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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Development and Christian Salvation

국제신학위원회 선언문

인간개발과 그리스도교 구원

 

서문

인간발전과 그리스도교 구원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문제는 가는 곳마다 크게 중요시되고 있다.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부터 시작된 일이다. 공의회 동안 그리스도신자들의 책임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교회는 현세조직에 관한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남미와 기타 지역에서 여러 가지 해방 신학이 날로 더욱 주목을 끌었다. 국제신학위원회는 1976년 10월 4-9일에 있었던 연례총회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러한 새로운 논문들과 경향들의 핵심을 파헤치기 위하여 인간발전과 그리스도교 구원 간의 관계에 대한 가장 기초적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룸으로써 일찍부터 계획하였던 사목헌장 연구를 실현시켰던 것이다.

다음의 글은 우리가 찾아 얻은 요점들의 종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최종 보고서는 연구대상이 된 문제들의 난해성과 신학자들 간의 논쟁 현황을 감안한 것이다. 우리가 다룬 신학적 경향들은 그 자체가 다양할 뿐 아니라, 많은 변화를 하고 있으며 계속 수정되어가고 있다. 또한 이 신학조류들은 세계와 개별지역의 사회적 조건 및 정치상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간과할 수 없는 일은 이런 논문들의 논쟁이 여러 지역에서 교회의 일치를 해치면서까지 정견 정립에 이용될 우려 때문에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하간 본 국제신학위원회로서는 새로운 신학조류가 내포하고 있는 유익성과 위험성을 검토하는 데에 공헌하고자 하는 바이다.

1977년 6월 30일, 위원장 K. Lehmann

 

1. 새로운 신학운동의 출발점인 빈곤과 불의의 상황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대의 특정을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사목헌장, 4항) 항구적 의무가 교회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 권고의 실현이 바로, 1968년에 콜롬비아의 메델린에서 열렸던 제2자 남미 주교총회에서 발표된 문헌 속에서 특별히 강조의 대상을 이루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그들의 고민을 해명해주어야 한다. 억압과 빈곤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전세계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은 「어머니와 교사」, 「지상의 평화」, 「민족들의 발전」, 「노동헌장 반포 80주년을 맞이하여」 등 교황 문헌에 나타나 있을 뿐 아니라, 1971년 주교시노드 선언문(세계의 정의)에도 나타나 있다. 바오로 6세도 1975년 12월 8일에 발표한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이에 관한 교회의 책임을 재강조하였다(30-38항).

최근 몇 해 동안 이 문제에 관해서 수많은 신학서적들이 출판된 사실을 이해하려면 위에서 말한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비록 학술적 성격을 띠고 있다손 치더라도 이런 서적들은 그 자체가 어떤 이론적 연구의 결과도 아니요, 더구나 하나의 ‘신학서’는 물론 아니다. 그들은 불행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이런 환경에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임무에 깊이 집착 하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빈곤과 고통에 억눌린 형제들의 울부짖음을 널리 들려주자는 데에 있다. 기아, 질병, 이익추구의 불의 때문에 겪는 실패, 강제 추방, 억압 등에서 우러나오는 한탄을 널리 알리자는 것이다. 또 의지할 곳 없이 노상에서 밤을 새우며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죽어가는, 가장 초보적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강요당하고 있는 비인간적 대우도 없지 않다.

복음의 빛을 받는 신자들에게 이같은 ‘시대의 표징’은 분노를 자아일으키는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형제들을 그 비인간적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신앙의 이름으로 온갖 가능한 노력을 다해야 하겠다는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불행에 대한 이런 관심과 억눌린 사람들과의 제휴감은 정의, 해방, 희망, 평화라는 성경 말씀 가운데서 특수 암시를 발견한다.

그리스도의 복음(루가 4,18)에서 결론된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관심의 증거가 이런 조류의 신학자들이 공동으로 계속 강조하는 영성이다. 그들의 신학적 견해와 정치적 견해는 이런 영성에서 필연적으로 결론된 것이다. 영적체험이 지성을 충동하여 인간적 반성과 소위 학문적 분석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실천하는 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것이다. 기초의 성격을 지닌 영적체험과 신학적 내지 학문적 견해라는 두 요소는 서로 보충역할을 하여 한 단위활력을 이룬다. 그러나 흔동하지는 말아야 하겠다. 만일 그들이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보다 나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응당해주려고 노력한다고만 하면 그들을 반대하는 논평의 권리를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재 그들이 내놓은 그대로의 신학적 결론들이 과연 보다 인간적이고 보다 형제적인 세계로 향한 소망을 보다 적절한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길을 열어줄 것인가 하는 질문도 타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어떠한 신학이든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제 근본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요청되는 만큼의 수정은 수시로 받아들여야 한다.

