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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pe of Salvation for Infants Who Die Without Being Baptised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구원에 대한 희망

 

차 례

서 론

1. 탐구의 역사(Historia Quaestionis)
가톨릭 가르침의 역사와 해석

1.1. 성경의 근거

1.2. 그리스 교부들

1.3. 라틴 교부들

1.4.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

1.5. 현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시대

1.6.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시기까지

1.7. 해석학적 문제들

2. 하느님 길의 탐구(Inquirere Vias Domini)
신학 원리들

2.1.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를 통하여 실현되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

2.2. 죄의 보편성과 구원의 보편적 필요

2.3. 교회의 필요성

2.4. 세례성사의 필요성

2.5. 보편적 구원에 대한 희망과 기도

3. 기도하는 희망(Spes Orans)
희망의 이유

3.1. 새로운 상황

3.2. 하느님의 자비로운 인간애

3.3. 그리스도와 이루는 연대

3.4. 교회와 성인들의 통공

3.5. 기도하는 대로 믿는다(Lex Orandi, Lex Credendi)

3.6. 희 망

국제신학위원회는 ‘진리의 위계’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에 관한 다른 신학 원리들, 그리스도 중개의 단일성과 탁월성, 구원 질서 안의 교회의 성사성, 그리고 원죄의 실체 등을 고려하며 세례 받지 않은 유아의 운명을 주제로 연구하였다. 문화 상대주의와 종교 다원주의의 현 상황에서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의 숫자가 심각한수준으로 늘어남에 따라, 이러한 유아들의 구원 가능성에 관한 성찰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구원이 오로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이며 교사인 교회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의 운명, 특히 인류 가족 가운데 가장 약하고 아직 이성과 자유를행사할 수 없는 이들의 운명에 대해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주제에 관한 전통적 가르침이 ‘림보’(limbo) 이론에 초점을 맞추어 온 것은 분명하다. 림보는 원죄가 있으나 세례를 받지 않고 죽어서 지복 직관을 할 자격은 없지만 개인적 죄를 짓지 않았기에 아무런 벌도 받지 않는 유아의 영혼이 있는 상태라고 이해된다. 중세부터 신학자들이 탐구해 온 이 이론은 교도권이 비록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까지 일반 가르침에서 때로 언급하였지만 단 한 번도 교의적으로 정의를 내린 적이 없다. 그래서 림보는 여전히 잠정적인 신학적 가설로 남아 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1992)에는 림보 이론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보다 교리서는 그러한 어린이들을 위한 특별한 장례 예식에서볼 수 있듯이,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는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 자비에 맡겨진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원리는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를 위한 구원의 길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일으키고(『가톨릭 교회 교리서』, 1261항), 또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 그리스도 중개의 단일성,구원을 위한 세례의 필요성, 성사와 연관된 은총의 보편적 작용, 원죄와 지복 직관 상실 사이의 연관성,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된 인간 등 가톨릭 신앙의 다양한 확신들 사이의 조화롭고 논리적인 연관성을 찾으려는 신학적 열망도 불러일으킨다.

이 연구는 분명한 관련 가르침이 계시에 나와 있지 않지만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가 구원받고 영원한 행복에 이르게 되리라는 희망에는 신학적 전례적 근거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독려한 이 문서에서 제기된 어떤 생각도 세례의 필요성을 부인하거나 성사 수여를 지연시키는 데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교회의 신앙으로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고 이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가시적으로 결합되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이를 할 수 없었기에 하느님께서 이들을 구원하시리라는 희망의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 문서의 방법론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 이 주제를 다루는 일은 신앙에 대한 지식의 역사적 발전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8항에 따르면, 이러한 발전에 기여한 요소들은 신자들의 성찰과 연구, 영적인 것의 체험, 교도권의 가르침이다.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문제가 그리스도교 사상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다루어졌을 때 사람들이 이 문제의 교리적 특성이나 함축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오직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신학의 역사적 발전에 비추어 볼 때에만 이 특별한 문제가 가톨릭 교리에서 적절한 자리를 찾을수 있는 것이다.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만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 11항에서 언급된 진리의 위계의 원리를 지킬 때에만 이 주제를 교회 신앙의 넓은 시각에서 정확하게 재검토할 수 있다. 이 문서는 실천적 사목적 관점과 더불어 사변 신학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관한 이해를 깊이 하는 데 유용하고 시의 적절한 수단을 마련해 주고 있다. 이는 교리적 문제일 뿐 아니라 현대의 사목적 우선 과제이기도 하다.

서 론

1.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라고 권고하였다(1베드 3,15-16 참조).1) 이 문서는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의 구원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희망을 다루고 있다. 이 문서는 그러한 희망이 최근 수십 년 동안 어떻게 발전해 왔으며 그 근거가무엇인지를 밝혀 그러한 희망을 설명하고자 한다. 비록 처음에는 이 주제가 신학적으로 사소한 문제로 보일 수 있으나 이를 명확히 설명하는 데는 깊고 복잡한 문제가 연관되어 있기에 오늘날 절박한 사목적 필요에서 그러한 설명이 요청되는 것이다.

2. 오늘날 세례를 받지 않고 죽는 유아들의 숫자가 크게 늘고 있다. 부분적으로 이는 문화 상대주의와 종교 다원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부모들 때문이지만, ‘체외 수정’(in vitro)과 낙태에도 일부 원인이 있다. 이러한 변화에 당면하여 그러한 유아들의 운명이 새롭게 시급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구원을 얻는 길이 더욱 복잡하고 불확실해 보인다. 구원을 향한 길의 충실한 안내자인 교회는 오직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어머니요 교사로서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모든 인류, 2) 특히 가장 약한 인간들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성과 양심과 자유를 부여받은 어른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의 여부에 따라 자신의 운명에 책임을 진다. 그러나 아직 이성과 양심과 자유를 발휘할 수 없는 유아는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들의 구원에 대한 도덕적 확신이 없을 때 커다란 슬픔과 죄의식을 느낀다. 그리고 개인적 죄를 짓지 않은 유아가 그리스도교 신자든 아니든 간에 영원한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공평하고 정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 자비의 위대함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희망의 신학과 친교의 교회론의 발전은 지나치게 제한적인 구원관에 이의를 제기한다. 사실 하느님의 보편구원 의지와 이에 상응하는 그리스도의 보편적 중개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전능 자체, 특히 하느님의 자비를 문제 삼는 모든 신학적 견해가 부적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3. 교회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의 운명을 지칭하여 수 세기 동안 사용해 온 림보의 개념은 비록 전통적 신학 가르침에서 오랫동안 활용되어 왔지만 계시에 확실한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유아가 지복 직관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교회의 일반 교리로 받아들여진 것이지만여러 가지 사목적 문제를 불러일으켜 왔다. 그래서 많은 영혼의 목자들이 구원의 길에 관한 좀 더 깊은 성찰을 요구해 온 것이다. 신학적 문제들을 재검토할 때 원죄의 비극적 결과를 무시할 수 없다. 원죄는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 상태를 의미하고, 그러한 상태에서 죽은 이들이 하느님을 뵐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4.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운명에 관한 성찰을 하면서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께서는 신학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이신 것이 더 옳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래서 신학의 첫째가는 임무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신학은 성경에 나온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이를 모든 사람에게 충실하게 전달하고자 한다.그러나 성경에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이들의 구원에 관한 내용이 거의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한 성경의 소극성을 해석할 때는 보편적 구원 계획과 구원의 길과 연관된 본문들에 비추어 해석하여야 한다. 한마디로 신학과 사목적 배려에 관련된 문제는 성경에 나온 다음의 두 가지 확언을 보존하면서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보편 구원 의지에 관한 확언(1티모 2,4 참조)과 죄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수단으로서 세례의 필요성에 관한 확언(마르 16,16; 마태 28,18-19 참조)이다.

5. 둘째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기도하는 대로 믿는다’(lex orandi, lex credendi)는 원칙과 연관하여 전례에 림보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사실 세례 받지 않았어도 “그리스도 때문에”3) 죽임을 당하였기에 순교자로 존경받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이 전례에 포함되어 있다.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를 위한 장례가 도입되면서 중요한 전례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단죄된 이들을 위하여 기도드리지 않는다. 『로마 미사 전례서』(Missale Romanum, 1970)는 당초 부모가 원했지만 [결국] 세례를 받지 못한 유아의 장례 미사를 도입하였다. 교회는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긴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1980년의 「어린이 세례에 관한 훈령」(Instructio de Baptismo Parvulorum)에서 “유아들이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는 경우 교회는 그들을 위한 장례식에서 보여 주듯이 그들을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밖에 없다.”4)고 하였다. 여기에 더해 『가톨릭 교회 교리서』(1992)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기를 원하시는’(1티모 2,4)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마르 10,14) 하신 예수님의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5)

6. 셋째로, 교회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지도록 격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도록 기도하고”6) 희망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게 되기를”7) 희망하며 기도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공동체적 본성에 대한 교회의 이해에 힘입은 연대성의 인간학을 바탕으로8) 교회는 신자들의 믿음이 주는 도움을 잘 알고 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여러 사람의 믿음이 다른 사람의 구원에 영향을 끼친 사례를 실제로 묘사하고 있다(마르 2,5 참조).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는 통상적인 방법이 ‘실제로’(in re) 받는 세례라는 것을 알지만 그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는 다른 방법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사람이 되셔서 모든 사람과 “당신을 어느 모로 결합시키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사실 모든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 소명”이므로, 교회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9) 믿는다.

7. 마지막으로,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구원에 관한 신학적 성찰을 할 때에 교회는 진리의 위계를 존중하기 때문에 아담과 죄에 앞서는 그리스도와 그분 은총의 수위권을 분명히 재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당신 삶과 당신 희생의 구원 능력을 통해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의 부성과 보편적 사랑을 보여 주셨다. 세례의 필요성은 ‘믿을 교리’(de fide)이지만 이러한 필요성을 재확인한 전승과 교도권의 문헌들을 해석할 필요는 있다.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가 세례의 필요성과 모순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아들이 구원의 은총으로 나아가는 데 아무런 개인적 장애를 일으키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개인적 죄를 짓지 않은 유아의 세례는 원죄를 씻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하나 되는 친교를 통하여(로마 6,1-7 참조)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다. 은총은 완전히 거저 받는 것이다. 은총은 언제나 하느님의순수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벌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이기에 받아 마땅한 것이다.10) 세례 받고 죽은 유아는 자신의 협력 없이도 그리스도의 은총과 교회의 전구로 구원받는다. 교회가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드린다면 비록 스스로 협력은 못하더라도 그들이 하느님을 뵐 수 없는 것인지에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다.

1. 탐구의 역사(Historia Quaestionis)
가톨릭 가르침의 역사와 해석

1.1. 성경의 근거

8. 올바른 신학 탐구는 모든 교회 가르침이나 관행에 대한 성경의 근거를 찾는 데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그래서 지금 논의하고 있는 주제에 관해서도 성경에서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지 탐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신약을 간단히 살펴보아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나 어린이가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당면하지 않았음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신약에서 세례의 관행을 언급할 때는 일반적으로 어른 세례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의 증거는 유아 세례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지는 않다. 사도행전 16장 15절과 33절(18,8 참조), 코린토 1서 1장 16절에서 세례가 있던 것으로 언급된 ‘집안’(οίκος)에서 어린이들도 어른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을 수 있다.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유는 신약의 내용이 주로 세상에 그리스도교를 처음 전파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9. 신약에 세례 받지 않은 아이들의 운명에 관하여 어떤 명확한 가르침도 나와 있지 않다고 해서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여러 근본적인 성경 교리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 교리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1)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신 것을 통해(에페 1,20-22; 필리 2,7-11; 로마 14,9; 1코린 15,20-28 참조)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바라신다(창세 3,15; 22,18; 1티모 2,3-6 참조).

(2) 인간 존재의 보편적 죄(창세 6,5-6; 8,21; 1열왕 8,46; 시편 130[129],3 참조)와 아담 때부터 인간이 죄 중에 태어난 것(시편 51[50],7; 집회 25,24 참조) 때문에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로마 5,12; 1코린 15,22 참조).

(3) 구원을 위하여, 한편으로는 신자들의 믿음(로마 1,16 참조)과 세례(마르 16,16; 마태 28,19; 사도 2,40-41; 16,30-33 참조)가 필요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거행하는 성찬례(요한 6,53 참조)가 필요하다.

(4)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인간의 희망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다(로마 4,18-21 참조). 그리스도인은 모든 인류의 구원자이신(1티모 4,10 참조)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모든 사람과 나누시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1테살 5,9-11; 로마 8,2-5.23-25 참조)을 희망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1베드 3,15 참조).

(5) 하느님의 창조적 권능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욥 42,2; 마르 10,27; 12,24.27; 루카 1,37)는 믿음과 모든 피조물이 궁극적으로 하느님 영광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을 바탕으로(로마 8,22-27 참조)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를”(1티모 2,1-8) 드려야 한다.

10. 방금 언급한 성경 교리들 가운데 두 가지가 서로 갈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곧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례성사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가 하느님께서 당신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펼치시는 데 제한을 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현재 다루고 있는 문제와 연관하여 전승의증인들(교부, 교도권, 신학자들)이 성경 본문과 교리를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했는지에 관한 해석학적 고찰이 필요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해를 피할 수 있도록 세례성사와 연관된 ‘필요성’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모든 인간의 궁극적 구원에서 세례성사의 필요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구원 활동의 절대적 필요성에 견주어 이차적인 것이다. 세례성사는 한 인간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유익한 효과를 얻는 통상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필요하다. 다음에서 우리는 전승이 성경의 증언을 활용한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 볼 것이다. 더 나아가 신학 원리들(제2장)과 우리가 희망을 가질 이유(제3장)를 다루면서 주제와 연관된 성경 교리와 내용에 대해 더 상세히 논의해 볼 것이다.

