)’ 때문에 상처 입었을 수도 있는 ‘갈라진 형제들’과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셨던 것이다.74)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낳은 분위기 속에서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는 교황 바오로 6세 성하와 나눈 대화에서, 반목과 상호 불신과 적대로 점철된 역사를 종식하는 데 꼭 필요한 상호 사랑의 회복(apokatastasis)이라는 주제를 강조하였다.75) 그것은 기억을 통하여 여전히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과거의 문제였다. (1054년에 있었던 동방과 서방의 파문을 파기한 것과 더불어 1965년 12월 7일에 절정을 이룬) 1965년의 사건들은 과거의 기억을 정화하고 새로운 기억을 창출해 내려는 것이며, 지난날 서로 배척하였던 잘못에 대한 고백이다. 이러한 새로운 기억의 바탕은 다름 아닌 서로에 대한 사랑이며, 더 나아가 그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새로운 결심이다. 이것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 내려진 “모든 일에 앞선”(1베드 4,8) 명령이다. 이렇게 하여 기억은 과거의 감옥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새 계명과 더욱 일치하여 미래의 건설자가 되도록 가톨릭 신자와 정교회 신자, 그리고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들에게 요청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새로운 기억에 대한 교황 바오로 6세 성하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의 증언은 하나의 본보기이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향한 여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문화적 요인, 역사적 상황, 편견 등에 이끌리거나 좌우되려는 유혹이다. 이러한 것들은 신앙의 문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데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분열과 상호 불신을 조장한다. 교회의 자녀들은 일치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적극 노력하는지, ‘내적 회개’의 삶을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양심 성찰을 하여야 한다. “사실, 새로운 마음(에페 4,23 참조), 자아 포기, 너그럽고 자유로운 사랑 등에서만 일치의 소망이 생기고 성숙하기 때문이다.”76) 공의회 폐막 이후 오늘날까지 공의회의 메시지에 대한 저항은 분명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였다(에페 4,30 참조). 일부 가톨릭 신자들이 과거의 분열에 안주하면서 일치를 저해하는 장애를 제거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분열의 죄에 연대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1고린 1,10-16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일치 교령’의 말을 되새겨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우리가 용서하는 것처럼 하느님과, 갈라진 형제들에게 겸손되이 용서를 청한다.”77)

5.3 진리를 위한 폭력의 행사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이라는 반증거에 덧붙여져야 할 것은, 지난 천 년 동안 복음 선포나 신앙 일치의 수호와 같은 좋은 목적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미심쩍은 수단들이 동원된 여러 경우의 반증거이다. “교회의 자녀들이 참회의 정신으로 되돌아보아야 할 역사의 또 다른 고통스러운 장은, 특히 어떤 세기에, 진리에 봉사한다는 미명 아래 불용과 폭력의 사용마저 묵인하였던 부분이다.”78) 여기에서 말하려는 것은, 계시된 진리를 선포하려고 부당한 수단을 동원한 복음화, 민족들의 문화 가치 기준에 부합하는 복음적 식별력이 결여된 복음화, 또는 신앙을 전달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존중하지 않는 복음화의 여러 형태들뿐 아니라, 억압을 위해서나 잘못을 바로잡고자 사용된 모든 폭력의 형태들이다.

지극히 다양한 역사적 상황에서 불의와 폭력을 고발하는 데 태만하였던 교회 자녀들의 잘못에도 또한 관심을 돌려야 한다. “인간의 기본권이 침해되는 상황에서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의 식별력이 부족하였습니다. 마땅히 하여야 했던 일들, 또는 나약함이나 그릇된 판단으로 침묵하면서 넘겨 버린 일들, 머뭇거리거나 부당하게 행하고 말하였던 것들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여야 합니다.”79)

언제나 그러한 것처럼, 역사-비평적 연구를 통하여 역사적 진실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단 사실이 입증되면, 그것의 객관적 중요성뿐 아니라 영성적 도덕적 가치를 평가하여야 한다. 그러할 때 비로소 모든 사회 통념의 기억을 떨쳐 버리고, 신앙의 빛 안에서 회개와 쇄신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올바르고 비판적인 기억에 이를 수 있다. “과거의 이 뼈아픈 순간들에서, 공의회가 공표한 숭고한 원칙에 전적으로 충실하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을 이끌어 가는, 미래를 위한 하나의 교훈을 끌어 낼 수 있습니다. ‘인간 정신에 부드럽고 힘차게 파고드는 진리는 오로지 진리 그 자체의 힘으로 드러날 뿐입니다.’”80)