2. 신학의 새로운 형태와 그 난관

가. 문제의 신학자들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억눌린 사람들의 억압상태에서 출발하여 자유를 희구한다. 인류의 이같은 역사적 상황을 변화불능의 상태로 볼 수는 없다. 역사라는 것은 실제로 ‘창조적’ 발전으로서, 존재 각 분야에서 보다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되어가고 마침내는 ‘새 인간’이 출현하도록 되어있다고 한다. 비인간적 상황들의 변화 속에 하느님의 요청과 뜻이 내포되어있다. 당신의 구원사업으로 인간들을 온갖 형태의 죄악에서 해방시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제적 인류가정의 새로운 기초를 놓아주셨다고 본다.

문제의 신학자들이 기점으로 삼는 이같은 견해는 그들에게 신학의 특수형태, 어느 정도로 새로운 형태를 제공한다. 하느님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당신의 신비를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신자는 구체적 상황과 역사적 발전과정에 깊이 파고들수록 더욱 올바로 하느님 말씀에 응답하게 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원의 신적 역사와 사람들의 권리와 권리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의 인간역사와의 깊은 일치성을 더욱 명백히 깨닫는다. 세속 역사와 구원의 역사를 단순하게 동일시하지는 않지만 이 두 역사의 관계를 ‘일치’(unitas)라는 단어로 알아듣는다. 인간역사와 구원은 서로 무관한 것이라고 전제하는 이원론적 뜻으로 서로 구별 짓는 상위성은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활동은 역사 속에서 보다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하는 한, 바로 이 때문에 새로운 가치, 진정한 신학적 가치를 얻게 된다. 정의로운 사회의 도래는 사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는 것(anticipatio)이라고 이해한다(사목헌장, 39항의 ‘새 땅과 새 하늘’ 이란 표현을 인용한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신앙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내지 정치적 질서를 변화시키고 쇄신하는 역사적 실천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큰 가치의 많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신자들은 구원에로의 자기성소(사목현장, 10.11.57.59.61항; 선교교령, 8항; 민족들의 발전, 15-16항)를 보다 완전하게 연합적으로 알아들어야 하겠다. 의심없이 성경에 나타난 뭇대로의 신앙은 행동화될 때에 비로소 그 풍요성과 완전성에 도달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그 나름대로(사목헌장, 22.26.38.41.57항; 종교자유선언, 12항) 성신께서 세계역사 속에 활동하시고, 교회 밖에서도 볼 수 있도록 어느 정도까지는 신앙의 전제단계, 즉 하느님께 관한 진리와 규범, 공익과 같은, 건전한 지성이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은 알려주시며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기초를 이룬다고 하였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DS 3005).

그러나 여러 신학논문 속에서는 이상의 기초요소들이 너무 일방적으로 (unilateraliter) 해석되고 있다. 그 때문에 반대에 부딪친다. 사실은 세속역사와 예수의 복음을 동일시할 정도로 세계역사와 구원의 역사 사이의 일치(unitas)를 주장할 수는 없다. 이것은 초자연 질서의 신비로서 다른 어느 현실(realitas)과도 일치시킬 수 없는, 인간지성을 온전히 초월하는 현실이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DS 3005). 또한 교회와 세속의 한계를 전혀 없앨 수도 없다. 역사적으로 현존하는 세속은 그 속에서 구원의 신적 계획이 전개되는 장소임에 틀림없으나 하느님 말씀의 능력과 활동이 사회적 내지 정치적 발전을 증진시키는 데에만 한정시킬 정도에는 이를 수 없다. 따라서 신앙의 실천(praxis fidei)을 인간사회 개선을 위한 노력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실제로 신앙의 실천은 불의의 고발과 함께 양심형성, 마음의 회개, 온갖 우상숭배에 반대되는 참 하느님 숭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숭배 등을 같이 내포한다. 따라서 실천적 신앙을 마치 인간의 온갖 활동을 전체적 내지 극단적(totalitarie et radicaliter) 방법으로 포괄하고 지배하는 정치적 임무와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나. 여기서 두 가지 점을 밝혀두어야 한다.

(1) 일반적으로 힘의 대립을 동반하는 정치 분쟁이라 해도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고유결실이요 대상인 평화와 화해를 도외시하거나 없애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말아야 한다.