1.2. 그리스 교부들

11.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유아에 관하여 논의한 그리스 교부들은 매우 적다. 동방에서는 이에 관한 논란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교부들은 인간의 현세 조건에 관하여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 교부들은 인간이 아담의 죄의 결과로 타락, 고통, 죽음을 물려받았고,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으로 가능해진 성화 과정을 통하여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서양 전통에 흔한, 죄나 잘못을 물려받는다는 생각은 낯선 것이다. 이 교부들의 생각으로 죄는 오직 자유로운 개인적 행위이기 때문이다.11) 그래서 세례 받지 않은 어린이의 구원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그리스 교부들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교부들은 이런 유아들이 죽고 나서 머물 장소가 아니라 그들의 상태나 상황에 관하여는 논의하였다. 이와 연관하여 이 교부들이 당면한 주요 문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복음에서 가르치는 세례의 필요성 사이의 갈등이었다. 위(僞) 아타나시우스(Pseudo-Athanasios)는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또한 그는 세례 받지 않은 어린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지만, 죄를 짓지 않았기에 멸망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2) 시나이의 아나스타시우스는 이를 좀 더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아나스타시우스도 세례 받지 않은 어린이들이 ‘게헤나’(Gehena, 불구덩이)에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은 이야기하지 못하였다. 그는 어린이들이 어디로 가는지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고 이들의 운명을 하느님의 심판에 맡겼다.13)

12. 그리스 교부들 가운데 유일하게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죽은 유아의 운명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일찍 죽은 유아에 관한 소논문」(De Infantibus Praemature Abreptis Libellum)14)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가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들 속에 교회의 고뇌도 담겨 있다. 이러한 어린이들의 운명은 “인간의 정신이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15) 곧 신비이다. 그는 덕행과 그에 대한 보상과 연관하여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인간이 바라기만 한 것을 하느님께서 보상해 주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덕행을 실천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너무 일찍 떠난 사람이 바로 지복에 이르게 된다면 덕행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러한 생각의 연장 선상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문하였다. “선행도 악행도 하지 않고 어린 나이에 죽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런 사람이 보상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16) 그리고 다음과 같이 자답하였다. “인간이 바라는 지복은 본래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특정한 의미에서만 보상으로 불린다.”17) ‘참생명’(‘βιος’가 아닌 ‘ζωή’을 누리는 것은 인간 본성에 부합한다. 그리고 이는 덕행을 실천한 정도에 따라 누리게 된다. 무죄한 유아는 개인적 죄의 정화가 필요 없기에 자신의 자격에 따라 일종의 정해진 과정을 통해 자신의 본성에 맞는 이러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유아의 운명과 덕행의 삶을 산 어른의 운명을 구분한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유아의 죽음은 이들이 고통을 받게 된다거나, 현생에서 온갖 덕행을 통해 정화된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가정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18) 마지막으로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이러한 관점을 교회가 고찰해 보도록 한다. “사도적 관상이 우리의 연구를 강화시킨다. 당신 슬기로 모든 것을 바르게 이루시는 분께서는(시편 104[103],24 참조)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19)

13.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세례성사를 받지 않고 죽은 유아가 머무는 장소나 상태에 관하여 글을 쓴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이 주제를 확장시켜 다른 주제들과 함께 숙고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이러한 어린이들이 상해를 입히기보다는 오히려 상해를 입었기 때문에 정의로우신 심판관의 칭찬도 벌도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칭찬받을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칭찬을 받지 못할 사람이 벌을 받아 마땅한 것도 아니다.”20) 그리스 교부들의 심오한 가르침은 시나이의 아나스타시우스의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손으로 하느님의 심판을 시험하는 것은 옳지 않다.”21)

14. 한편으로 그리스 교부들은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아이들이 비록 세례 받은 사람들과 같은 상태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영원한 벌을 받지는 않는다고 가르쳤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 교부들은 이 어린이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와 어디로 가는지에 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하여 그리스 교부들은 그들 고유의 부정 신학적 감수성을 보여 주었다.

1.3. 라틴 교부들

15. 서양에서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의 운명이 지속적인 신학적 고찰의 주제가 된 것은 5세기 초 반펠라지우스주의 논쟁이 벌어진 때였다. 펠라지우스가 세례 받지 않은 유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주제를 문제 삼았다. 펠라지우스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참으로 모든 인간이 “한 사람[아담]을 통하여”(로마 5,12) 죄를 짓고 욕망과 고통과 죽음이 타락의 결과라고 가르쳤는지 의문을 제기하였다.22) 펠라지우스는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부인했기 때문에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펠라지우스는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가 비록 “하느님 나라”(요한 3,5)는 아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하느님께서 개인적으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을 지옥에 보내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23)

16.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펠라지우스의 주장에 맞서면서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가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는 주장에 이르게 된다.24)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님의 가르침, 요한 복음 3장 5절, 그리고 교회의 전례 관행 등을 근거로 들고 있다. 특히 죽을 위험에 놓인 어린이들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을 세례대 앞으로 데려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악마에게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어린이들에게 숨을 내뿜으며 악령을 내쫓는 구마식을 거행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25) 어린이들이 새로워질 필요가 없다면 다시 태어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전례 관행은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를 물려받았기에 어둠의 권세에서 빛의 나라로 옮아가야 한다(콜로 1,13 참조)는 교회의 믿음을 확인해 준다.26) 어린이에게든 어른에게든 단 하나의 세례가 있으며 이는 죄를 용서받기 위한 것이다.27) 어린 아이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이들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명백히 개인적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가지고 있던 라틴 말 성경의) 로마서 5장 12절에 따르면 “아담을 통해서” 죄를 지었다.28) “어린이들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왜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위해 돌아가셨겠는가?”29) 모든 사람은 그들을 구해 주실 분으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17.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판단에 따르면, 펠라지우스는 오직 한 분이신 중개자(1티모 2,5 참조) 예수 그리스도와,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얻어 주신 구원 은총의 필요성에 대한 믿음에 손상을 입혔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하러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위대한 의사’로서 유아까지도 아담에게 물려받은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세례라는 약을 주신다.30) 인간 세대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진 아담의 죄에 대한 유일한 치유제는 세례이다.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최후의 심판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마태 25,34 참조)은 지옥으로 들어가게 된다(마태 25,41 참조). 하늘과 지옥 사이에 ‘중간계’는 없다. “아기들이 있을 만한 중간 장소는 남아 있지 않다.”31)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악마와 함께 있어야 한다.”32)

18.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세례 받지 않은 어린이들이 지옥에 들어가게 하신다면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 유아들이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고 해도 “가장 경미한 징벌”(mitissima poena),33) “가장 가벼운 벌”34)을 받을 뿐이다. 죄인들의 죄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벌이 있기 때문이다.35) 이 유아들이 자기탓은 없으나 이들에 대한 단죄가 부당한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같은 무리’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정의를 펼치신다. 모든 사람은 지옥에 가야 마땅하기 때문이다.36) 왜 어떤 사람들은 진노의 그릇이 되고, 다른 사람들은 자비의 그릇이 되는가?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만족스럽고 바람직한 설명을 할 수 없음”을 시인한다. 그는 오직 바오로 사도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심판은 얼마나 헤아리기 힘들고, 하느님의 방식은 얼마나 찾아내기 어려운 것인가!”37)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느님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편 구원 의지를 제한적으로 해석하고 있다.38) 교회는 거저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 때문에 인간이 구원받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벌을 받는다면 이는 하느님께서 당연한 판단을 내리셨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 뜻의 정의를 다음 세상에서나 알게 될 것이다.39)

19. 418년 개최된 카르타고 공의회는 펠라지우스의 가르침을 배척하였다. 이 공의회는 유아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재생의 목욕을 통하여 속죄해야 하는 원죄의 어떤 흔적도 아담에게서 물려받지 않았다.”는 견해를 단죄하였다. 이 공의회는 “아직 스스로 어떤 죄도 지을 수 없는 어린이라도 죄의 용서를 위하여 참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거듭남을 통하여, 세대를 통해 물든 것에서 깨끗해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40)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추가로 “하늘 나라 곧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데 필수적인 세례를 받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난 어린이를 위한 중간 거처나 기쁘게 머물 장소가 있을 수 없다.”41)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운명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완고한 견해의 모든 측면을 명시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았다.

20. 그러나 서양에서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권위가 너무나 강력했으므로 라틴 교부들(예로니모, 풀젠시우스, 비엔나의 아비토, 대 그레고리오 등)은 실제로 그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대 그레고리오는 하느님께서 영혼에 원죄만 있는 이들도 심판하신다고 주장하였다. 자기 의지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유아도 분명히 ‘영원한 고통’에 빠진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진노의 자녀들”42)로 태어난 인간 조건에 관하여 욥기 14장 4절에서 5절(칠십인역), 요한 복음 3장 5절, 에페소서 2장 3절 등을 인용하였다.

1.4.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

21.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중세 라틴 신학자들에게 이 문제에 관한 준거점이 되었다.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는 원죄 때문에, 또한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벌을 받게 된다고 믿은 캔터베리의 안셀모가 좋은 예이다.43) 일반 교리는 생 빅토르의 후고(Hugh of St. Victor)가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 이유는 (1) 성사를 받지 않았다. (2) 성사를 대신할 수 있는 개인적 신앙 행위를 할 수 없다.44) 이 교리는 사람이 죽은 뒤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지상 생활에서 의화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죽음은 은총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선택, 말하자면 하느님을 따르든지 아니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든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에 종지부를 찍는다. 죽고 나면 하느님에 대한 개인의 근본적인 선택은 더 이상 바꿀 수 없게 된다.

22. 그러나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elard)부터 시작하여 대부분의 중세 후기 저자들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강조하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하는 ‘가장 가벼운 벌’을 ‘하느님을 뵐 수 없는’(carentia visionis Dei) 상태로 그러한 행복을 누릴 희망은 없지만 더 이상의 벌을 받지는 않는 것으로 해석하였다.45)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엄격한 견해를 수정한 이러한 가르침은 피에트로 롬바르도(Pietro Lombardo)가 널리 설파하였다. 곧 어린이는 하느님을 뵙지 못하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벌도 받지 않는 것이다.46) 이러한 입장은 하늘의 성인(聖人)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은 사람들에 비해서도 어느 정도 다른 운명을 세례 받지 않은 유아에게 부여하는 13세기 신학적 성찰을 이끌어 내게 되었다. 그렇지만 유아들은 여전히 이 버림받은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다. 중세 신학자들은 이러한 성찰이 있었어도 인간 삶의 결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셋이 아니라) 두 가지라고 주장하였다. 곧 성인(聖人)들은 천상 행복을 누리며, 단죄받은 사람들과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은 이러한 천상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세 교리의 발전 과정에서 ‘지복 직관을 할 수 없는 것’(poena damni)은 원죄에 대한 적절한 벌로 여겨졌다. 반면에 ‘영원한 지옥의 고통’은 실제로 저지른 대죄(죽을죄)에 대한 벌로 여겨졌다.47) 중세에 교도권은 ‘대죄를 짓고 죽은 사람들’과 ‘오직 원죄만 지니고 죽은 사람들’이각기 ‘다른 벌’을 받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확인하였다.48)

23. 이성을 사용할 나이가 안 된 어린이들은 실제로 죄를 짓지는 않았으므로 신학자들은 세례 받지 않은 이런 어린이들이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더 나아가 모든 자연적 선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 온전한 자연적 행복을 누린다는 공통된 견해에 이르렀다(토마스 데 아퀴노, 둔스 스코투스).49) 이 신학 이론이 기여한 바는 특히 세례성사를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이 참다운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을 인정한 데 있다. 어린이들은 자신의 상태에 알맞은 참다운 형태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자연 질서와 초자연 질서의 관계를 개념화하는 특정한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초자연적 질서로 나아가는 것을 개념화하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 나타난 ‘순수 자연’의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토마스 데 아퀴노는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는 인간 삶의 초자연적 목적이 성인들의 영광 안에, 곧 지복 직관을 통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이 초자연적 목적이 인간의 자연적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고 또한 세례 받지 않은 어린이들에게는 그러한 초자연적 인식의 씨앗을 받는 성사가 결여되어 있기에,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는 그들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알지 못하며 따라서 지복 직관을 하지 못하는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50) 신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지복 직관을 하지 못하는 것이 하느님의 경륜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고통(‘벌’)이라고 생각하였다. ‘자연 지복’(또한 아무런 고통이 없는 상태)에 관한 신학 교리는, 어떤 실제적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설명하여,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보다 더 하느님의 자비에 무게를 두려는 시도로 여겨진다.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의 자연적 행복에 관하여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는 신학자들은 구원의 무상성과 인간의 사유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하느님 뜻의 신비를 나타내는 것이다.

24. 세례 받지 않은 어린이들이 하느님을 뵙지 못한다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장을 더불어 한다. (1)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2)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또한 이 구원을 위하여 당신께서 몸소 세우셨으며 당신 계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신 선물과 수단을 바라신다. 두 번째 주장 자체가 (예를 들어 무죄한 어린이들의 증언에서 명백히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 경륜의 다른 측면을 배제하지 않는다. 12-13세기 무렵에 그러한 유아들이 ‘쉬는 곳’(더 나쁜 지역과의 ‘경계’)을 지칭하고자 ‘유아를 위한 림보’라는 표현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림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 문제에 관하여 논의할 수 있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과 ‘림보’라는 단어의 사용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25. 이러한 주장의 주요 내용은 은총에 동의하는 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없는 사람과 세례성사를 통해 다시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세대를 통하여 물려받은 원죄 때문에 하느님을 뵙지 못한다는 것이다.

1.5. 현대/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시대

26.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주장은 16세기에 부흥을 맞이하였다. 이와 더불어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에 관한 그의 이론은 예를 들어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다.51) 이렇게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이 부활한 결과의 하나가 바로 얀센주의이다. 아우구스티노 학파의 가톨릭 신학자들과 더불어 얀센주의자들은 림보 이론을 강력하게 반박하였다. 이 당시 교황들(바오로 3세, 베네딕토 14세, 클레멘스 13세)은52) 가톨릭 교회가 비록 대죄로 벌을 받은 어른들의 고통에 비해 ‘가장 가벼운 고통’(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표현)이지만 원죄만 지니고 죽은 유아들도 저주받아 지옥 불의 영원한 고통의 벌을 받을 것이라는 아우구스티노성인의 엄격한 관점을 가르칠 권한이 있다고 옹호하였다. 그런데 얀센주의자들의 피스토이아 교회회의(1786)가 ‘림보’에 관한 중세 시대의 이론을 부인했을 때, 비오 6세는 원죄만 지니고 죽은 사람들이 지복 직관은 못하지만(‘상실의 벌’) 감각적 고통(‘불’의 벌)을 느끼지는 못한다는 가르침을 가톨릭 학파들이 가르칠 권리를 옹호하였다. 비오 6세께서는 칙서 「신앙의 권위」(Auctorem Fidei, 1794)에서 얀센주의자들의 가르침을 “그릇되고 성급하며 가톨릭 학파에 손상을 입히는 것”으로 단죄하셨다. 이들의 가르침은 “마치 불의 심판을 벗어난 이들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심판 사이에 있는, 펠라지우스주의자들이 쉽게 이야기하는 죄와 벌이 없는중간 지역과 상태에 이르게 되기나 하듯, 원죄만 지니고 죽은 영혼들이 단죄만 받고 불의 심판을 받지 않는(신자들이 ‘어린이들의 림보’라고 부르는) 하계를 ‘펠라지우스의 우화’(fabula pelagiana)라고 배척한다”는 것이다.53) 이러한 교황의 개입은 가톨릭 학파들이 이 문제와 씨름할 수 있는 자유를 보호하였다. 이들은 림보 이론을믿을 교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중반까지 가톨릭의 일반 가르침에 속하는 것이었다.