5.4 그리스도인과 유다인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의 관계는 특별한 양심 성찰을 요구하는 영역 가운데 하나이다.81) “교회와 유다인의 관계는 교회가 그 밖의 다른 종교와 맺는 관계와는 다르다.”82) 그러나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의 역사는 고통스러운 것이다.……실제로 지난 2000여 년 동안 이들의 관계는 꽤 부정적인 것이었다.”83) 그 동안에 있었던 유다인에 대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적대 행위나 불신은 가슴 아픈 역사적 사실이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깊은 자책의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셨으며, 동정 마리아와 사도들도 유다인이었다. 교회는 이방인의 야생 올리브 나뭇가지와 접붙여진 참올리브 나무 뿌리에서 양분을 얻는다(로마 11,17-24 참조). 유다인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들이며,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형들’이다.”84)

쇼아 대학살은 분명히 나치즘의 결과였다. 나치즘은 유다인의 신앙을 경멸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간 존엄마저 부인한 무자비한 반유다주의로 고취된 이교의 이념이었다. 그러나 “일부 그리스도인의 정신과 마음에 깊이 박혀 있는 유다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나치의 유다인 박해가 더 쉬웠던 것은 아니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는 사람들, 특히 박해받는 유다인들에게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었는가?”85) 물론 목숨을 걸면서까지 유다인 이웃들을 구해 주고 도와 주었던 그리스도인들도 많았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영적 저항이나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 주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다.”86)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호소하여 ‘회개의 행위(테슈바)’를87) 요구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려는”(로마 12,2) 노력을 증대시키는 자극제가 되며, 유다인에게 입힌 상처에 대한 ‘도덕적 종교적 기억’을 간직하게 한다. 이 부분에서 이미 많은 것이 이루어졌지만, 이를 확인하고 더욱 심화하여야 한다.

5.5 오늘날의 죄악에 대한 우리의 책임

“실제로 현시대는 많은 빛과 함께 적지 않은 어둠도 보여 주고 있다.”88) 어둠의 요소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부인하는 온갖 형태의 현상을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데, 각별히 두드러지는 것은 서방 세계에서 이러한 부인이 특히 더욱 이론적인 측면에서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느님을 끌어내리는 것과 관련하여 마주치는 일련의 부정적인 현상들을 들자면, 종교적 무관심, 만연해 있는 인간 생명에 대한 민감한 의식의 결여, 세속주의 풍조, 윤리적 상대주의, 낙태법으로 인정된 태아의 생명권 부인, 인류 가족 전체에 걸쳐 있는 가난한 이들의 외침에 대한 지나친 무관심 등이다.

생각하기에 곤란한 질문은, 이론적이든 실제적이든 이러한 무신론의 형태들에 대하여 신앙인들이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목 헌장’은 적절한 말로 이렇게 답한다. “흔히 신앙인들 자신도 어느 정도 여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무신론이란 전체적으로 보아 원초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가지 원인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그 원인들 가운데에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 반동, 어떤 지방에는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발이 보태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이 무신론의 발생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89)

하느님의 참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되어 왔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참모습을 알 수 있는 크나큰 은총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살아 계신 하느님의 참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은 사랑(아가페)이시다.”(1요한 4,8.16)라는 진리를 이 세상에 전파하도록 부름 받았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또한 삼위이시므로, 삼위의 생명은 상호간의 끝없는 친교와 사랑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진리를 전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거나 교리를 잘못 제시하거나 종교, 윤리, 사회 생활에서 결점을 드러낸다면, 하느님과 종교의 참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 버린다고 말할 수 있다.”90)

끝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지난 잘못들을 언급하는 것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 그것들을 고백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역사의 주님이신 그분을 찬미하는 것임을 강조하여야 한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존재만 믿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를 믿는다. 더 나아가 이러한 잘못들을 상기하는 것은 의인이든 악인이든 진실의 길에서 우리를 앞서 간 사람들과 연대하고자 함을 뜻한다. 또한 그것은 현대인들에게 복음의 요구대로 변화하여야 할 강력한 이유와, 상호 화해의 길을 열어 주는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는 데에 필요한 준비를 제공한다.

제6장 사목작 선교적 관점

이상과 같은 고찰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교회의 이름으로 그 자녀들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들에 대하여 교회가 책임을 지는 사목적인 목적은 무엇이며, 무엇에 대하여 보상하는가? 그것이 하느님 백성의 생활에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교회의 선교 노력과, 다양한 문화와 종교와 대화하는 데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6.1 사목적 목적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목적 이유들 가운데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러한 행위는 기억의 정화를 지향하며, 이것은 위에서 주목한 것처럼, 과거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목적으로 하는 과정으로서 현재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왜냐하면 과거의 죄악은 흔히 현재에도 압박을 느끼게 하며 유혹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행된 악행에 대하여 품을 수 있는 원한의 원인들과 과거 행위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영향들을, 과거의 말과 행위로 상처 입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와 끈기 있는 상호 이해의 추구를 통하여 없앨 수 있다면, 이는 교회 공동체가 진리에 순종하며 화해와 평화를 통하여 성덕 안에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강조하신다. “과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도록 도와 주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유혹과 도전에 직면하도록 우리를 각성시키고 이를 극복하도록 준비시켜 줍니다.”91) 따라서 잘못들을 기억할 때, 오늘날에는 그 가운데 몇 가지만이 자주 언급될 뿐이라 하더라도, 빠뜨릴 가능성이 있는 모든 잘못을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복음에 충실하고 또 이웃에게 사랑의 봉사를 하고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치렀던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92)