(2) 또 한 가지 명백히 밝혀두어야 할 일은, 그리스도신자에게 있어서 ‘정치적 요소’가 전생활의 마지막 의의를 부여할 만큼 절대적 가치가 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신자 생활 안에서 정치적 요소는 절대적 것이 못되고 오직 봉사를 위한 도구의 성격밖에 지니지 못한다. 이 원리를 잊어버리는 까닭에 인간 자유 위에 전제정권 (regimen dictatoriale) 도래를 촉진시키는 운동에 가담할 위험을 부과시킨다. 또 한편 신학자체가 어느 정도 실천과 관계 지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그 뛰어난 사명은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탐구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어떤 모양으로 실천에 옮겨지든 간에 신학은 스스로 구체적 조건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구체적 조건들은 거의 언제나 행동 질서에 있어서 온갖 억압과 강제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신앙과 도덕에 관한 가톨릭교의의 원리들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유를 잃을 위험 없이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스스로의 행동방법을 판단할 수 있는 빛을 제공한다. 이같은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신학이 진리에 부합할 수 있고 최고권위를 안전하게 보존하며 하느님 말씀의 특수성격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히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교를 일방적(unilateraliter) 으로 보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이런 일방적 견해는 그리스도론, 교회론, 구원의 개념자체, 그리스도교적 존재, 신학의 고유임무 등 전반에 긍해서 형성될지도 모른다.

다. 불의에 대한 예언적 고발과 가난한 사람들 편이 되라는 호소는, 일정한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되고 사회적 내지 정치적 일정한 조건하에서 결정된 극히 복합적인 상황에 관한 것이다. 시대상황에 관해서 내려지는 예언적 판단은 확실한 표준의 기술적 적응없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그런데 해방신학의 이론들은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사회학 이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신학은 본래 자체의 신학원리에서 정치활동에 관한 구체적 규범을 제시할 능력이 없다(incapax). 따라서 신학자도 사회학 분야의 분쟁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따라서 보다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해보겠다는 의도에서 형성된 신학이론도 사회학적 이론에 부딪힐 경우에 그 이론이용에 수반되는 위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각 경우마다 그 이론의 확실성 정도를 세밀히 검토해야 한다. 실제로 그 이론들은 가끔 추리에 불과하고 표면적 혹은 잠재적 이데올로기 요소들을 내포하거나 아직 논쟁 중에 있는 철학적 전제나 그릇된 인간관에 바탕을 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예컨대 대부분의 사회학적 분석이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런 종류의 이론이나 분석에 바탕을 둔 사람이라면 신학자들이 거기에 가담했다고 해서 그 이론과 분석이 더 확실해졌다고는 생각치 말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신학은 사회 현실에 대해서 학적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어떠한 사회학적 분석에도 쉽사리 동조해서는 안 될 일이다.

3. 성서신학적 관점

문제의 신학자들이 자주 성서를 인용하고 있으므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구원과 인간복지 내지 인권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깊이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비로소 연구대상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대 개념들을 성서에 적용해버리는 시대착오는 피해야 한다.

가. 구약성서

오늘날 하느님의 구원과 인간발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서 언제나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과연 에집트에서의 탈출(출애 1-24장)은, 구약에 있어서 구원의 주요사건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외국지배와 강제노동에서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그 백성을 에집트에서 밖으로 끌어내고 귀양살이에서 다시 이끌어내는 것에 해방 전체를 국한시키지 않는다. 이 해방은 시나이 산에서 거행된 계약의 숭배를 위한 것(출애 24장)이었다.

이같은 목적성을 도외시한다면 그 해방의 본뜻은 없어지고 만다. 또한 시편 著저자도 불행, 한탄, 감사, 도움 등에 관한 노래 중에서 언제나 종교적 구원과 해방을 희구하는 기도의 형태를 취했다(시 18). 불행과 극도로 가난한 사회조건이 동일시되지 않을 뿐더러, 동시에 원수관계, 죄, 불의, 죄에서의 결과, 죽음의 위협, 죽음과 더불어 열리는 소망 등을 말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요청되는 필요의 대상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된다. 가장 뛰어나는 요소는 하느님께만 기대하는 능력으로 얻어지는 구원과 치유의 체험이다. 이런 종류의 구원을 두고 인간적 행복이나 인권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사회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뿐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신학적 검토를 해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에집트에서 나오는 전 여정에 있어서 하느님 친히 당신 백성의 해방과 영적 정화를 시켜주셨던 것이다.