1.6.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시기까지

27.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직전,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 직전에, 일각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정의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관심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때 마련된 (그러나 공의회 투표에 부쳐지지는 않은) ‘가톨릭 교리에 관한 교의 헌장’ 수정안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는 세례 받지 않고 죽은어린이들의 운명은 한편으로는 단죄받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옥 영혼들과 복된 이들 사이에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원죄만 지니고 죽은 이들은 하느님을 뵙는 행복을 영원히 누리지 못한다”(Etiam qui cum solo originali peccato mortem obeunt beata Dei visione in perpetuum carebunt).54)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신학자들은 이런 유아들도 그리스도의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하여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권한을 얻으려고 하였다.55)

2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 과정에서 일부 인사들은 공의회가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이 지복 직관을 할 수 없다는 일반 교리를 확인하고 이 문제를 마무리할 것을 바랐다. 공의회 중앙준비위원회는 전통 교리에 대한 반대 의견이 많다는 사실과 신자들의 ‘신앙 감각’(sensus fidelium)의 성장에 더욱 부합하는 해결책을 제시하여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였다. 이 주제에 관한 신학적 탐구가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다는 판단에서 이 문제는 공의회 안건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는 공의회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더 깊이 연구하여야 할 대상으로 남았다.56) 이는 신학자들의 논의의 대상이 되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문제들을 불러일으켰다. 이 문제들은 특히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의 지위, 성경에서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연 질서와 인간의 초자연적 소명의 연관성, 원죄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 어린이들을 위해 청원할 수 있는 세례성사를 ‘대체하는 것’ 등이다.

29. 구원받으려면 세례가 필요하다는 가톨릭 교회의 믿음은 1442년 피렌체 공의회의 ‘야곱파들을 위한 교령’에서 강력하게 표명되었다. “[어린이들을] 도울 방법은 세례성사 말고는 없다. 세례성사로 어린이들은 악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57) 이러한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사적 경륜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에 대한 매우 생생한 인식을 보여 준다. 교회는 어린이들이 확실히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수단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전통적으로 물의 세례(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성사적으로 합체되는 것)를 대신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인정해 왔다. 말하자면 피의 세례(血洗:순교로 그리스도를 증언함으로써 그리스도께 합체되는 것)와 원의의 세례(火洗: 세례성사에 대한 원의나 열망으로 그리스도께 합체되는 것)이다. 20세기 동안 일부 신학자들은 몇몇 오랜 신학적 논제들을 발전시켜 어린이들을 위하여 일종의 피의 세례(어린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고려하여)나 일종의 원의의 세례(의화를 위하여 세례에 대한 어린이들의 ‘무의식적인 원의’나 교회의 원의를 간청함으로써)를 인정할 것을 제안해 왔다.58) 그러나 일종의 원의의 세례나 피의 세례를 청하는 제안에는 몇 가지 어려움들이 따른다. 한편으로는, 세례를 바라는 어른의 행위를 어린이들에게 적용하기 어렵다. 어린이는 세례성사를 대신할 수 있는 온전히 자유롭고 책임있는 인격적 행위를 할 능력이 거의 없다. 그러한 온전히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위는 이성의 판단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인간이 ‘이성을 충분히 또는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나이’(aetas discretionis: 사리 분별의 나이)에 이르기 전에는 그러한 행위를 합당하게 할 수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교회가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을‘대신’하여 적절히 원의를 표명할 수 있을지 이해하기 어렵다. 세례성사의 경우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유아들에게 베푸는 세례성사는 이 성사의 고유한 본성에 힘입어 은총을 얻는다. 다시 말해, 바로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다시 태어나는 확실한 선물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비오 12세 교황께서는 세례성사의 중요성을 상기하시면서 1958년 ‘이탈리아 조산원들에게 하신 연설’에서 이렇게 설명하셨다. “구원을 위해서는 은총의 상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초자연적 행복인 지복 직관을 얻을 수 없다. 어른의 경우에는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만으로도 성화의 은총을 얻어 세례의 부족을 메울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나 신생아들에게는 이러한 길이 열려 있지 않다.”59) 이는 하느님 은총을 받아들일 유아들의 준비, 성사 외적 방식으로 그리스도께 동화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교회의 어머니다운 중재에 관한 새로운 신학 성찰을 이끌어 냈다.

30. 이와 연관하여 논의되는 여러 문제들 가운데 초자연적 질서의 무상성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다른 상황에서 다른 문제와 관련하여 비오 12세께서는 이 문제를 분명하게 제기하시어 교회가 이를 인식하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 지적 존재를 창조하시면서 이들이 지복 직관으로 나아가도록 정해 놓지 않으셨을 리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초자연적 질서의 무상성 개념을 변질시킨다고 설명하신 것이다.60) 하느님께서는 선하시고 의로우시지만 그렇다고 은총이 반드시 또는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뒤로 신학자들은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의 운명에 관한 성찰에서 은총의 절대 무상성 문제와 함께, 인간은 그리스도에게로, 또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얻어 주신 구원으로 나아가도록 정해져 있음을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31.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의 운명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응답하지는 않았지만 신학적 성찰을 이끄는 여러 갈래의 길을 열어 놓았다. 공의회는 모든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의지의 보편성을(1티모 2,4 참조) 여러 번 상기하였다.61) 모든 인류의 “궁극 목적도 단 하나 곧 하느님이시다. 좋으신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 계획이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비그리스도교 선언 1항; 참조: 교회 헌장 16항). 더욱 구체적인 맥락에서, ‘사목 헌장’은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존엄을 토대로 한 인간 생명의 개념을 제시하면서, “인간 존엄성의 빼어난 이유는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부름 받은 인간의 소명에 있다.”고 상기시키고, “인간은 이미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과 대화하도록 초대받는다.”(사목 헌장 19항)라고 밝힌다. 이 헌장은 또한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인간의 신비가 밝혀진다고 힘주어 선포한다. 나아가, 공의회가 다음과 같이 강조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또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소명이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사목 헌장 22항). 공의회가 이러한 가르침을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에게 명시적으로 적용하지는 않았지만, 이 구절들은 그들을 위한 희망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62)

1.7. 해석학적 문제들

32. 역사 연구는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의 운명에 관한 가톨릭 가르침이 어떻게 전개되고 발전되어 왔는지 보여 준다. 이 과정에는 항구하게 남아 있는 근본적인 교리 원칙들과, 이와 동등하지 않은 가치를 지니는 부차적인 요소들이 포함된다. 실제로, 계시는 세례 받지 않은 어린이들에 대한 하느님 계획을 직접 명시적인 방식으로 알려 주지는 않지만, 교회에 신앙의 원리들을 깨우쳐 주어 교회의 생각과 관행을 이끌게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가톨릭 가르침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해석해 보면 특히 교회 신앙에 속하는 세 가지 주요 확언이 세례 받지 않은 유아의 운명에 관한 문제의 핵심에 있음을 보여 준다. (1)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2) 이 구원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동참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곧, 성사든 다른 방식이든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통해서 얻어진다. 유아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총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 (3) 유아는 구원의 은총으로 원죄를 씻지 않고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33. 신학과 교도권 가르침의 역사를 살펴보면 특히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이해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어떠한 발전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과거(고대, 중세, 현대 초기)의 신학 전통, 특히 아우구스티노 전통은 흔히 현대 신학 양상에 견주어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에 대해 ‘제한적’인 개념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을 제시한다.63) 신학 연구에서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양적으로’ 보편적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러한 더욱 포괄적인 인식은 교도권의 차원에서 점진적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인식이 19세기 무렵에는 매우 뚜렷하게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비오 9세께서는 자기 탓 없이 가톨릭 신앙을 모르는 이들의 구원 가능성에 관하여 이렇게 밝히셨다. “덕이 높고 의로운 삶을 사는 이들은 하느님 빛과 은총의 도움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이의 정신과 영혼과 생각과 습관을 완전히 이해하시고 살피시며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나큰 선하심과 인내로, 자기 탓이 없는 이들이 영원한 고통의 벌을 받도록 두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64) 가톨릭 교리의 이러한 종합과 성숙은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이끌었다.

34. 교회 전통에서,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이 지복 직관을 누리지 못한다는 확언은 오랫동안 ‘일반 교리’였다. 이 일반 교리는 계시받은 원리들을 조화롭게 아우를 어떤 방법을 추구했지만 신앙 선언으로 확실성을 지니지는 못했으며, 확실성을 지니는 다른 확언들과는 달리 이 교리를 거부한다고 해도 거룩하게 계시된 교의나 교도권의 결정적 행위로 선포된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주제에 관하여 교회가 성찰해 온 역사를 연구해 보면 어떠한 구분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이 요약에서 우리는 먼저 신앙에 속하는 것과 신앙의 선언, 다음으로 일반 교리, 마지막으로 신학적 견해를 구분해 볼 것이다.

35. 가)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펠라지우스파의 이해는 가톨릭 신앙을 거스르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6. 나) 인노첸시오 3세 교황께서 공식화하신 “원죄에 대한 벌은 지복 직관의 상실”65)이라는 확언은 신앙에 속한다. 원죄는 그 자체로 지복 직관에 대한 장애가 된다. 원죄를 씻고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 하느님을 뵐 수 있으려면 은총이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일반 교리는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의 운명에대해서 이 확언을 적용했고, 이러한 유아들은 지복 직관을 누릴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가르침은 그 신앙 내용에서 볼 때, 세례성사를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이 은총을 받지 못하며 지복 직관을 잃어버리는 단죄를 받는다는 뜻을 반드시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구원받기를 바라시고 그들이 원죄에서 정화될 수 있도록 자비로운 치유책을 베푸시며 지복 직관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다고 희망하게 된다.

37. 다) 중세의 교도권 문서들에서 실질적인 대죄(죽을죄)의 상태에서 죽은 이들이나 원죄만 지니고 죽은 이들에 대한 ‘상이한 벌’의 언급(“대죄의 상태에서 죽거나 원죄만 지니고 죽은 영혼들의 경우 이들은 곧바로 지옥에 가지만 상이한 벌을 받는다.”)66)은 그 시대의 일반 가르침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확언들이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에게 확실히 적용되어, 이 유아들도 원죄에 대한 벌을 받는다는 결론을 내려 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교회 선언의 초점은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곧바로 개별 심판이 따르며 영혼들은 천국 또는 지옥으로 보내진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러한 교도권의 선언들 때문에, 그러한 유아들은 원죄를 지닌 채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구원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38. 라) 비오 6세 교황의 칙서 「신앙의 권위」(Auctorem Fidei)는 림보의 존재에 관한 교의적 정의가 아니다. 이 교황 칙서는 다만, 스콜라 신학자들이 가르치는 ‘림보’가 고대 펠라지우스파에서 말하는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에게 보장된 ‘영원한 생명’과 동일하다는 얀센주의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는 선에서 그친다. 비오 6세께서는얀센주의자들이 림보를 부인하기 때문에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림보의 옹호자들은 펠라지우스 이단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단죄하신 것이다. 사도좌는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의 운명 문제에 관하여 서로 다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가톨릭 학파들의 자유를 지지함으로써, 이 일반 가르침을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받아들일 수 있는 합당한 선택으로 옹호하였다.

39. 마) 비오 12세 교황께서 ‘이탈리아 조산원들에게 하신 연설’67)은 세례 말고는 “아직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어린이에게 [초자연적] 생명을 전해 줄 다른 수단이 없다.”고 진술하시면서, 지복 직관에 이르려면 은총이 필요하고 그러한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 세례가 필요하다는 교회의 신앙을 표현하셨다.68) 어린이는(어른과 달리)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행동할 수 없다는, 곧 ‘세례를 대신’할 수 있는 이성과 자유의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설명은 현재의 신학 이론 내용에 관한 선언이 아니며 다른 구원 방법에 대한 신학 연구를 막지도 않는다. 그보다 비오 12세는 그러한 논쟁의 범위를 일깨우고, 죽을 위험에 놓인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하는도덕적 의무를 확실하게 재확인하였다.

40.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은 지복 직관을 상실한다는 확언은 오랫동안 교회의 일반 교리였으며, 따라서 교회의 신앙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다른 어떤 고통도 없이 지복 직관의 상실이 유일한 벌이라는 이론은 서구에서 오랫동안 수용되어 왔지만 신학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때때로 이러한 유아들이 누린다고 하는 ‘자연적 행복’에 대한 개별 신학 이론도 마찬가지의 신학적 견해로 볼 수 있다.

41. 그러므로 (여전히 가능한 신학적 견해인) 림보 이론 이외에,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창조와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어야 할 소명,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 원죄의 전달과 결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느님을 뵙는 데 요구되는 은총의 필요성,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개의 유일성과 보편성, 구원을 위한 세례의 필요성 등 성경을 토대로 하는 신앙의 원리들을 통합하고 보호할 다른 방법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다른 방법들은 신앙의 원리들을 수정하거나 가설들을 발전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그리스도 안의 연대(사목 헌장 22항 참조)에 더욱 무게를 실어 줌으로써,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도 지복 직관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설명하여, 교도권의 지도 아래 신앙의 원리들을 통합하고 잘 조화를 이루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직 덜 알려진 것은 더욱 잘 알려진 것을 통하여 연구하여야 한다는 방법론적 원리에 따라, 이 어린이들의 운명을 고려할 때에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 그리스도의 중개, 성령의 선물, 그리고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의 행위를 통하여 구원받은 어린이들의 처지에 대한 고려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의 운명은 신학 연구에서 특별한 문제로 남아 있으므로, 신학자들은 그리스 교부들의 부정 신학적 전망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하느님 길의 탐구(Inquirere Vias Domini)
신학 원리들

42. 현재 다루고 있는 주제는 성경과 성전에 드러난 계시에서 직접 명시적인 대답을 이끌어 낼 수 없는 문제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는 신앙 유산의 수호자인 교회, 특히 교도권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 밝혀 놓은 기본 신학 원리들에 의존하여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확언하듯이, “가톨릭 교회의 여러 진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와 이루는 관계는 서로 다르므로, 교리를 비교할 때에는 진리의 서열 또는 ‘위계’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일치 교령 11항). 어떤 인간도 자신을 궁극적으로 구원할 수 없다. 구원은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에게서만 온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 구원 행위의 ‘절대적 필요성’에관한) 이러한 근본적 진리는 교회의 중재와 성사 직무를 통하여 역사 안에서 전개된다. 여기서 우리가 적용할 ‘논의 순서’(ordo tractandi)는 ‘구원 순서’(ordo salutis)를 따른다. 단, 삼위일체적 차원과 교회-성사적 차원 사이에 인간학적 차원을 넣기로 한다.

2.1.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를 통하여 실현되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

43.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의 운명에 관한 논의에서 근본적이고 중심적인 원리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의 신비이다. 이 깊은 신비는 보편적인 동시에 우선적인 사랑으로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의 역설 안에 반영된다.

44. 구약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로 불리신다(탈출 6,6; 신명 7,8; 13,5; 32,15; 33,29; 이사 41,14; 43,14; 44,24; 시편 78〔77〕편; 1마카 4,30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을 향한 그분의 우선적 사랑은, 보편적 차원을 지니어 개개인(2사무 22,18.44.49; 시편 25[24],5; 27[26],1 참조)과 모든 인류에게까지 확대된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지혜 11,24). 다른 민족들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구원을 찾을 것이다(이사 2,1-4; 42,1; 60,1-14 참조).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6).