첫 번째 목적과 긴밀히 연관된 두 번째 사목적 목적은 하느님 백성의 끊임없는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다. “대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도덕에서나 교회 규율에서나 교리의 표현 방법에서―이것은 신앙의 유산 자체와는 엄연히 구별되는 것이다.―정확하지 못한 것이 보존되어 왔다면 적당한 시기에 바로 정당하게 혁신되어야 할 것이다.”93)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자신이 교회에 관한 그리스도의 뜻을 얼마나 충실히 따르고 있는지 반성하고, 당연히 요청되는 쇄신과 개혁의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하여야 한다.”94) 참된 개혁과 진정한 쇄신의 기준은 그분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는 것이다.95) 그것은, 우리가 논의하는 것이 현재의 잘못이든 과거의 유산이든,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는 성실한 노력을 전제로 한다.

세 번째 목적은 자비의 하느님과 해방과 구원을 주시는 그분의 진리에 대하여 교회가 하는 증언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러한 증언은 교회가 역사 안에서 해 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하느님 체험에서 온다. 교회는 이런 방법으로 인류에게 봉사하며 현재의 죄악을 극복하도록 도와 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많은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교회 입장에서 진지한 양심 성찰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였습니다. 새로운 천년기의 문턱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 우리 시대의 죄악들에 대해서 그들 역시 지니고 있는 책임에 관하여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96) 이는 구원의 진리에서 오는 빛에 순종하며 우리 시대의 죄악들을 물리치려는 것이다.

6.2 교회에 미치는 영향

교회의 용서 요청이 교회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회개 행위를 받아들이는 과정의 다양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은 종교, 문화, 정치, 사회, 개인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어떤 역사적 상황과 관련된 사건이나 말들이 반드시 보편적 중요성을 지니지는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하며, 반대로, 한정된 신학적 사목적 관점에 따른 행위가 복음 전파에 강력한 영향을 끼쳐 왔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예를 들면, 선교 신학의 다양한 역사적 방식들을 생각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대중 매체가 교회의 발언 가운데 특정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할 수 있음도 고려하여, 그에 따른 영성적 이익과 손실의 관계를 따져 보아야 한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신중과 사랑으로 환영하고 생각해 주며 도와 주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로마 14,1 참조)를 언제나 기억하고, 특히 동방 교회들이나 그리스도인이 소수에 불과한 대륙이나 국가에 있는 교회들의 역사와 정체성, 현재의 상황에 주목하여야 한다.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발언하도록 요청받은 적절한 주체를 명기하여야 한다. 그 주체는 지역 주교나 주교단, 또는 로마의 주교인 보편 교회의 목자일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과거의 잘못과 그에 대하여 최선의 책임을 질 수 있는 현재의 주체를 인정할 때─마땅히 교도권과 교회 권위는 구별된다는 점을 생각하여야 한다. 모든 권위 행사가 교도권적인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 따라서 권위를 가진 개인 또는 여러 사람이 복음을 거슬러 하는 행동도 그 자체로 교도권의 은사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교도권의 은사는 주님께서 교회의 주교들에게 보장해 주시는 것이며, 따라서 교도권의 어떠한 보상 행위도 요구하지 않는다.

강조하여야 할 점은, 모든 용서 청원의 대상은 바로 하느님이시며, 용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특히 교회 공동체 안팎의 집단일 경우─을 적절한 역사적 신학적 분별을 통하여 확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적절한 보상 행위를 시행하고, 또한 그들에게 교회 자녀들의 선의와 진리에 대한 사랑을 증언하려는 것이다. 이 일의 성취는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로잡음으로써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려는 당사자들 사이의 대화와 상호 이해의 정도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관계─대화 상대자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때로는 불가능하다.─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간주할 수는 없으며, 사랑의 선물도 종종 일방적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상 행위는 시간을 끌어 왔던 책임의 인정과 연계되어야 하므로 상징적이고 예언적인 성격을 띨 수 있으며, 실제적인 화해(예를 들면, 갈라져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 또한 보상 행위를 정할 때, 대상이 될 사람들이 제시할 수 있는 정당한 요구에 귀 기울이며 그들과 공동 작업을 한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교육적 차원에서는, 상대편의 부정적인 인상이 영속되는 것을 피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부당하게 비난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신자들에게,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은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동참하는 것임을 강조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근원을 둔 이러한 해석은 활발한 신앙으로 용서의 요청에 동참하는 모든 사람─주체와 대상자 모두─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해방과 화해, 기쁨의 열매를 맺어 줄 수 있다.