45. 이렇듯 우선적이면서 보편적인 하느님 사랑은 모든 이, 그러나 특별히 ‘작은 이들’처럼 보잘것없고 ‘자신을 낮추는’(τaπειvoσει) 이들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사도 4,12 참조)를 통하여 유일하고 모범적인 방식으로 통합되고 실현된다. 실제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마태 11,29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맺는 신비로운 애정과 연대를 강조하신다(마태 18,3-5; 10,40-42; 25,40.45 참조).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을 돌보는 일은 하느님의 천사들에게 맡겨져 있다고 확언하신다(마태 18,10 참조).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그분 뜻의 이러한 신비는 성부의 선의에 따라69) 성자를 통하여 드러나며70) 성령의 선물로 베풀어진다.71)

46.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보편적인 중개를 통하여 실현되는 하느님 아버지의 보편적 구원 의지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강력하게 표현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θελει).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제때에 드러난 증거입니다”(1티모 2,3-6). “모든”(4절과 6절)을 강조하고, 하느님과 또 몸소 인간이 되신 그분 중개자의 유일하심을 토대로 이러한 보편성을 정당화한 것은 이 구원 의지에서 아무도 제외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기도의 목적이 되는 한(1티모 2,1 참조), 이 구원 ‘의지’(θελεμa)는 하느님의 진심 어린 의지를 가리키지만 인간이 때로 이를 마다한다.72)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아버지의 ‘뜻’(θελεμa)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기도하여야 한다(마태 6,10 참조).

47. “모든 성도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에페 3,8-9 참조) 바오로에게 계시된 이러한 뜻의 신비는, 당신 외아들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이”(로마 8,29)가 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맏이 ……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콜로 1,15.18)가 되게 하시려는 아버지의 계획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계시는 성자의 중개가 모든 분열을 극복하는(사목 헌장 13항 참조)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을 띠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인류의 보편성과 관련하여, 성자의 중개는 (1) 다양한 문화, 사회, 성의 구분을 넘어선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 종도 자유인도 ……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갈라 3,28). 또한 (2)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죄(로마 7장 참조)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죄(에페 2,14 참조)로 야기되는 분열을 넘어선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9). 우주의 분열에 관하여 바오로는,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든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19-20)라고 설명한다.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는 이 두 차원이 하나로 결합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에페 1,7-10).

48.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로마 8,24) 받았기에, 확실히 우리는 이 구원의 신비가 완성된 것을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성령께서는 이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입증하시며,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희망하고 이를 위해 기도하도록 격려해 주신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2-23.26). 그러므로 성령의 탄식은 우리의 기도를 도와줄 뿐 아니라, 말하자면 모든 어른과 어린이와 피조물 전체의 고통을 끌어안는 것이다.73)

49. 키에르시 공의회(853)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비록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1티모 2,4). 일부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구세주의 선물이지만, 다른 이들이 멸망한다는 사실은 멸망하는 이들의 잘못이다.”74)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모든 이의 보편적 연대에 관한 이러한 선언이 함축하는 긍정적인 의미를 밝히면서, 공의회는 또한 이렇게 단언한다. “그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본성이 취해지지 않은 사람은 없고, 전에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비록 모든 사람이 [실제로] 그분의 수난으로 구원받지는 않는다 해도 그분의 수난 공로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고, 전에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75)

50.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확신에 대한 표현은 가톨릭 전승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레네오 성인은,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데 모으기”(에페 1,10)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며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한다고 강조하는 바오로의 글을 인용한다.76)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도 바오로의 글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죽음을 통하여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으므로 하느님과 인간의 완벽한 중개자이시다.”77)

5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은 바오로의 성경 구절을 온전히 인용할 뿐만 아니라(교회 헌장 60항; 선교 교령 7항 참조) 참조로 언급하기도 하며(교회 헌장 49항 참조), 나아가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Unicus Mediator Christus: 교회 헌장 8.14.62항)라는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한다. 그리스도론적 신앙의 이러한 핵심적 확언은 공의회 이후 교황들의 가르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0.12). 이 발언은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기때문입니다.”78)

52.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은 가톨릭의 확신과 태도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한 분이시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가 하느님 아드님의 강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표명되었으며 유일하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가톨릭 신앙의 진리로 굳게 믿어야 한다.”79)

2.2. 죄의 보편성과 구원의 보편적 필요

53. 교회와 맺는 신비로운 관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는 모든 인간을 향한 것이며, 교회의 신앙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구원받아야 하는 죄인이다. 인간 죄의 보편적 본성은 이미 구약의 거의 모든 책에서 언급되고 있다. 창세기는 죄가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단언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보시니 모든 것이 참 좋았기 때문이다(창세 1,31 참조). 인류가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헤아리셔야 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심지어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기”까지 하셨다(창세 6,5-7 참조). 그러나 죄로 기우는 인간의 경향은 홍수로도 바꿀 수가 없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창세 8,21). 구약 저자들은 죄가 인간에게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인간에게 널리 퍼져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잠언 20,9;코헬 7,20.29 참조). 그래서 시편에서처럼 하느님께 면죄를 자주 간청하는 것이다. “당신의 종과 함께 법정으로 들지 마소서. 산 이는 누구도 당신 앞에서 의로울 수 없습니다”(시편 143[142],2). 이는 솔로몬의 기도에서도 드러난다. “죄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백성도 당신께 죄를 지으면, …… 그들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회개하고, ……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청을 들으시고 …… 당신께 죄를 지은 당신 백성을 용서하여 주십시오”(1열왕 8,46 이하).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지닌 것에 대해서 말하는 본문들도 있다. 시편 저자는 말한다. “정녕 저는 죄 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머니가 저를 배었습니다”(시편 51[50],7). “사람이 무엇이기에 결백할 수 있으며,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다 하리오?”(욥 15,14. 25,4 참조)라는 엘리파즈의 말은 욥 자신의 확신(욥 14,1.4 참조)이나 다른 성경 저자들의 확신(시편 58[57],3; 이사 48,8 참조)과도 일치한다. 지혜 문학에는 원조들인 아담과 하와의 죄가 인류 전체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성찰이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지혜 2,24). “죄는 여자에게서 시작되고, 여자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는다”(집회 25,24).80)

54.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구원의 보편성을 죄의 보편성에 대응시킨다. 바오로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로마 3,9)81)고 하며 아무도 이 보편적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는 물론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토대로 말한 것이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10-12; 코헬 7,20과 시편 14[13],1-3; 53[52],1-3 인용). 한편으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 새 아담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되어야 한다.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이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죄의 상태에 있는 인류는 첫 인간 아담의 죄와 연결되어 있다. 첫 인간 아담과 맺은 이러한 연대는 바오로의 글 두 군데에서 언급된다. 코린토 1서 15장 21절과, 특히 로마서 5장 12절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그리스어 ‘εφ ώ’: ‘지은 것을 토대로’, ‘지은 결과로’로 번역될 수도 있다.)82)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 파격 구문에서, ‘εφ ώ’를 어떻게 이해하든, 인간의 죄와 죽을 운명은 아담의 탓으로 돌아간다. 아담이 지은 죄의 보편적 인과성은 로마서 5장 15절ㄱ, 16절ㄱ, 17절ㄱ, 18절ㄱ에 들어 있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라고 한 19절ㄱ에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바오로는 아담의 죄가 어떻게 전달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담이 인류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 펠라지우스에 맞서, 아우구스티노는 아담의 죄가 번식 또는 유전으로 전달된다고 반박하여 ‘원죄’ 교리를 고전적으로 표현하였다.83) 아우구스티노의 영향 아래, 서방 교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로마서 5장 12절을 유전적 ‘죄’의 의미로 해석하였다.84)

55. 이어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제5회기(1546)에서 이렇게 규정하였다. “아담의 죄가 아담에게만 해를 미쳤고 그 후손들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며, 그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거룩함과 의로움을 잃어버린 것은 그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우리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거나, 불순종의 죄로 얼룩진 아담이 모든 인류에게육신의 죽음과 고통만 전달했을 뿐 영혼의 죽음인 죄는 전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는 모두 ‘단죄된다’(anathema sit).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라는 사도의 말에 반대되기 때문이다.”85)

56.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죄 교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이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손상되면 원죄의 계시 역시 올바로 접근할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86)

2.3. 교회의 필요성

57. 가톨릭 전승은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을 역사적으로 중재하는 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꾸준히 확인해 왔다. 이러한 확신은 “교회 밖에 구원 없다.”(Salus extra Ecclesiam non est.)87)라는 치프리아노 성인의 말로 전통적으로 표현되어 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신앙의 확신을 강조하였다. “공의회는 성경과 성전에 의지하여 이 순례하는 교회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개자요 구원의 길이시며,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신앙과 세례의 필요성을 분명한 말씀으로 강조하시면서(마르 16,16; 요한 3,5 참조), 동시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하셨다. 사람들은 마치 문과 같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로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교회 헌장 14항). 공의회는 교회의 신비를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이다”(교회 헌장 1항).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부름 받고 있다”(교회 헌장8항). “그리스도께서는 땅에서 높이 들려지시어 모든 사람을 당신께 이끌어 들이셨고(요한 12,32 참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로마 6,9 참조) 생명을 주시는 당신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 주시고 성령을 통하여 당신 몸인 교회를 구원의 보편 성사로 세우셨다”(교회 헌장 48항). 이러한 인용문에서 두드러진 것은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 “[모든] 사람들의 구원”, “구원의 보편 성사” 등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서 교회가 보편적 중개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58. 새로운 문제들과 상황, 그리고 “교회 밖에 구원 없다.”라는 명제의 배타적 해석에 직면하여,88) 교도권은 최근 들어 구원을 위하여 교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식에 관하여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설명하였다. 비오 9세 교황께서는 연설 「유일한 것」(Singulari Quadam, 1854)에서 이와 연관된 문제들을 분명하게 설명하신다. “물론, 사도의 로마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으며, 교회만이 구원의 유일한 방주이고, 교회에 들어오지 않는 모든 사람은 홍수로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신앙의 내용으로 주장하여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는 어쩔 수 없는 무지 때문에 참된 종교를 모른 채 살아가는 이를 죄인으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도 확실히 주장하여야 한다.”89)

59. ‘교황청 성무성성에서 보스턴 대교구장에게 보낸 편지’(1949)는 더욱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 개인이 언제나 교회의 구성원으로 ‘실제로’(reapse) 통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원의나 바람’(voto et desiderio)으로는 교회에 소속되어야 한다. 이러한 원의가 예비 신자의 경우처럼 언제나명시적일 필요는 없다. 어쩔 수 없이 무지한 경우, 이른바 명시적이지 않은 원의도 자신의 뜻이 하느님 뜻에 일치하기를 바라는 영혼의 좋은 지향 안에 담겨져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원의도 받아들이신다.”90)

60.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에는 구원의 보편적 성사인 교회가 포함되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하느님 백성의 이 보편적 일치는 세계 평화를 예시하고 증진하므로 모든 사람이 이 일치로 부름 받고 있다. 가톨릭 신자이든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신자이든 모든 사람이 다 여러 모로 이 일치에 소속되거나 관련되어 있다.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부른다”(교회 헌장 13항).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보편적인 중개가 교회와 맺는 관계의 맥락 안에서 실현된다는 것은 공의회 이후 교황의 가르침에서도 더욱 강조되었다.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은 복음의 계시를 알거나 받아들일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러한 사람들도 “은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 이 은총은 교회와 신비로운 관계를 이룬다.”91)고 말한다.

2.4. 세례성사의 필요성

61.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인간이 성령으로 그리스도께 일치되기를 바라시며, 성령께서는 당신 은총으로 이들을 변화시키고 힘을 주신다.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이러한 일치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세례성사로 인간은 그리스도께 동화되고 성령을 받으며 죄에서 해방되고 교회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62. 신약에서 세례에 관한 여러 다양한 진술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해한 세례의 여러 차원의 의미를 설명한다. 먼저 세례는 죄의 용서, 죄 씻음(에페 5,26 참조) 또는 악에 물든 양심을 깨끗이 씻어 내는 물을 뿌림(히브 10,22; 1베드 3,21 참조)을 의미한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참조: 22,16). 이렇게 세례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동화된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63. 뿐만 아니라, 세례와 관련된 성령의 활동도 여러 번 언급된다(티토 3,5 참조). 세례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교회의 믿음이다(1코린 6,11; 티토 3,5 참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영을 통하여 활동하시며, 그 영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로마 8,14 참조)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신다(갈라 4,6 참조).

64. 마지막으로, 세례와 관련하여 하느님 백성이 ‘늘어나는’ 것,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는 것에 관한 진술들이 있다(사도 2,41 참조). 세례의 결과로 인간은 하느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오로는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는 것”(1코린 12,13)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루카는 세례를 통하여교회 구성원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사도 2,41 참조). 세례를 통하여 믿는 이는 개인을 넘어 하느님 백성에 속하게 된다. 베드로 사도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 2,9)이라고 말한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65. 세례성사를 베푸는 전통은 유아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신약의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리스도교 세례에 관한 증언들 가운데 “온 가족이 세례”(사도 16,15; 16,33; 18,8 참조) 받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에는 어린이들도 포함되었을 수 있다.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고대의 관행은92) 교부들과 교도권이 승인한 것으로, 가톨릭 교회의 신앙 이해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여진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이렇게 확인한다. “사도 전승에 따라, 아직 어떤 죄도 짓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도 그들이 새로 남을 통해 태어나면서 전해 받은 것에서 깨끗해질 수 있도록 실제로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준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요한 3,5) 때문이다.”93)

66. 우리는 세례성사의 필요성을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으로 선포하고 고백한다. 마태오 복음 28장 19절 이하와 마르코 복음 16장 15절에 나오는 명령과 요한 복음 3장 5절에 제시된 당부에 기초하여,94)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초기 시대부터 구원을 위한 세례의 필요성을 믿어 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당신 자신에게 결합시키시고자 세우신 통상적인 방식으로서 세례성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구원을 위한 세례성사의 ‘절대적 필요성’을 가르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데에는 다른 방식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피의 세례’인 순교를 세례성사를 대치하는것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원의의 세례도 인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토마스 데 아퀴노는 다음과 같은 적절한 말을 하였다. “세례성사를 받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실제로 또 원의로 세례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세례 받지도 않았고 세례 받고자 하는 바람도 없는 이들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 두번째는, 원의는 아니지만 실제로 세례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 그러한 사람은 세례를 향한 원의 때문에 실제로 세례를 받지는 않았어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95) 트리엔트 공의회는 세례성사를 실제로 받지 않았어도 의화될 수 있는 방식으로 ‘원의의 세례’를 인정하였다. “복음 선포 이후,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되는] 이러한변화는 재생의 목욕이나 이를 바라는 원의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96)

67. 구원을 위해 세례성사가 필요하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확언을 단순히 이론으로 돌려 그 근본 의미를 축소하여서는 안 된다. 또한,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구원 수단을 마련해 주신다는 사실도 존중하여야 한다. 따라서 원의의 세례와 피의 세례를 세례성사와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모든 시도를 삼가야 한다. 이는 인류를위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의 실현 안에서 창조적으로 표현되는 서로 다른 모습일 뿐, 그 안에 진정한 구원 가능성과 하느님께서 인간과 자유롭게 나누시는 구원의 대화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바로 이 역동성을 통해 구원의 보편적 성사인 교회는 모든 이를 회개와 믿음과 세례성사로 불러 모은다. 이 은총의 대화는 인간이 자기 삶으로 구체적인 응답을 할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 어린이의 경우는 다르므로, 부모와 대부모가 세례 받는 유아들을 대신하여 응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2.5. 보편적 구원에 대한 희망과 기도

68. 그리스도인들은 희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이들의 구원자이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1티모 4,10) 희망을 둔다. 또한 세례 받지 않은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게 되기를(1테살 5,9-11; 로마 8,2-5.23-35 참조) 간절히 바란다. 이는 “우리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본받아 이를 열망하여야 합니다.”97)고 한 테오필락투스의 권고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인간의 온갖 희망을 뛰어넘어 “희망이 없어도 희망”(로마 4,18)하는 것이다. 그 본보기는 우리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을 확고히 믿었다. 그는 모든 인간적인 증거나 역경에도(‘희망이 없어도’) 하느님을 믿었다(‘하느님께 희망을 두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례 받지 않은 아이들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하시는 자비로 이 아이들을 그러안아 주시기를 희망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1베드 3,15 참조). 자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거나 태어난 다음 세례 받지 못하고 죽어서 슬퍼하는 부모를 마주쳤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에 대한 자신의 희망이 그러한 유아나 어린이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98)

69.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1티모 2,1)고 한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마음에 새긴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고”(1티모 2,4) 당신 창조 권능에 따라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욥 42,2; 마르 10,27; 12,24-27; 루카 1,37) 하느님께서는 이 보편적인 기도를 들어주신다. 이 기도는 모든 피조물이 결국 하느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바탕으로 한다(로마 8,22-27 참조). 그러한 기도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다음과 같은 권고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본받으십시오. 하느님께서 모든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도 모든 이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99)

3. 기도하는 희망(Spes Orans)
희망의 이유

3.1. 새로운 상황

70.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운명에 대한 그리스도교 성찰의 역사와100) 이 문제에 대한 신학 원리들을101) 각각 살펴본 앞의 두 장은 빛과 그림자를 제시하였다. 한편으로는, 여러 모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본 원리들이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에 따라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의 구원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 신학 체계의 또 다른 진리들을 수호하고 이를 저해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심지어 이러한 유아들의 구원 가능성을 분명히 거부해 온 오랜 교리 전통이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그 신학적 가치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인도 아래 세대를 거듭하며 계속되고 있는 구원 신비에 대한 교회의 성찰에는 근본적인 지속성이 있다. 그 신비 속에서,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는 “신학 체계 안에서 가장 설명하기 힘든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102) 이는 특히 구원을 위한 세례의 필요성이나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같은 중요한 신앙 교리들이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쉬운 ‘특별한 문제’이다. 과거에 이 어려운 문제를 탐구해 온 이들의 예지와 충실성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교도권이 특별하게 또 어쩌면 섭리에 따라 판단하여 교리사의 중요한 순간마다103) 이러한 유아들에게 지복 직관이 없다고 규정하지 않고 이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두었다는 사실을 각별히 인식하면서, 우리는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의 이 순간에 이 예외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새롭게 성찰하도록 교회를 이끄시는지 숙고해 보았다(계시 헌장 8항 참조).

71.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시대의 징표를 읽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사목 헌장 4.11항 참조) “계시 진리가 언제나 더 깊이 받아들여지고 더 잘 이해되고 더욱 적절히 제시될 수 있도록”(사목 헌장 44항) 하라고 요구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고통 받으시고 돌아가셨으며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맺어 주신 세상과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게는 언제나 주님과 그분 사랑과 또 실제로 교회 자신에 대하여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 자신에게 맡겨진 구원 메시지를 더 깊이 받아들이는 계기가 된다. 현대의 여러 표징들이 특히 지금 숙고하고 있는 문제와 관련하여 복음에 나타난 여러 측면들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느 모로는, 21세기를 시작하며 이 문제를 숙고하는 데에 그러한 표징들이 새로운 상황을 마련해 준다.

72. 가) 20세기의 전쟁과 혼돈, 그리고 국제 연합, 유럽 연합, 아프리카 연합과 같은 기구의 설립으로 나타난 평화와 일치를 향한 인류의 염원 덕분에, 교회는 복음 메시지 안에 담긴 친교의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친교의 교회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교회 헌장 4.9항; 일치 교령 2항; 사목 헌장 12.24항 참조).

73. 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절망의 유혹에 맞서 싸우고 있다. 현대 세계의 희망의 위기 앞에서, 교회는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인 희망을 더욱 깊이 이해하여야 한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4).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특히 세상 속에서 희망의 증인이자 희망의 봉사자가 되도록 부름 받고 있다(교회 헌장 48.49항; 사목 헌장 1항 참조). 교회는 그 보편성 덕분에, 온 인류에게 퍼져 나가는 희망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이 희망을 모든 이에게 전해 줄 사명을 지니고 있다.

74. 다) 전 세계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은 세상의 모든 고통 받는 이들을 생생히 보여 줌으로써, 교회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연민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의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시다. 세상의 이 큰 고통 앞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에페 3,20)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법을 배워 간다.

75. 라) 사람들은 어디서나 어린이의 고통을 수치로 여기고 어린이가 그들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104) 그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우선적 사랑이 표현된 신약의 여러 구절들을 상기하며 새롭게 묵상해 본다. “어린이들이 ……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참조: 루카 18,15-16).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마태 18,6).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이처럼, 교회는 어린이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돌봄을 보여 주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을 새롭게 한다(교회 헌장 11항; 사목 헌장 48.50항 참조).

76. 마) 다른 믿음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 여행과 만남이 증가하고, 다른 종교인들 사이에 많은 대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교회는 하느님의 다채롭고 신비로운 길들(비그리스도교 선언 1.2항 참조)과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의 사명을 더욱 잘 인식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77. 친교의 교회론과 희망의 신학, 하느님 자비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고, 유아의 안녕에 대한 관심이 새로워지며,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사목 헌장 22항) 모든 이의 삶 속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인식이 더욱 증가하는 등, 현대의 이 모든 모습이 어우러져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를 검토하기 위한 새로운상황을 만들고 있다. 이는 이 문제를 다시 숙고하기 위한 섭리적 기회일 수 있다. 성령의 은총으로, 교회는 현대 세계 안에 몸담고 살아가면서 이 문제에 새로운 빛을 비출 수 있는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더욱 깊은 통찰력을 얻어 온 것이다.

78. 희망이야말로 우리의 성찰과 이 문서의 가장 근본적인 바탕이다. 오늘날 교회는 일반적으로 세상을 위해, 그리고 특히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을 위해 새로워진 희망으로 우리 시대의 징표들에 응답한다.105)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그러한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1베드 3,15 참조). 지난 오십여 년 동안, 교도권은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점점 더 개방적인 입장을 보여 왔고, 신자들의 신앙 감각도 같은 방향으로 발전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106)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하늘 나라에서 성인들이 나누는 사랑의 통공을 특히 전례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계속 체험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의 희망은 더욱 커진다. 우리가 선포하고 설명해야 하는 우리 마음속의 희망은 전례 안에서 계속 새로워지고, 여기에서 제시할 수 있는 여러 성찰도 바로 그러한 희망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79. 교회가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구원에 대하여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여야 한다. 교회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영광을 알고 이를 기념한다. 그러나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운명이 일반적으로 어떠한지는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았고, 교회는 계시된 것과 관련해서만 가르치고 판단한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우리가 명확히 알고 있는 사실에 근거하여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아이들의 구원을 희망하며, 이제 이 희망의 근거를 설명하고자 한다.

3.2. 하느님의 자비로운 인간애

80. 하느님께서는 자비가 풍성하시다(에페 2,4 참조). 비잔틴 전례에서는 자주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찬미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107) 또한, 이제 성령을 통하여 계시되었듯이 하느님 사랑의 계획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10: 이사 64,4 인용).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운명에 대해 가슴 아파하는 이들, 특히 그들의 부모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이며 이러한 말로 위로받아야 하는 이들이다. 특별히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81. 가)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이에게 미치고 그분의 섭리는 모든 것을 아우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께서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마침내생명을 얻도록” 빛을 비추어 주신다(교회 헌장 16항 참조). 또한 공의회는 선의의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은총이 “보이지 않게 움직인다.”(사목 헌장 22항)고 가르친다. 이러한 말은 책임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이성을 발휘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난 이들에게 직접 해당되는 말이지만, 이성을 발휘할 수 있는 나이가 안 된 아이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기란 어렵다. 특히 다음과 같은 말은 참으로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또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 소명이므로’(cumque vocatio hominis ultima revera una sit, scilicet divina),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사목 헌장 22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이 심오한 단언은 우리에게 복되신 삼위일체의 사랑의 계획에서 그 핵심을 보여 주고, 하느님의 선의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82. 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108) 나아가, 하느님의 권능은 성사들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권능을 성사들에만 결부시키지 않으셔서 성사 없이도 성사의 효과가 전해질 수 있게 하셨다.”10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성사 수여 없이 세례의 은총을 주실 수 있고, 특히 세례수여가 불가능할 때 이 사실을 상기하여야 한다. 성사의 필요성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이신 ‘원성사’(Ursakrament)이다. 모든 구원은 그분에게서 생겨나고 따라서 어느 모로 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110)

83. 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구원의 치유책을 마련해 주신다.111) 이는 토마스 데 아퀴노뿐만 아니라,112) 이미 그 이전에 아우구스티노와113) 대 레오의114) 가르침이었다. 또한 가예타노에게서도 이 가르침을 찾아볼 수 있다.115) 인노첸시오 3세 교황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린이들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셨다. “날마다 수많은 아이들이 숨을 거두고 있는데,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수단을 마련해 주시지 않아서 그 어린이들이 모두 멸망하리라는 생각은 떨쳐 버려야 합니다. …… 죄는 원죄와 본죄, 이렇게 두 종류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원죄는 동의 없이 짊어진 것이고, 본죄는 동의 아래 저지른 것입니다. 따라서 동의 없이 짊어진 원죄는 세례성사의 힘으로 동의 없이 사면됩니다. …….”116) 인노첸시오 교황께서는 날마다 죽어 가는 많은 유아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수단으로서 유아 세례를 옹호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이 개념을 조금 더 신중하게 적용하여, 하느님께서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을 위해서도 어떤 구원책을 마련해 주시는 것은 아닌지 물어볼 수 있다. 원죄 상태에서 죽은 이들에게는 지복 직관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인노첸시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117) 우리의 물음은 세례 받지 않고 죽는 유아가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치유 없이 원죄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지 아닌지에 관한 문제이다.

84. 하느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치유책을 마련해 주신다고 확신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치유책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이 그리스도께 결합될 수 있는 방식들은 다음과 같다.

85. 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고통 받다 죽은 그러한 유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분께 동화되어 구원을 받고 그분과 친교를 이룬다는 사실을 식별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의 죄와 죽음의 무게를 짊어지셨고, 그 이후부터 모든 고통과 죽음은 그리스도 자신의 원수가 되어(1코린 15,26 참조)그분께서 몸소 우리와 함께 이에 맞서 싸우시는 것이다(다니 3,24-25[91-92]; 로마 8,31-39; 2티모 4,17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들의 희망의 원천이고(1코린 15,20 참조),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만 풍성한 생명이 있다(요한 10,10 참조). 그리고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동참하게 해 주신다(사목 헌장 22항 참조).

86. 나) 고통 받다 죽은 유아들 가운데에는 폭력의 희생자도 있다. 그 경우에, 우리는 주저 없이 무죄한 어린이들을 그 본보기로 들 수 있고, 그들에게서 구원을 가져다주는 피의 세례의 유비를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아무것도 모르지만, 무죄한 어린이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 받고 죽었다. 그들을 죽인 살인자들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무죄한 어린이들의 생명을 앗아 간 이유가 두려움과 이기심이었듯이, 오늘날 특히 태아의 생명도 다른 이들의 두려움이나 이기심 때문에 흔히 위험에 놓이고는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무죄한 어린이들과 연대를 이루고 있다. 나아가 그들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신 그리스도와 연대를 맺고 있다. 교회가 복음의 본질이며 생명 수호의 핵심인 희망과 관용을 선포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87. 다) 세례 받은 유아들에게 성사적으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선물과 유사하게, 하느님께서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에게도 단순히 구원의 선물을 주시는 행동을 하실 가능성도 있다.118)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게 기꺼이 베풀어 주신 선물에 견줄 수 있다. 마리아를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심으로써,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단순히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총을 미리 베풀어 주시는 행동을 하신 것이다.

3.3. 그리스도와 이루는 연대

88. 그리스도와 온 인류는 근본적으로 일치와 연대를 이루고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당신의 강생으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어느 모로’(quodammodo) 결합시키신 것이다(사목 헌장 22항).119) 그러므로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가 가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류와 사실 모든 피조물은 바로 그 강생의 사실을 통해 객관적으로 변화되었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구원받았다.120) 그러나 이러한 객관적 구원은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사도 2,37-38; 3,19 참조), 이는 통상적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든 안 받았든 어른들이 개인적으로 은총에 유익하게 자유 의지를 행사하거나 유아들이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의 상황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자유 의지가 결여되었다고 추정되기 때문이다.121) 따라서, 그들의 상황은, 원죄와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주신 객관적인 구원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공의회에서 말한 ‘어느 모로’(quodammodo)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지 하는 민감한 문제를 제기한다.

89.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사셨고 돌아가셨으며 다시 부활하셨다. 바오로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합니다”(필리 2,10-11).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로마 14,9-11). 마찬가지로 요한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측면을 강조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5,22-23). “나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그 모든 곳에 있는 만물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묵시 5,13).

90. 성경은 온 인류가 예외 없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림보에 대한 전통적인 이론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거기에서 영혼들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닌지가 불명확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교리에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특성이 부족해 보인다. 어떤 설명에 따르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선택을 한 초자연적 질서와는 다른 질서에서 림보의 영혼들은 자연적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토마스 데 아퀴노의 설명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회복시켜 주시고(그리스도의 은총은 인간 본성을 치유하는 ‘치유의 은총’[gratia sanas]이다.) 그리하여 토마스 데아퀴노가 림보에 있는 영혼들이 누린다고 한 바로 그 자연적 행복을 가능하게 해 주신다는 점을 강조한 이들은 수아레즈와 그 후대의 스콜라 신학자들이었다. 토마스 데 아퀴노의 설명에 아직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에 대한 부분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대 스콜라 신학자들은 (비록 원칙적으로는 천국과 지옥의 두 운명만 받아들였지만, 적어도 실제로는) 세 가지 가능한 운명을 그려 볼 수 있었고, 아우구스티노와는 반대로 림보에 있는 수많은 유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은총 덕분에 지옥이 아니라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고 이해한 것이다.