6.3 대화와 선교에 미치는 영향

과거의 잘못에 대한 교회의 인정이 대화와 선교 차원에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영향은 다양하다.

교회의 선교 노력 차원에서, 이러한 행위가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복음화의 열정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시에 보상 행위는 진리에 대한 순종에서 비롯되고 화해의 열매를 맺는 데 이바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메시지에 대한 신뢰성을 증대시킬 수 있음을 유념하여야 한다. 특히 보상 행위의 세밀한 주제들과 관련하여, 교회의 만민 선교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역량에 비추어, 그것을 제안할 때 지역 상황을 세심하게 고려하여야 한다(예를 들어, 유럽 교회의 역사적 측면은 유럽인이 아닌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교회 일치 운동과 관련하여, 교회의 회개 행위의 목적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치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예언자적 행위가 일방적이고 전혀 아무런 대가 없는 솔선을 요구할지라도, 그러한 행위들은 호혜적으로 이루어져야 바람직하다.

종교간 차원에서, 교회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복음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따라서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진리에 대한 믿음을 훌륭하게 증언하는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러한 행위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편견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 오해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회개 행위가 자극이 되어 다른 종교인들도 그들의 과거 잘못을 인정한다면 그 또한 바람직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폭력과 집단 학살, 인권 침해와 민족들의 권리 침해, 약자들에 대한 착취와 강자들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한 것처럼, 여러 종교의 역사 또한 불용과 우상 숭배, 불의한 세력과 맺는 결탁, 양심의 존엄과 자유에 대한 부인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모두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문화와 하는 대화에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대화 상대자의 마음 속에 있는 회개와 용서의 개념이 지닌 복잡성과 다양성을 생각하여야 한다. 어떤 경우에서든,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교회가 책임을 지는 것은 자비의 발현이시며 용서의 원천이신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의 자기 증여와 복음에 비추어 설명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교회 친교의 본질을 시간과 공간을 통한 일치로서 설명하여야 한다. 용서를 청한다는 개념에 전혀 생소한 문화의 경우에는, 그러한 행위에 동기를 부여하는 신학적 영성적 이유들을 그리스도교 메시지로 시작하여 그 비판적 예언적 특성을 고려하는 적절한 방식으로 제시하여야 한다. 신앙의 언어에 대한 편파적인 무관심을 다룰 때에는 교회의 회개 행위가 가져올 수 있는 두 가지 결과를 고려하여야 한다. 하나는, 부정적인 편견이나 경멸적이고 적대적인 태도가 굳어질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행위로써,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느님󰡓의97) 신비로운 이끄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문화적 상황에서, 특히 서방의 문화적 상황에서 기억의 정화에 대한 촉구는 신자에게나 비신자에게나 똑같이 공동의 노력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공동의 노력은 그 자체로 이미 진리에 대한 순종의 긍정적인 증거이다.

끝으로, 시민 사회와 관련하여, 은총의 신비인 교회와 시간 안의 모든 인간 사회의 차이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용서 요청이 갖는 본보기적 성격과, 이 점이 다른 절박한 상황에서 기억의 정화와 화해를 위하여 유사한 조치를 취하도록 결과적인 자극을 줄 수 있음도 강조하여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용서의 요청은……주로 교회 생활과 관계가 있습니다. 곧 구원을 선포할 사명, 그리스도께 대한 증언, 일치를 위한 노력 등,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특징지어야 할 일관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생활의 샘인 복음의 빛과 힘은, 어떤 의미에서, 시민 사회의 자율성을 온전히 존중하면서 시민 사회의 결정과 행동에 빛과 힘이 흘러 넘치게 해 줄 역량을 지니고 있습니다.……제삼천년기의 문턱에서 우리는 마땅히 정치 지도자들과 민족들, 특히 흔히 옛 상처에 대한 기억과 증오로 촉발된 비극적 분쟁에 휘말려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본받아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인도되고, 숨김없는 솔직한 대화로써 서로 차이를 극복하려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주기를 희망합니다.”98)