91.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더 충만히 내렸다! 이 말은 성경의 확고한 가르침이지만, 림보의 개념은 그러한 충만함에 제약을 두는 것처럼 보인다.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15).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로마 5,18).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2). 사실, 성경에서는 아담과 우리가 맺고 있는 죄의 연대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연대를 가르치려는 배경 설명일 따름이다. “원죄 교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이면’이라고 말할 수있다.”122) 죄와 구원 (그리고 림보)에 대한 많은 전통적인 해석들은 그리스도와의 연대보다는 아담과의 연대를 더 강조해 왔거나, 적어도 매우 제한된 개념을 가지고 인간이 그리스도와의 연대에서 은혜를 얻는 방식들에 대해 설명해 왔다. 이는 특히 그리스도께서는 아담 안에서 단죄받은 다수 가운데에서 뽑힌 소수만을 구원하신다고 한 아우구스티노의 견해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보인다.123)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은 우리가 균형을 되찾아 모든 사람이 어느 모로 결합된124) 구세주 그리스도를 인간의 중심으로 삼도록 재촉한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125)이신 그분께서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아담의 후손들에게 최초의 범죄 때문에 이지러졌던,하느님과 닮은 모습을 회복시켜 주셨다. 그분 안에 받아들여진 인간 본성이 소멸되지 않았으므로,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인간 본성도 고상한 품위로 들어 높여졌다”(사목 헌장 22항). 우리는 인류가 그리스도와 이루는 연대가 (또는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와 맺으신 연대가) 인류가 아담과 이루는 연대보다 더 우선하여야 하고 또한 이에 비추어서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운명에 관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하고자 한다.

92.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시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한다.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시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신다”(콜로 1,15-18). 하느님의 계획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에페 1,10) 것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 우주가 누리는 친교의 위대한 신비에 대한새로운 이해가 담겨 있다. 실제로 이것이 우리가 다루는 문제의 기본 바탕이다.

93. 그렇다 하여도, 인간은 자유의 은총을 받았고,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의 통상적인 수단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도 반드시 자유 의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다. 어른들은 누구나 당신을 그들과 결합시키신 그리스도에(사목 헌장 22항 참조) 대해서 명시적으로든 함축적으로든 결정을 내린다. 일부 현대 신학자들은 모든 인간의 선택에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결정이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바로 유아들은 자유 의지로 책임 있는 선택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유아들이 하느님을 뵐 수 있다는 사실은 유아 세례의 관행으로 알 수 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유아들이 그리스도와 연대를 이루고 따라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세례성사를 통해서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담과의 연대가 우선한다. 그러나 인간이 그리스도와 이루는 연대(곧,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맺으신 연대)가 우선한다면, 그러한 관점은 과연 어떻게 바뀌게 될지 의문이다.

94. 구원을 위한 세례는 ‘실제로’(in re)나 ‘원의로’(in voto) 받을 수 있다. 실제로 세례를 받지 않은 어른들이 내릴 수 있는 그리스도를 향한 암묵적인 선택이 세례를 향한 ‘원의’(votum)를 이루고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고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해해 왔다. 이러한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선택은 자유 의지를 표명하지 못하는유아들에게 열려 있지 않다. 유아에게 ‘원의’(in voto)의 세례가 불가능하다고 가정해 왔다는 것이 이 문제 전체의 핵심이다. 따라서 세례 받지 않은 아이들의 경우에, 유아를 위해 부모나 교회가 표명하는 ‘원의’(votum)든,126) 또는 유아가 어느 모로 표명하는 ‘원의’든,127) ‘원의’가 있을 가능성을 살펴보는 많은 시도들이 현대에 이루어져 왔다. 교회는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한 적이 결코 없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에 그렇게 하려던 시도는 의미심장하게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가 아직 진행 중이라는 의식과 그러한 유아들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자 하는 바람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95.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동시에 영원한 삶으로 부르는 ‘이중의 선물’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순수한 자연 질서만 인식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인간의 삶은 자연 질서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 질서는 초자연적인 것으로서, 은총의 통로는 모든 인간 생명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열린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취하신 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매 순간 분명하게 알고 받아들이는 정도는 다르지만 그분과 일종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교회 헌장 16항 참조). 그러한 초자연적 질서 안에서 인간에게는 가능한 두 개의 문이 있다. 하느님을 뵙든지 아니면 지옥에 가는 것이다(사목 헌장 22항 참조). 일부 중세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은총(치유의 은총)으로 얻는 일종의 중간적이고 자연적 상태의 운명, 곧 림보의 가능성을 주장했지만,128) 우리는 그러한 설명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에게도 천국의 길이 열리는 구원의 은총에 대한 희망을 바탕으로 한 다른 가능한 접근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는 교리의 발전과 더불어 커다란신학적 희망에 비추어 림보에 관한 설명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3.4. 교회와 성인들의 통공

96.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어느 모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사목 헌장 22항 참조)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또한 언제나 교회와 어느 모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교회는 인류 전체와 깊은 연대 곧 친교를 맺고 있다(사목 헌장 1항 참조).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누리는 충만한 삶을 역동적으로 지향하며 살아가고(교회 헌장 제7장 참조), 이 충만한 삶으로 모든 사람을 이끌어 들이고자 한다. 실제로 교회는 “구원의 보편 성사”(교회 헌장 48항; 참조: 1.9항)이다. 구원은 사회적 성격을 띤다(사목 헌장 12항 참조). 교회는 모든 이가 부름 받은 성인들과 통교하는 은총의 삶을 이미 살아가고 있고, 특히 성찬례를 거행할 때 자신의 기도 속에 모든 상황에 있는 모든 사람을 그러안는다. 교회의 기도 속에는 이 세상을 떠난 비그리스도교 성인들과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이 포함된다. 매우 의미심장하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을 위한 전례 기도가 없었으나 공의회 이후에 개선되었다.129) 공동의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따라(교회 헌장 12항 참조)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교회는 모든 이에게 다가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에게는 결정적으로 지복 직관이 없다고 가르치려던 시도들이130) 수포로 돌아간 주된 이유는, 그것이 자기 백성들의 믿음이 아니라는, 곧 ‘신자들의 신앙 감각’(sensus fidelium)에 부합하지 않다는 주교들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97.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배우자가 비신자일 경우 그들도 각자 그들의 배우자를 통하여 ‘거룩해지고’, 나아가 그들의 자녀들 또한 “거룩하다”(1코린 7,14)고 가르친다. 이는 교회 안에 있는 거룩함이 인간의 친교의 유대를 통하여, 이 경우에는 혼인으로 맺어진 남편과 아내, 부모 자녀 사이의 가족 간의 유대를 통하여, 교회의 가시적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는 놀라운 설명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이 내포하는 바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배우자와 자녀는 그 가족의 유대 덕분에 적어도 교회의 구성원 그리고 구원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정 상황은 “어느 정도 계약으로 들어섰음을 나타낸다.”131) 바오로의 이 말은 세례 받지 않은 배우자나(1코린 7,16 참조) 자녀의 구원을 보장하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다시 한 번 희망의 근거가 된다.

98. 유아가 세례 받을 때, 그 아기는 직접 신앙 고백을 할 수 없다. 그때에 부모와 교회가 일반적으로 성사 행위를 위한 신앙의 바탕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아기를 세례로 이끄는 것은 바로 교회라고 가르친다.132) 교회는 그 유아가 할 수 없는 신앙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유아를 위해강하게 전구한다. 그리하여 자연적이고 초자연적인 친교의 유대가 다시 작용하고 드러나는 것이다. 세례 받지 않은 유아가 ‘세례의 원의’(votum baptismi)를 표명할 수 없을 때, 교회는 바로 그 친교의 유대로 그 유아를 위하여 전구할 수 있고, 하느님 앞에서 유효하게 그를 위하여 ‘세례의 원의’를 표명할 수 있다. 또한 교회는 성찬례거행 때마다 새로워지는 모든 것을 향한 바로 그 사랑으로 그러한 ‘원의’를 전례 안에서 효과적으로 표명하는 것이다.

99.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이 가르침에서 세례성사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133) 또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긴밀히 연관된) 성찬례 참여의 필요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성체를 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결론 내리지 않듯이, 앞의 말씀에 미루어 세례성사를 받지 않은 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유추해서는 안 된다. 결론은 어느 누구도 세례성사와 성체성사, 그리고 따라서 이 성사들을 특징으로 하는교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든 구원은 세례성사와 성체성사, 그리고 교회와 연관된다.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원칙은,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고 그 본성상 교회적인 것이 아닌 구원은 없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히브 11,6)라고 한 성경의 가르침은 구원 활동에서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의 고유한 역할을 알려 준다. 특히 전례 안에서 교회가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간구할 때 이 역할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3.5. 기도하는 대로 믿는다(Lex Orandi, Lex Credendi)

100.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라틴 교회에서는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을 위한 그리스도교 장례 예식이 없었고 그러한 유아들은 거룩하지 않은 땅에 묻혔다. 엄밀히 말하면 세례 받은 유아들을 위한 장례 예식도 없었지만, 그들의 경우에는 천사 미사를 거행하였고 물론 그리스도인의 무덤에 묻혔다. 공의회 이후의 전례 개혁 덕분에, 이제 『로마 미사 전례서』에는 세례 받지 못한 어린이의 장례 미사가 있고, 『장례 예식서』(Ordo Exsequiarum)에도 그러한 상황을 위한 특별 기도문이 실려 있다. 비록 두 경우 모두 기도문의 어조가 매우 조심스럽지만, 이제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희망을 전례적으로 표현하며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도록유아를 하느님께 맡겨 드린다. 이러한 전례 기도는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운명에 관한 라틴 교회의 신앙 감각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이를 형성하는 것이다. 곧 ‘기도하는 대로 믿는다’(lex orandi, lex credendi). 의미심장하게도 그리스 가톨릭 교회에는 세례를 받았든 아직 안 받았든 유아를 위한 장례 예식이 하나뿐이고, 교회는모든 죽은 아이들을 위하여, 그들이 슬픔도 괴로움도 없고 오로지 영원한 생명만 있는 아브라함의 품 안에 받아들여지도록 기도한다.

101.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의 경우, 그들을 위한 장례 예식에서 하듯이 교회는 그들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라시는’(1티모 2,4)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마르 10,14) 하신 예수님의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우리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이 거룩한 세례의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께로 오는 것을 막지 말라는 교회의 호소는 더욱 절실한 것이다.”134)

3.6. 희 망

102. 교회가 온 인류를 위하여 품고 있고 현대 세계에 새롭게 선포하고자 하는 희망 안에는,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의 구원을 위한 희망이 포함되어 있는가? 교회 역사 안에서 제시된 여러 응답에 감사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또 오늘날에 적합한 응답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임을 인식하는 가운데, 우리는이 복합적인 문제를 다시 신중하게 숙고해 보았다. 우리는 온 세대를 통해 교회를 일치시킨 단일한 신앙 전승에 따라 성찰하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약속하신 성령의 인도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시대의 징표를 읽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글에서 다룬 많은 요소들이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가 구원받고 지복 직관을 누리게 되리라는 희망에 대해 진지한 신학적 전례적 토대를 제시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는 이 요소들이 확실한 지식의 근거라기보다는 기도하는 희망의 근거가 된다고 강조한다. 아직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은 것은 많다(요한 16,12 참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주신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살아가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늘 감사와 기쁨으로 기도드리도록 우리를 이끄신다(1테살 5,18 참조).

103. 우리에게 계시된 것은 세례성사가 통상적인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세례의 필요성을 축소하거나 세례성사의 집전을 미루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135) 오히려, 우리가 결론적으로 재강조하고자 하듯이, 이 글에서 숙고한 바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유아에게 해 줄수 없을 때, 곧 교회의 믿음과 생활 안에서 유아들에게 세례를 줄 수 없을 때,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시리라는 희망의 굳건한 근거를 마련해 준다.

<원문 International Theological Commission, The Hope of Salvation for Infants Who Die Without Being Baptised, 2007.4.19.>


주)

1. 번역 원문인 영어판에서 사용한 성경은 Revised Standard Version of the Bible (Catholic Edition)이며, 우리말 번역은 『성경』을 사용하였다. - 편집자 주

2. 국제신학위원회, 「친교와 봉사: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Commu- nion and Stewardship: Human Persons Created in the Image of God), 바티칸 시국, 2005 참조

3. “베들레헴아. 슬퍼하지 말고 무죄한 어린이들이 죽은 것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라. 그들은 임금이신 그리스도께 바쳐진 완전한 희생 제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희생되었으니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다.”: 비잔틴 전례의 아침 기도(Exapostilarion of Matins), 『연중 소전례서』(Anthologion di tutto l Anno), vol.1, Edizione Lipa, Roma, 1999, 1199.

4. 교황청 신앙교리성, 어린이 세례에 관한 훈령 「사목 활동」(Pastoralis Actio, 1980), 13항, 『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 AAS), 72(1980), 1144.

5.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1261항.

6.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58항.

7. 『가톨릭 교회 교리서』, 1821항.

8. 창세 22,18; 지혜 8,1; 사도 14,17; 로마 2,6-7; 1티모 2,4; 키에르시 공의회(Synod of Quiercy), 『신앙 규정 편람』(Denzinger-Schönmetzer, 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DS), Rome: Herder, 1976, 62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 1항 참조.

9.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22항.

10. 키에르시 공의회, DS 623 참조.

11. D. Weaver, “The Exegesis of Romans 5:12 among the Greek Fathers and its Implication for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the 5th-12th Centuries”, St. Vladmir’s Theological Quarterly 29(1985), 133-159.231-257 참조.

12. 위(僞) 아타나시우스(Pseudo-Athanasios), 「안티오키아 지도자들에 대한 질문」(Quaestiones ad Antiochum ducem), qn.101, 『그리스 교부 총서』(Patrologia cursus completa, series graeca: PG), 미네(J.P. Migne) 편집, 28(660C). 앞의 책, qn.115, PG 28,672A 참조.

13. 시나이의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of Sinai), 「질의 응답」(Quaestiones et Responsiones), qn.81, PG 89,709C 참조.

14. 「일찍 죽은 유아에 관한 소논문」(De Infantibus Praemature Abreptis Libellum), 원래 H. Polack이 보낸 라이덴 회의 준비 자료인데 Hadwiga Hörner가 출판을 위하여 새로운 자료로 다시 교정 편집한 것이다. J.K. Downing - J.A. McDonough - H. Hömer 편집 정리, 『니사의 그레고리오의 소교리집』(Gregorii Nysseni Opera Dogmatica Minora), Pars II, W. Jäger - H. Langerbeck - H. Hömer 편집, 『니사의 그레고리오 전집』(Gregorii Nysseni Opera), Volumen III, Pars II, Leiden, New York, Køenhavn, Köln, 1987, 65-97 참조.

15. 같은 책, 70.

16. 같은 책, 81-82.

17. 같은 책, 83.

18. 같은 책, 96.

19. 같은 책, 97.

20.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강론집」(Oratio), 40 - “거룩한 세례”(In Sanctum Baptisma), 23, PG 36,389B-C.

21. 「질의 응답」, qn.81, PG 89,709C.

22. 펠라지우스, 「로마서 강해」(Expositio in Epistolam ad Romanos), 『강해록 13 - 바오로 서간들』(Expositiones XIII Epistolarum Pauli), A. Souter 편집, Cambridge, 1926 참조.