결론

이 성찰을 끝내면서 마땅히 다시 한 번 강조하여야 할 것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모든 형태의 회개를 통하여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모든 구체적인 행위를 통하여,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향하여 영광을 드리고 그분의 자비를 찬미하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러할 때 교회는 살아 계신 하느님과 충실한 계약을 통하여 충만한 생명으로 초대받은 인간의 존엄을 찬미할 수 있다. “하느님의 영광은 온전히 살아 있는 인간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여 주는 상(像)이다.”99) 교회는 또한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는 진리의 힘에 대한 신뢰를 증언하게 되는 것이다(요한 8,32 참조). 교회의 “용서 요청을 그릇된 겸손의 표현이나, 자선과 교육과 성덕에서 분명 많은 공적을 쌓은 지난 2000년의 교회 역사를 부인하는 것으로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는 진리의 필연적인 요구에 응답하고 있다. 그것은 다양한 세대의 그리스도 제자들이 지녔던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인간적인 한계와 약점을 인정하는 것이다.”100) 진실을 인정하는 것은 화해와 평화의 밑거름이다. 왜냐하면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진리에 대한 사랑은 겸손의 정신으로 추구될 때 다양한 문화를 통하여 현대인들을 재결합할 수 있는 위대한 가치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101) 진리에 대한 책임 때문에 교회는 “자기 자녀들이 참회를 통하여 과거의 과오와 불충한 사례들, 꾸준하지 못한 자세와 구태의연한 행동에서부터 자신을 정화하도록 격려하지 않고는 새로운 천년기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다. 과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정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며……”102)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내일을 약속해 준다.

국제신학위원회


1. 「강생의 신비」, 11항.

2. 「강생의 신비」, 11항. 이전의 여러 진술들, 특히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Tertio Millennio Adveniente) 33항에서 교황은 과거 잘못에 대한 기억을 정화하고 개인과 시민 사회에 참회의 모범을 보여 줄 길을 교회에 제시하였다.

3.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 8항.

4. Extravagantes Communes, 제5권, IX, c. 1(A. Friedberg, Corpus Iuris Canonici, t. II, c. 1304) 참조.

5. 베네딕토 14세, 서한 Salutis Nostrae(1774.4.30.), §2 참조. 레오 12세는 서한 Quod Hoc Ineunte(1824.5.24., §2)에서 ‘속죄, 용서, 구원, 은총, 사면, 대사의 해’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6. 이것은 교황 클레멘스 6세가 1343년에 50년마다 희년을 지내도록 제정하면서 내린 대사의 정의에 관한 뜻이다. 클레멘스 6세는 교회의 희년에서 구약성서(레위 25장)의 ‘사면과 기쁨의 희년’이 ‘영적으로 완성되는 것을 보았다.

7. “우리 각자는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하여 (양심을) 성찰하되, 심판의 날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보다 더 엄격하게 자신을 성찰하여야 한다.”: Deutsche Reichstagsakten, 새 시리즈, III, 390-399면(Gotha, 1893).

18.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 7항.

19.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36항 참조.

10. 사목 헌장, 19항.

11.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Nostra Aetate), 4항.

12. 사목 헌장, 43항 참조.

13. 교회 헌장, 8항; 일치 교령, 6항 참조: “나그네 길에 있는 교회는 교회 자체로서나, 인간적이며 현세적인 제도로서나, 언제나 필요한 이 개혁을 끊임없이 계속하도록 그리스도께 부름 받았다.”

14. 비그리스도교 선언, 4항.

15. 일치 교령, 3항.

16. 바오로 6세, 교황 교서 Apostolorum Limina(1974.5.23.): Enchiridion Vaticanum 5, 305 참조.

17. 바오로 6세, 교황 권고 Paterna cum benevolentia(1974.12.8.): Enchiridion Vaticanum 5, 526-553 참조.

18.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Ut unum sint, 1995.5.25.), 88항: “이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한, 저의 선임자이신 바오로 6세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저 또한 용서를 청합니다.”

19. 예컨대, 교황은 모라비아 교도들에게 “역사에서 비가톨릭 신자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모든 가톨릭 신자를 대신하여 용서”를 청하였다(체코 공화국의 Jan Sarkander의 시성식〔1995.5.21.〕 참조). 교황은 또한 “라틴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노예로 끌려간 아프리카인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속죄의 행위”를 하고자 하였다(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보내는 담화〔산토도밍고, 1992.10.13.〕와 일반 알현 연설〔1992.10.21.〕 참조). 그보다 10년 전에 교황은 이미 아프리카인들이 받았던 취급에 대하여 그들에게 용서를 청하였다(야운데에서 한 연설, 1985.8.13. 참조).

20. 「제삼천년기」, 33-36항 참조.

21. 「제삼천년기」, 33항 참조.

22. 「제삼천년기」, 33항.

23. 「제삼천년기」, 36항 참조.

24. 「제삼천년기」, 34항 참조.

25. 「제삼천년기」, 35항 참조.

26. 이 마지막 측면은 「제삼천년기」 33항에만 나타난다. 33항에서,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 앞에서’ 자기 자녀들이 죄를 지었음을 인정한다.

27.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화해와 참회」(1984.12.2.), 31항 참조.

28. 「화해와 참회」, 16항 참조.

29. 마태 13,24-30.36-43; 성 아우구스티노, 「신국론」(De Civitate Dei), I, 35: CCL 47,33; XI, 1: CCL 48,321; XIX, 26: CCL 48,696 참조.

30. 성서를 읽는 다양한 방식에 관해서는, 교황청 성서위원회가 펴낸 「교회 안의 성서 해석」(Th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in the Church, 1993)을 보라.

31. 이러한 부류의 본문들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신명 1,41(약속된 땅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한 광야 세대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한다.); 판관 10,10.12(판관 시대의 백성은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 신들을 섬긴 데 대하여 두 번이나 “우리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부르짖는다.); 1사무 7,6(사무엘 시대의 백성도 “우리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고백한다.); 민수 21,7(이 구절은 모세 시대의 사람들이 음식에 대하여 불평하며 주님과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에게 대듦으로써 ‘죄’를 짓게 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1사무 12,19(사무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저지른 죄’도 모자라 왕을 세워 달라는 요구까지 하였음을 인정한다.); 에즈 10,13(사람들은 에즈라 앞에서 자신들이 ‘이 일〔외국 여자와 사는 일〕로 죄’를 크게 지었음을 인정한다.); 시편 64,2-3; 89,8; 102,10; (106,10-11.17); 이사 59,9-15; 64,5-9; 예레 8,14; 14,7; 애가 1,14.18ᄀ.22(여기에서 예루살렘은 1인칭으로 말한다.); 3,42(4,13); 바룩 4,12-13(시온은 자신을 멸망으로 이끈 그 자녀들의 죄에 대하여 말한다.); 에제 33,10; 미가 7,9(‘나’).18-19.

32.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출애 9,27(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다가 말한다. “내가 이제야 잘못을 깨달았다. 주님께서 옳으시고 나와 나의 백성이 나빴다.”); 34,9(모세는 “우리가 저지른 죄와 실수를 용서하시라고” 기도한다.); 레위 16,21(대사제는 속죄의 날에 ‘속죄 염소’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자기 백성이 저지른 온갖 죄악을 고백한다.); 출애 32,11-13(신명 9,26-29: 모세 참조); 32,31(모세); 1열왕 8,33 이하(2역대 6,22 이하: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이 저지를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한다.); 2역대 28,13(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미 죄가 많음’을 인정한다.); 에즈 10,2(스가니야는 에즈라에게 말한다. “우리가 우리 하느님을 배신하고 외국 여자를 얻어 살고 있습니다.”); 느헤 1,5-11(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 자신과 그의 가문이 지은 죄를 고백한다.); 에스 4,17 - (에스델은 고백한다. “우리는 당신에게 죄를 지었으므로 당신께서 우리를 원수들에게 넘기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였던 것입니다.”); 2마카 7,18-32(유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고생을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하느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33. 백성의 이러한 고백의 예들은 다음과 같다.: 2열왕 22,13(2역대 34,21 참조: 요시아는 “선조들이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주님의 말씀을 지켜 그대로 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주님의 진노가 내릴 것을 두려워한다.); 2역대 29,6-7(히즈키야는 말한다. “우리 선조들은 우리 주 하느님께 반역하였다.”); 시편 77,8 이하(시편 저자는 과거 출애굽 시절의 세대들이 저지른 죄를 이야기한다.); 또한 예레 31,29와 에제 18,2에 인용된 유명한 말씀도 참조: “아비가 신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큼해진다.”

34.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본문들이다.: 레위 26,40(유배자들은 “그들의 죄와 조상의 죄를 고백”하도록 요구받는다.); 에즈 9,5-15(에즈라의 참회의 기도: “일찍이 선조 때부터 이 날까지 우리가 저지른 허물이 너무 컸습니다”〔7절〕.; 느헤 9,6-37 참조.); 토비 3,1-5(토비트는 그의 기도에서 “주님, 내 죄를 벌하지 마시고, 나와 내 조상이 알지 못하고 주님께 저지른 죄를 벌하지 마소서.”〔3절〕 하고 말하며, 계속해서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5절〕 하고 말한다.); 시편 78,8-9(“조상들의 죄과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옵시고……저희를 구하시고, 죄를 용서하소서.”); 105,6(“저희는 조상들처럼 죄를 지었나이다.”); 예레 3,24(“우리가 선조 때부터 이 날까지……우리 주 하느님께 죄를 지었구나.”); 14,19-22(“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어떤 몹쓸 짓을 하였는지 잘 압니다”〔20절〕.); 애가 5,7-16(“죄 지은 선조들은 간데없는데, 그 벌은 우리가 떠맡게 되었습니다󰡓〔7절〕.; “스스로의 죄 때문에 우리는 망했습니다”〔16절〕.); 바룩 1,15─3,18(“우리는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1,17.19.21; 2,5.24 참조〕.; “우리 조상들의 그릇된 행실을 기억하지 마시고”〔3,5; 2,33; 3,4.7 참조〕); 다니 3,26-45(아자리야의 기도: “당신께서 우리에게 이런 징벌을 내리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고 우리는 당신의 징벌을 받아 마땅하옵니다”〔28절〕.); 9,4-19(“우리의 잘못과 조상들의 죄 탓으로 예루살렘이……욕을 당하고 있습니다”〔16절〕.).