23. 아우구스티노, 「서간집」(Epistula), 156, 『라틴 교회 저술가 전집』(Corpus Scriptorum Ecclesiasticorum Latinorum: CSEL), 44,448 이하; 175.6, CSEL 44,660-662; 176.3, CSEL 44,666 이하; 「죄와 용서, 유아 세례」(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 et de baptismo parvulorum), 1.20.26; 3.5.11-6.12, CSEL 60,25 이하와 137-139; 「펠라지우스 논쟁」(De Gestis Pelagii), 11,23-24, CSEL 42,76-78 참조.

24. 「죄와 용서, 유아 세례」, 1.16.21, CSEL 60,20 이하; 「설교집」(Sermo), 294.3, 『라틴 교부 총서』(Patrologia cursus completa, series latina: PL), 38,1337; 「율리아누스 반박」(Contra Iulianum), 5.11.44, PL 44,809 참조.

25. 「죄와 용서, 유아 세례」, 1.34.63, CSEL 60,63 이하 참조.

26. 아우구스티노, 「그리스도의 은총과 원죄」(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originali), 2.40.45, CSEL 42,202 이하; 「혼인과 정욕」(De Nuptiis et Concupiscentia), 2.18.33, CSEL 42,286 이하 참조.

27. 「설교집」, 293.11, PL 38,1334 참조.

28. 「죄와 용서, 유아 세례」, 1.9-15.20, CSEL 60,10-20 참조.

29. “Cur ergo pro illis Christus mortuus est si non sunt rei?”, 「혼인과 정욕」, 2:33.56, CSEL 42,513 참조.

30. 「설교집」, 293.8-11, PL 38,1333 이하 참조.

31. 「설교집」, 294.3, PL 38,1337 참조.

32. 「죄와 용서, 유아 세례」, 1,28.55, CSEL 60,54 참조.

33. 아우구스티노, 「라우렌시오를 위한 총람」(Enchiridion ad Laurentium), 93, PL 40,275; 「죄와 용서, 유아 세례」, 1.16.21, CSEL 60,20 이하.

34. 「율리아누스 반박」, 5.11.44, PL 44,809.

35. 「율리아누스 반박, 미완성 작품」(Contra Iulianum Opus Imperfectum), 4.122, CSEL 85,141-142 참조.

36. 「펠라지우스파의 두 가지 편지 반박」(Contra Duas Epistulas Pelagianorum), 2.7.13, CSEL 60,474 참조.

37. 「설교집」, 294.7.7, PL 38,1339.

38. 펠라지우스와의 논쟁을 시작하기 전까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가르쳐 온(「영혼과 서간」[De Spiritu et Littera], 33.57-58, CSEL 60,215 이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티모테오 1서 2장 4절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보편성을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한정한다.: ‘실제로’ 구원받을 사람들(오직 이 사람들), 모든 개인이 아니라 모든 ‘계층’(유다인과 이방인), 모든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들(「라우렌시오를 위한 총람」, 103, PL 40,280); 「율리아누스 반박」, 4.8.44, PL 44,760). 그러나 얀센주의와는 달리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늘 그리스도께서 유아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고 가르쳤다(“유아들 역시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1티모 2,4]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율리아누스 반박」, 4.8.42, PL 44,759; 「율리아누스 반박」, 3.25.58, PL 44,732; 「설교집」, 293.8, PL 38,1333). 그리고 하느님께서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지는 않으신다고 가르쳤다(『신국론』[De Civitate Dei], 22.2, CSEL 40,583-585; 「본성과 은총」[De Natura et Gratia], 43.50, CSEL 60,270; 「토론」[Retractationes], 1.10.2, PL 32,599). 이 문제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F. Moriones 편, 「아우구스티노 성인 신학 총람」(Enchiridion Theologicum Sancti Augustini), Madrid: La Editorial Catolica, 1961,327.328.474-481 참조.

39. 「라우렌시오를 위한 총람」, 94-95, PL 40,275 이하; 「본성과 은총」, 3.3-5.5, PL 44,249 이하 참조.

40. DS 223. 트리엔트 공의회는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트리엔트 공의회, 제5회기, 원죄에 관한 교령(Decretum super Peccato Originali), DS 1514; 『가톨릭 교회 교리 문헌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신앙』(J. Neuner - J. Dupuis 편집, The Christian Faith in the Doctrinal Documents of the Catholic Church: ND), Theological Publications in India Bangalore, 2004, 511 참조.

41. DS 224. “그래서 주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고 말씀하셨다고 하여 세례 받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하늘 나라에 세례 받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난 어린이들이 행복하게 사는 중간적인 것이나 중간 장소가 있을 것을 안다고 말하는 이가 단죄받는 것은 합당하다”(Item placuit, ut si quis dicit, ideo dixisse Dominum: “`In domo Patris mei mansiones multae sunt.” (Io 14,2), ut intelligatur, quia in regno caelorum erit aliquis medius aut ullus alicubi locus, ubi beati vivant parvuli, qui sine baptismo ex hac vita migrarunt, sine quo in regno caelorum, quod est vita aeterna, intrare non possunt, anathema sit).; 「아프리카 교회회의」(Concilia Africae), A.345-A.525, C. Munier 편집, Turnhout: Brepols, 1974, 70 참조. 이 조항은 일부 문헌에 나타나 있지만 다른 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다. 「소색인」(Indiculus)에는 이 내용이 나와 있지 않다. DS 238-249; ND 1907-1914 참조.

42. 대 그레고리오, “욥기 9장 17절 강해”, 「욥기 교훈」(Moralia), 9.21, PL 75,877. 또한 「욥기 교훈」, 12.9, PL 75, 992-993); 13.44, PL 75,1038 참조.

43. 안셀모, 「동정 잉태와 원죄」(De conceptu virginali et de originali peccato), F.S. Schmitt 편집, t.II, cap.28, 170-171 참조.

44. 「사상 전집」(Summa Sententiarum), tract.V, cap.6, PL 176,132 참조.

45. 아벨라르, 「로마서 강해」(Commentaria in Epistolam Pauli ad Romanos), Liber II[5,19], 『중세 그리스도교 문학 전집』(Corpus Christianorum, Continuatio Mediaevalis: CCCM), 11, 169-170 참조.

46. 「명제집」(Sententiae), Lib.II, dist.33, cap.2, I. Brady 편집, t I/2, Grottaferrata, 1971, 520 참조.

47. 인노첸시오 3세, 아를르 대교구장 윙베르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 「교회의 위대한 임무」(Maiores Ecclesiae Causas), DS 780: “원죄에 대한 벌은 하느님을 뵙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은 영원한 불길의 형벌이다.……”(Poena originalis peccati est carentia visionis Dei, actualis vero poena peccati est gehennae perpetuae cruciatus...). 이러한 신학 전통에서는 ‘지옥의 고통’을 육체적 영적 고통과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 토마스 데 아퀴노, 「명제집」(Sent.) IV, dist.44, q.3. a.3, qla 3; dist.50, q.2, a.3. 참조.

48. 제2차 리옹 공의회, 「미카엘 팔레올로구스의 신앙 고백」(Profession for Michael Paleologus), DS 858; 요한 22세,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보내는 서한 「불가피한 고통」(Nemquaquam sine Dolere), DS 926; 피렌체 공의회, 교령 「하늘의 기쁨」(Laetentur Caeli), DS 1306 참조.

49. 토마스 데 아퀴노, 「명제집」(Sent.) II, dist.33, q.2, a.2; 「악에 관하여」(De Malo), q.5, a.3. 둔스 스코투스, 「강의록」(Lectura) II dist.33, q. un.; 「규율집」(Ordinatio) II dist.33, q. un. 참조.

50. 「악에 관하여」, q.5, a.3.: “어린이들의 영혼이여 …… 이들에게는 믿음을 통하여 여기 우리 안에 심어진 초자연적 인식이 없다. 이들은 행위를 통해 이를 보존하거나 믿음의 성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것[초자연적 인식]이 결여되었기에 어린이들의 그토록 선한 영혼은 [선악을] 인식하지 못하고 따라서 고통을 받지 않는다.” 참조: 같은 책, ad 4, Leonine edition, vol.23, 136.

51.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은총의 상실」(De Amissione Gratiae), VI, c.2와 c.6, 『전집』(Opera), vol. 5, Paris: Viv뢵, 1873, 458.470 참조.

52. 바오로 3세, 「또 다른 지복」(Alias cum Felicitate), 1535.9.23., Jo. Laurentii Berti Florentini, 『신학 원리 전집』(Opus de Theologicis Disciplinis), Venetiis: Ex Typographia Remondiniana, 1760, vol.V, 36; 바오로 3세, 「또 다른 확실함」(Cum alias Quorumdam), 1538.3.11., 『신학 원리 전집』, vol.I, 167-168; 베네딕토 14세, 「지난 달」(Dum praeterito Mense), 1748.7.31.; 「위대함」(Non sine Magno), 1750.12.30.; 「7월 15일」(Sotto il 15 di luglio), 1751.5.12., 『베네딕토 14세 교황 문헌, 아직 정리가 안 되거나 부분적으로 정리된 것을 Raphaelis de Martinis가 일차로 수집 정리한 것』(Benedicti XIV Acta sive nondum sive sparsim edita nunc autem primum collecta cura Raphaelis de Martinis), Neapoli, Ex Typogr. Puerorum Artificium, 1894, vol.I, 554-557; vol. II, 74,412-413. 다른 글과 참고 문헌은 G.J. Dyer, The Denial of Limbo and the Jansenist Controversy, Mundelein, IL: Saint Mary of the Lake Seminary, 1955,139-159; 특히 139-142, 또한 로마 코르시니아나 도서관의 분류 기호41.C.15의 문헌 1485호에 나온 1758-1759년의 클레멘스 13세 교황 때의 논의에 관한 내용(교황청 성무성성에서 1733년에서 1761년까지 다룬 사건) 참조.

53. 비오 6세, 칙서 「신앙의 권위」(Auctorem Fidei), DS 2626. 이 문제에 관하여 「림보의 부인과 얀센주의자들의 논쟁」, 159-170 참조.

54. 가톨릭 교리에 관한 교의 헌장 수정안(Schema reformatum constitutionis dogmaticae de doctrina catholica), cap.V, n.6, 『최근 공의회 회의록과 교령: 공의회 자료집』(Acta et Decreta Sacrorum Conciliorum Recentiorum, Collectio Lacensis), t.7, Friburgi Brisgoviae, 1890, 565 참조.

5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논의된 것과 제안된 몇 가지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보려면, Y. Congar, “Morts avant l’aurore de la raison”, in Vaste monde ma paroisse: Véritét dimensions du Salut, Paris: Témoignage Chrétien, 1959, 174-183; G. Dyer, Limbo: Unsettled Question, New York: Sheed and Ward, 1964, 93-182(192-196에 나온 여러 저서 인용도 포함); W.A. van Roo, “Infants dying without baptism: A Survey of Recent Literature and Determination of the State of the Question”, Gregorianum 35(1954), 406-473; A. Michel, Enfants morts sans baptême, Paris: Téqui, 1954; C. Journet, La volonté divine salvifique sur les petits enfants, Paris: Descrée de Brouwer, 1958; L. Renwart, “Le baptême des enfants et les limbes”, Nouvelle Revue Théologique 80(1958), 449-467; H. de Lavalette, “Autour de la question des enfants morts sans bapt릑e”, Nouvelle Revue Théologique 82(1960), 56-69; P. Gumpel, “Unbaptized Infants: May They be Saved?”, The Downside Review 72(1954), 342-458; P. Gumpel, “Unbaptized Infants: A Further Report”, The Downside Review 73(1955), 317-346; V. Wilkin, From Limbo to Heaven: An Essay on the Economy of Redemption, New York: Sheed and Ward, 1961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E. Boissard, Réplexions sur le sort des enfants morts sans baptême, Paris: Editions de la Source, 1974 참조.

56. G. Alberigo - J.A. Komonchak 편집, History of Vatican II, vol.1, Maryknoll: Orbis & Leuven: Peeters, 1995, 236-245.308-310 참조.

57. DS 1349.

58. 이러한 제안과 그에 따른 문제들에 관해서는, G.J. Dyer, The Denial of Limbo and the Jansenist Controversy, 102-122 참조.

59. 비오 12세, 이탈리아 조산원들에게 한 연설, AAS 43(1951), 841.

60. 비오 12세, 회칙 「인류」(Humani Generis), AAS 42(1950), 570: “또 다른 이들은 하느님께서 지적 존재를 창조하시면서 이들에게 지복 직관을 명령하시고 요구하지 않으셨을 리 없다고 말하면서, 초자연적 질서의 무상성을 파괴합니다”(Alii veram ‘gratuitatem’ ordinis supernaturalis corrumpunt, cum autument Deum entia intellectu praedita condere non posse, quin eadem ad beatificam visionem ordinet et vocet).

6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15-16항;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 1항;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인간 존엄성」(Dignitatis Humanae), 11항,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만민에게」(Ad Gentes), 7항 참조.

62. 예를 들면, 특히 K. Rahner, “Die bleibende Bedeutung des II Vatikanischen Konzils”, Schriften zur Theologie, Band XIV, Benziger Verlag: Zürich, Köln, Einsiedeln, 1980, 314-316의 의견 참조. 다른 어조를 띤 의견으로는, J.-H. Nicolas, Synthèse dognatique. De la Trinité à Trinité Fribourg, Paris: Editions Universitaires, Beauchesne, 1985, 848-853 참조. 요셉 라칭거 추기경(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개인 신학자 자격으로 비토리오 메소리와 나눈 대담(Rapporto sulla fede, Cinisello Balsamo: Edizioni Paoline, 1985, 154-155)에서 밝힌 의견도 참조.

63. 앞의 각주 38.

64. 비오 9세, 회칙 「커다란 슬픔」(Quanto Conficiamur), 1863.8.10., DS 2866: “... qui ... honestam rectamque vitam agunt, posse, divinae lucis et gratiae operante virtute, aeternam consequi vitam, cum Deus, qui omnium mentes, animos, cogitationes habitusque plane intuetur, scrutatur et noscit, pro summa sua bonitate et clementia minime patiatur, quempiam aeternis puniri suppliciis, qui voluntarie culpae reatum non habeat.”

65. 「교회의 중요한 임무」, DS 780 참조.

66. 제2차 리옹 공의회, 「미카엘 팔레올로구스의 신앙 고백」, DS 858; 앞의 각주 48.

67. AAS 43(1951), 841.

68. 앞의 “1.6.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시기까지”와 뒤의 “2.4. 세례성사의 필요성” 참조.

69. 에페 1,5.9 참조: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ευδokίa)에 따라.”

70. 루카 10,22 참조: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βoυλετaί) 사람.”

71. 1코린 12,11 참조: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βoυλετaί) 대로 각자에게 그것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72. 예를 들면, 마태 23,37 참조.

73. 『가톨릭 교회 교리서』, 307항 참조.

74. DS 623.

75. DS 624.

76. 이레네오, 「이단 반박」(Adv. Haer.), I,10,1, PG 7,550.