35. 여기에는 하느님께 대한 불신(예를 들어, 신명 1,41; 민수 14,10), 우상 숭배(판관 10,10-15), 인간 왕에 대한 요구(1사무 12,9), 하느님의 법을 어기고 외국 여자와 혼인하는 것(에즈 9─10장) 등이 포함된다. 이사 59,13ᄂ에서 사람들은 ‘비꼬는 말, 반항하는 말만 하였고, 거짓말이나 토해 내는’ 죄를 지었다고 고백한다.

36. 에즈 9─10장에 나오는 것처럼 외국 여자들이 끼칠 모든 부정적인 영향 때문에 외국 여자를 아내로 맞지 못하게 하는 유사한 경우 참조. 그들(그들과 또는 그들의 후손)에 대한 용서 요청의 문제는 모든 장에서 외국 여자에 대한 거부를 하느님의 율법(신명 7,3 참조)의 요구로 제시하기 때문에 다루어지지 않는다.

37. 이 문맥에서, 이스라엘과 에돔의 영원한 긴장 관계가 머리에 떠오른다. 한 민족으로서 에돔인들은 이스라엘의 ‘형제’라는 사실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빌로니아인들의 예루살렘 정복에 가담하고 즐겼다(오바 1,10-14 참조). 이스라엘은 이러한 배신에 대한 분노에서, 2역대 25,12에 나오는 이야기대로, 아마지야 임금이 무방비 상태의 에돔 죄수들을 죽인 데 대하여 용서를 청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38. 요한 바오로 2세, 일반 알현 연설(1999.9.1.):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영어판, 1999년 9월 8일자, 7면.

39. 「제삼천년기」, 33-36항 참조.

40. 「제삼천년기」, 33항.

41. 다양한 역사적 시기의 그리스도인 저자들이 교회의 잘못에 대하여 교회를 비난한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증거자 성 막시모의 Liber Asceticus이다.: PL 90,912-956.

42. 교회 헌장, 8항.

43.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770항.

44. 교회 헌장, 8항.

45. 교회 헌장, 8항; 일치 교령, 3.6항 참조.

46. 「가톨릭 교회 교리서」, 827항.

47. 바오로 6세, Credo of the People of God(1968.6.30.), 19항: Enchiridion Vaticanum 3, 264 이하.

48. 교회 헌장, 39항.

49. 교회 헌장, 40항.

50. 교회 헌장, 48항.

51. 성 아우구스티노, 「설교집」(Sermo), 181, 5, 7: PL 38,982.

52.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III, q. 8, art. 3, ad 2.

53. 「가톨릭 교회 교리서」, 2839항.

54. 성 암브로시오, 「동정 생활」(De Virginitate), 8, 48: PL 16,278D: “Caveamus igitur, ne lapsus noster vulnus Ecclesiae fiat.” 교회 헌장 11항에서도 교회의 자녀들이 지은 죄로 교회가 입는 상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55. 「제삼천년기」, 33항.

56. Karl Delahaye, Eccelesia Mater chez les Pe`res des trois premiers sie`cles(파리, 1964), 128; Hugo Rahner, SJ, Mater Ecclesia: Lobpreis der Kirche aus dem ersten Jahrtausend christlicher Literatur(아인지델른, 1944) 참조.

57. 교회 헌장, 64항.

58. 성 아우구스티노, 「설교집」, 25, 8: PL 46,938: “Mater ista sancta, honorata, Mariae similis, et parit et Virgo est. Ex illa nati estis et Christum parit: nam membra Christi estis.”

59. 성 치프리아노, 「가톨릭 교회 일치」(De Ecclesiae Catholicae Unitate), 6: CCL 3,253: “Habere iam non potest Deum patrem qui ecclesiam non habet matrem.” 성 치프리아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Ut habere quis possit Deum Patrem, habeat ante ecclesiam matrem”(「서간집」〔Epistulae〕, 74, 7: CCL 3C,572).; 성 아우구스티노, “Tenete ergo, carissimi, tenete omnes unanimiter Deum patrem, et matrem Ecclesiam”(「시편 상해」〔Enarratio in Psalmos〕, 88; 「설교집」, 2,14: CCL 39,1244).

60. 놀라의 성 바울리노, Carmen 25, 171-172: CSEL 30,243: “Inde manet mater aeterni semine verbi/concipiens populos et pariter pariens.”

61. 「제삼천년기」, 35항.

62.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Ad Romanos, 서론: SC 10,124(Th. Ca- melot, 파리, 19582).

63. 「제삼천년기」, 33.34항.

64. 종교 재판 연구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 참석자들에게 한 연설, 대희년 중앙위원회 산하 역사-신학 위원회 후원(1998.10.31.), 4항.

65. 이하의 내용에 대해서는: Hans-Georg Gadamer, 「진실과 방법」(Wahrheit und Methode), 제2판(튀빙겐, 1965); 영어판, Truth and Method(런던: Sheed and Ward, 1975) 참조.

66. Bernard Lonergan, SJ, 「신학 방법」(Method in Theology, 런던, 1972), 155면.

67. 「제삼천년기」, 35항.

68. 요한 바오로 2세, 일반 알현 연설(1999.9.1.):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영어판, 1999년 9월 8일자, 7면.

69. 「제삼천년기」, 34-36항 참조.

70. 일치 교령, 1항.

71. 일치 교령, 13항; 「제삼천년기」 34항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그 끝이 다가오는 천 년의 도정에서, 교회의 일치는 제일천년기 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상처를 입었으며…….”

72. 일치 교령, 13항.

73. 위와 같음.

7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2차 회기 개막 연설(1964.9.29.): Enchiridion Vaticanum 1, (106), 176항 참조.

75.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사랑의 대화 자료, Tomas Agapes: Vatican-Phanar (1958-1970), (로마-이스탄불, 1971) 참조.

76. 일치 교령, 7항.

77. 위와 같음.

78. 「제삼천년기」, 35항.

79. 요한 바오로 2세, 일반 알현 연설(1999.9.1.):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영어판, 1999년 9월 8일자, 7면.

80. 「제삼천년기」, 35항. 인용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 1항.

81. 이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비그리스도교 선언에 자세하게 논의되어 있다.

82. 유다교위원회, 「우리는 기억한다: 쇼아 대학살에 대한 성찰」(We Remember: A Reflection on the Shoah, 로마, 1998.3.16.), I: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촉진평의회, Information Service, 97호, 19; 요한 바오로 2세, 로마 시나고그에서 한 연설(1986.4.13.): AAS 78(1986), 1120면 참조.

83. 이것은 유다교위원회의 최근 문서 「우리는 기억한다: 쇼아 대학살에 대한 성찰」 III의 판단이다.: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촉진평의회, Information Service, 97호, 19.

84. 「우리는 기억한다: 쇼아 대학살에 대한 성찰」, V, 22.

85. 「우리는 기억한다: 쇼아 대학살에 대한 성찰」, IV, 20.21.

86. 「우리는 기억한다: 쇼아 대학살에 대한 성찰」, IV, 21.

87. 「우리는 기억한다: 쇼아 대학살에 대한 성찰」, V, 22.

88. 「제삼천년기」, 36항.

89. 사목 헌장, 19항.

90. 사목 헌장, 19항.

91. 「제삼천년기」, 33항.

92. 순교의 표징만 생각하여도 된다. 「제삼천년기」, 37항 참조.

93. 일치 교령, 6항. 여기에는 이러한 말도 있다. “나그네 길에 있는 교회는 교회 자체로서나, 인간적이며 현세적인 제도로서나, 언제나 필요한 이 개혁을 계속하도록(ad hanc perennem reformationem) 그리스도께 부름 받았다.”

94. 일치 교령, 4항: “……opus renovationis nec non reformationis …….”

95. 일치 교령, 6항 참조: “교회의 모든 쇄신은 본질적으로 교회 소명에 대한 충실성의 증대에 있다.”

96. 「제삼천년기」, 36항.

97. 이렇게 매우 강한 표현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것이다. 「삼위일체론」(De Trinitate), I, 13,28: CCL 50,69,13; 「서간집」(Epistulae), 169,2: CSEL 44,617; 「설교집」, 341A, 1: Misc. Agost. 314, 22.

98. 요한 바오로 2세, 종교 재판 연구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 참석자들에게 한 연설(1998.10.31.), 5항.

199. 리옹의 성 이레네오, 「이단 반론」(Adversus Haereses), IV, 20,7: SC 100/2, 648: “Gloria Dei vivens homo: vita autem hominis visio Dei.”

100. 요한 바오로 2세, 일반 알현 연설(1999.9.1.):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영어판, 1999년 9월 8일자, 7면.

101. 유럽 핵 연구 기구 센터에서 한 연설(제네바, 1982.6.15.): Insegna-menti di Giovanni Paolo II, V, 2(바티칸, 1982), 2321면.

102. 「제삼천년기」, 33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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