77.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II, q.26, art.1, corpus.

78.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 5항.

79. 교황청 신앙교리성,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 14항.

80. 바오로 시대에 아담의 영향에 관한 유다인들의 믿음을 증언하는 다른 구절들로는 제2경전 바룩 17,3; 23,4; 48,42; 54,15; 4에즈 3,7; 7,118이 있다. “오, 아담,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죄를 지은 것은 당신이었지만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 자손들인 우리까지도 타락하였습니다.”

81. 로마 3,23 참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82. 서방 교회에서, 그리스어 ‘εϕ ώ’는 아담을 가리키는 남성 대명사나 아니면 ‘죄’(peccatum)를 가리키는 중성 대명사와 함께 쓰인 관계 절로 이해되었다(고대 라틴어 역본[Vetus Latina]과 『대중 라틴말 성경』 해당 부분 참조). 아우구스티노는 처음에 두 해석을 모두 받아들였지만, 죄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명사가 여성형(á μaρτιa)이라는 것을 알고는,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 통합된다는 개념을 내포하는 첫 번째 해석을 채택하였다. 그를 따라 많은 라틴 신학자들은 ‘아담이나 죄를 통해서’(sive in Adamo, sive in peccato)나 ‘아담을 통해서’(in Adamo)로 해석하였다. 후자의 해석은 다마스쿠스의 요한에 이르러서야 동방 교회에 알려졌다. 몇몇 그리스 교부들은 ‘εϕ ώ’를 ‘(누구) 때문에’, 말하자면 ‘아담 때문에’ ‘모두 죄를 지었다’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εϕ ώ’는 ‘-하므로, -하기 때문에’, ‘-라는 조건으로’, ‘-한 결과로’라는 뜻의 접속사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J. Fitzmyer는 『로마인』(Romans[AB, 33], New York, 1992, 413-416)에서 열한 가지의 서로 다른 해석을 논하고,결과적인 의미로 해석될 후자의 가능성을 선택하였다. “그러므로, ‘εϕ ώ’는 바오로가 모든 사람의 죄 안에 있는 아담의 죄를 인정함으로써 아담이 인류에게 미친 나쁜 영향의 결과를 표현하고 있음을 뜻할 것이다”(같은 책, 416).

83. 아우구스티노, 「혼인과 정욕」(De Nuptiis et Concupiscentia) II, 12,15, PL 44,450: “가톨릭 신앙이 오래전부터 믿어 온 원죄는 제가 꾸며 낸 것이 아닙니다.”

84. 『가톨릭 교회 교리서』 404항은, “이 죄는 인간 번식을 통하여, 곧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실한 인간 본성의 전달을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이 때문에 원죄를 유비적으로 ‘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죄는 ‘범한’ 죄가 아니라 ‘짊어진’ 죄이며,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

85. 트리엔트 공의회, 제5회기, 원죄에 대한 교령, DS 1512; ND 509.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령은 제2차 오랑주 공의회(529) 제2조를 반영하고 있다.

86. 『가톨릭 교회 교리서』, 389항.

87. 치프리아노, 「유바이아누스 주교에게 보내는 서한」(Epistola ad Iubaianum), 73,21, PL 3,1123. 피렌체 공의회 칙서 「주님을 찬미하라」(Cantate Domino), DS 1351; ND 810: “거룩한 로마 교회는 …… ‘가톨릭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은 이교도뿐만 아니라 누구도’, 곧 유다교와 이교와 열교 신자도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없다고 확고히 믿으며, 그렇게 고백하고 선포한다. 그들이 생이 끝나기 전에 가톨릭 교회로 ‘들어오지’(aggregati) 않는다면,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속’(마태 25,41)으로 가게 될 것이다. …… ‘아무리 많은 자선을 하더라도, 심지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피를 흘리더라도, 가톨릭 교회의 일치와 품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루스페의 풀젠시우스, 「베드로에 대한 믿음에 관한 책」[Liber de Fide ad Petrum], 제1권, 38,79와 39,80).

88. 보니파시오 8세, 칙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Unam Sanctam, 1302): “나아가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로마 교황에 복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선언하며 그렇게 진술하고 규정하는 바이다”(Porro subesse Romano Pontifici omni humanae creaturae declaramus, dicimus, diffinimus omnino esse de necessitate salutis)., DS 875; cp. DS 1351; ND 875.

89. 비오 9세, 연설 「유일한 것」(Singulari Quadam), DS 2865; ND 813.

90. 교황청 성무성성에서 보스턴 대교구장에게 보낸 편지, DS 3870; ND 855.

91. 「교회의 선교 사명」, 10항.

92. 폴리카르포가 총독 앞에서 “나는 86년 동안 그분[그리스도]을 섬겨 왔습니다.” 하고 선언한 것은 유아 세례에 대한 간접적 증언이 될 수도 있다: 「폴리카르포의 순교록」(Martyrium Polycarpi), 9,3. 폴리카르포는 아마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통치 말년(156-160)에 순교하였을 것이다.

93. 트리엔트 공의회, 제5회기, 원죄에 관한 교령, DS 1514; ND 511. 이 조항은 카르타고 공의회(418) 제2조(DS 23)를 반영하고 있다.

94.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는 성경 구절들을 염두에 두고 보면, 요한 복음 3장 5절의 기본 생각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선물과 연관된다. 하느님께서 영을 불어넣어 주심으로써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심으로써 시작된다. R.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I-XII)”, The Anchor Bible, vol.29, Doubleday and Co., New York, 1966, 140 참조. 이와 관련하여,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구절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세례의 동기는 부차적인 것이다. 세례의 동기가 그 자체로 분명히 드러나는 ‘물로’라는 말은 비록 본래 그리스도교 세례를 특별히 언급하는 말은 아닐지라도 언제나 그 상황에 포함되는 말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물로’라는 말은 세례의 동기를 나타내려고 후대에 첨가된 말일 수도 있다”(같은 책, 143).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비록 ‘세례성사’의 독서는 성령론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그리스도교 전승에서는 이 말씀을 ‘세례성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요한 복음 3장 5절을 읽어 보면,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일반 원칙이 여기에 표현되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우리는 이 미묘한 해석의 차이를 인식하여야 한다.

95. 『신학 대전』, III, q.68, art.2, corpus.

96. 트리엔트 공의회, 제6회기, 의화에 관한 교령(Decretum de Justificatione), DS 1524; ND 1928.

97. 테오필락투스,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2장 4절에 관하여」(In 1Tim 2,4), PG 125,32: Eι πavτpaς av θρώπoυς θελή σώθήvaι εκειvoς θελη κaς συ κaι μιμου τov Θεov.

98.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 표준판 99항에서 “여러분은 결국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며, 지금은 주님 안에서 살고 있는 여러분의 아기에게 용서를 청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는 구절(잘못된 해석을 자아낼 수 있는 문장)이 결정적으로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고 아버지와 그분의 자비에 여러분의 아기를 맡길 수 있습니다.”(Infantem autem vestrum potestis Eidem Patri Eiusque misericordiae cum spe committere.)는 문장으로 대치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99. 요한 크리소스토모,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강론」(In 1Tim. homil.), 7,2, PG 62,536: Mμoυ Θεov. Eι πavτpaς avθρώπoυς θελή σώθήvaι εικoτώς ύπερ aπavτôv δει ευχεσθτaι.

ειvoς θελη κaς συ κaι μιμου τov Θεov.

100. 앞의 “1. 탐구의 역사” 참조.

101. 앞의 “2. 하느님 길의 탐구” 참조.

102. Vaste monde ma paroisse: Vérité et dimensions du Salut, 169: “un de ceux dont la solution est la plus difficile en synthése thélogique.”

103. 앞의 “1.5. 현대/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시대”와 “1.6.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시기까지” 참조.

104. 1985년 Live Aid 공연, 2005년 Live 8 공연과 같은 행사 참조.

105.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61항 참조.

106. 비잔틴 전례, 부활 대축일 마침 기도(Troparium): “그리스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도다. 당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도다.” 이 파스카 구절은 비잔틴 전통에서 부활 시기 40일 동안 날마다 여러 번 되풀이하여 노래하는 대표적인 부활 찬가이다.

107. 비잔틴 전례의 모든 예식과 거행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찬미한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사랑하시는 자비하신 분이시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께서는 이제와 영원히 영광 받으소서.”

108. 「본성과 은총」, 43,50, PL 44,271 참조.

109. 『신학 대전』, III, 64,7; III, 64,3; III, 66,6; III, 68,2.

110. 뒤의 “3.4. 교회와 성인들의 통공”과 “3.5. 기도하는 대로 믿는다” 참조.

111. 토마스 데 아퀴노, 『명제집』 IV, dist.1, q.2, a.4, q.1, a.2 참조: “원죄 이후 인간이 어느 상태에 있든지 그리스도 수난 덕분에 원죄를 씻을 수 있는 치유책이 마련되었다”(in quolibet statu post peccatum fuit aliquod remedium per quod originale peccatum ex virtute passionis Christi tolleretur).

112. 각주 109 참조.

113. 아우구스티노, 「편지」(Ep.), 102,2,12 참조.

114. 대 레오, 「주님 탄생」(In Nat. Domini), 4,1, PL 54,203 참조: “인간 구원의 성사는 결코 골동품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성사는 늘 가장 소중한 것으로서 여러 형태와 다양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선하심을 인간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하느님 섭리의 다양한 선물은 지나간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도 자비롭게 베풀어진다”(Sacramentum salutis humanae nulla umquam antiquitate cessavit.... Semper quidem, dilectissimi, diversis modis multisque mensuris humano generi bonitas divina consuluit. Et plurima providentiae suae munera omnibus retro saeculis clementer impertuit).

115. 가예타노, In Illam Part., q.68, a.11 참조: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이 본래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그를 위해 구원의 치유를 제공한다는 것은 합당한 말입니다”(Rationabile esse ut divina misericordia provideret homini in quocumque naturali statu de aliquo remedio salutis). 가예타노는 실제로 예를 들면 은총의 계기인 (그러나 은총의 원인은 아닌) 희생제를 바치는 것처럼 일종의 ‘자연의 성사’(sacramentum naturae)가 있던 그리스도 이전 시대를 성찰하였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도 이전에 인간은 “자연 법칙의 시대”에 있었고, 이는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러한 유아들에게 예정된 곳으로 림보 이론을 지지하는 논리를 펼쳤다. 그러나 역사와 모든 상황 속에서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상황을 돌보시고 합당한 구원의 기회를 마련해 주신다는 그의 기본 관점은 매우 중요하고 반드시 림보에 대한 결론으로 이끄는 것도 아니다.

116. 「교회의 위대한 임무」, ND 1409,506; DS 780: “Absit enim, ut universi parvuli pereant, quorum quotidie tanta multitudo moritur, quin et ipse misericors Deus, qui neminem vult perire, aliquod remedium procuraverit ad salutem... Dicimus distinguendum, quod peccatum est duplex: originale scilicet et actuale: originale, quod absque consensu contrahitur, et actuale, quod committitur cum consensu. Originale igitur, quod sine consensu contrahitur, sine consensu per vim remittitur sacramenti; ...”

117. DS 780 참조.

118. 여기에서처럼,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의 상황은 세례 받은 유아들의 상황과 유사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아마도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의 상황을 세례 받지 않은 어른들의 상황과 유사한 것으로 여길 때 더욱 문제가 될 수 있다. 아래 각주 127 참조.

119. 교부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온 인류의 승천에 대하여 즐겨 묵상하였다. 예를 들면, 「이단 반박」, 3,19,3 『그리스도교 원전』(Sources Chrétiennes: SCh), 211,380; 「사도적 가르침의 증명」(Epideixis), 33, SCh 406,130-131; 푸아티에의 힐라리오, 「마태오 복음 강론」(In Evangelium Matthaei), 4,8, SCh 254,130; 18,6, SCh258,80; 「삼위일체론」(De Trinitate), II, 24, 『라틴 그리스도교 문학 전집』(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CCL), 62,60; 「시편 강론」(Tr. in Ps.), 51,17; 54,9, CCL 61,104; 146 등; 니사의 그레고리오, 「아가 강론」(In Canticum Homilia), II, (Opera, ed. Jaeger, VI, 61); 「아폴로니우스 논박」(Adv. Apoll.), (Opera III/1, 152);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요한 복음 해설」(Commentarium in Ioannis Evangelium), I, 9, PG 73,161-164; 대 레오, Tract., 64,3; 72,2, CCL 138A,392.442.443.

120. 일부 교부들은 강생 그 자체를 구원의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예를 들면,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요한 복음 해설」, 5, PG 73,753.

121. 뒤의 각주 127 참조.

122. 『가톨릭 교회 교리서』, 389항.

123.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노, 「시편 상해」(Enarrationes in Psalmos), 70, II, 1, PL 36,891: “그러나 모든 이는 아담의 사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는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이다”(omnis autem homo Adam; sicut in his qui crediderunt, omnis homo Christus, quia membra sunt Christi). 이 문구에서 아우구스티노가 그리스도와의 연대를 아담과의 연대만큼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힘들어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이가 아담과 연대를 맺고 있다. 그러나 믿는 이만 그리스도와 연대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레네오는 재창조(또는 총괄 갱신, recapitulation)에 대한 교리에서 더욱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 준다. 「이단 반박」, 3,21,10; 5,12,3; 5,14,2; 5,15,4; 5,34,2 참조.

124. 강생의 사실을 통하여, 사목 헌장 22항 참조.

125. 콜로 1,15; 참조: 2코린 4,4.

126. 뒤의 “3.4. 교회와 성인들의 통공” 참조.

127. 유아가 표명하는 ‘원의’(votum)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자유 의지를 향한 성장 과정은, 어느 한순간 책임감 있고 성숙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 갑작스러운 질적 도약이라기보다는, 삶의 첫 순간부터 성숙을 향하여 나아가는 지속적인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태아의 존재는 인간 삶과 성장의 지속적인 한 과정이다. 태아가 갑자기 어느 한순간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유아는 실제로 세례 받지 않은 어른들처럼 일종의 기초적인 ‘원의’를 표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부 신학자들은 엄마의 미소가 하느님의 사랑을 유아에게 전달한다고 이해해 왔고, 따라서 그 미소에 대한 유아의 반응을 바로 하느님에 대한 응답으로 간주해 왔다. 일부 현대 심리학자와 신경학자들은 유아가 태중에서 이미 어느 모로 자유를 인식하고 자유를 행사해 왔다고 확신한다. V. Frankl, Der Unbewusste Gott. Psychotherapie und Religion, 1979; D. Amen, Healing the Hardware of the Soul, New York, 2002 참조.

128. 앞의 90항 참조.

129. 뒤의 “3.5. 기도하는 대로 믿는다” 참조.

130. 앞의 “1.6.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시기까지” 참조.

131. Vaste monde ma paroisse: Vérité et dimensions du Salut, 171.

132. 아우구스티노, 「보니파시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Prima Lettera a Bonifacio), 22,40, PL 44,570 참조.

133. 앞의 각주 94 참조.

134.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61항.

135.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57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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