하느님 계시에 바탕을 두고 인간존재의 환경을 개선해 보려던 인상 깊은 예는 사회 환경을 꾸짖는 예언자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그 누구보다도 아모스를 들 수 있다 (2,6 이하; 3,10; 5,11; 6,4 이하; 8,4 이하). 다른 예언자들도 아모스의 초기주제를 계속 재강조하며 발전시켜 나간다. 예컨대 대지주를 책한 일(이사 5,8; 미케 2) 같은 것이다. 호세아는 동시대 인간들이 연대성을 모른다고 엄히 책한다(4,1 이하; 6,4와 6;10,12). 이사야는 보호대상자를 열거하고 과부와 고아들을(1,17과 23;10,1 이하) 보호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의 “강하고 능한 자,” 즉 사회의 고위 지도자들을 없애리라고 위협한다(3,1 이하; 1,21 이하; 10,1 이하). 그는 또 재화가 소수의 손아귀에 들어있다고 한탄하고(5,8), 일반적으로 부자들 때문에 희생당하는 가난한 이들이 겪고 있는 억압상태를 한탄하였다(1,21 이하; 3,14 이하). 그러나 구약성서에 이런 주제들이 나타난다(판관 9,22 이하; 1열왕 12)해도 탄압하는 사람들에게 반항하라는 선동은 전혀 배제되어 있다. 임박하는 파멸이 예고되지만 그것이 보다 정의로운 사회건설 계획은 될 수 없다(요엘 3,1 이하).

예언자들의 생각으로는 사회악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고쳐진다. 그러나 그들은 과연 인간이 현재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할 능력을 갖추었는가 하는 데에 대해서 몹시 회의적이었다. 이것은 분명 역사신학에 바탕을 둔 일부 사람들이 믿는 것 같은 낙관주의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언자들이 사회개선의 전제조건으로서 회개와 정의의 태도를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악한 행실을 버려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주어라”(이사 1,16 이하). 그뿐만 아니라 사회관계에 보다 큰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그런 가능성을 내려주셔야 한다. 마침내 하느님 홀로 인간들에게, 특히 억눌린 인간들에게 참 권리와 참 행복을 효과적으로 마련해주실 수 있다(이사 1,24 이하; 출애 3,7-9; 시 103,6; 72,12 이하; 신명 10,17 이하).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선행과 악행을 초월해서 구원을 이룩하신다.

이 점에 있어서 예언자들은 ‘잘못된 구조=체제’같은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는 하였으나, 악이란 곧 사회구조의 표식과 결과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든가, 소유권의 현재형태만 없애면 온갖 남용이 자동적으로 제거될 수 있다고는 이해하지 않았다. 또한 개인적 요소도 염두에 넣어야 할 것이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해방여부가 개인적 요소에 달려있으며 개인의 책임이 무엇보다 앞서 밝혀지고 강조되고 있다(에제 18; 예레 31,29).

구약성서의 여러 중요한 부분에 새로운 사회건설의 전망이 나타나 있다. 새로운 사회는 당시 도처에서 발견되던 그런 구조나 체제에 따라 조직되지 않은 사회라고 소개된다(이사 55,3-5; 에제 34;40,48; 예레 31,31 이하). 시편 저자들은 명백히 하느님을 억눌린 이들의 해방자, 가난한 이들의 변호자(9.10.40.72.76.146편, 유딧 9,11)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에서 해방시키실 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억누르는 온갖 억압을 그만두라고 그들에게 요구하셨다(출애 22,10; 레위 19,13.18과 33; 신명 10,18; 24,14; 시 82,2-4). 마지막으로 반드시 와야 할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온갖 지배를 없앨 것이라고 되어있다. 이런 사회에 대한 희망은 전 구약시대를 통하여 구체적 역사와 충분히 구별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모든 현실을 초월하는 절대적 나라임을 몰랐다. 오늘날까지도 ‘속화된’ 구원관을 주장하는 수많은 이데올로기가 이런 하느님의 약속이 역사와 인간 활동의 범위 내에서 실현되리라고 믿고 기다린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이런 사상은 구약성서에서 배제되고 있다.

마침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약의 마지막 묵시적 경전은 현대를 초월하는 저 세상의 내생(vita futura)에 희망을 결었고, 역사신학은 인간의 무력과 하느님의 전능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 신약성서

신약성서는 구약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얼마간 인용하거나(이사 61,1과 루가 4, 16-17) 혹은 전제하고(마태 12,29-30과 레위 19,18) 있다. 행복에 관한 설교(마태 5, 1-7, 29 특히 5,3-12)는 온전히 특수한 방법으로, 마치 구약성서가 인간 마음의 회개와 쇄신을 요구한 것같이, 오히려 더 강하게 그것을 재강조하고 신약에 있어서는 성신의 힘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미 여러 기회에 언급한 바이지만- 신약성서는 사회현실과 인간의 집단생활에 관해서 관심을 덜 표명하는 듯 한 인상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금시초문인 새로운 복음은 시초에 있어서 아마도 현세생활에 대한 관심을 퍽으나 희박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새 백성 가운데 내림하신 하느님의 위격적 사랑의 초절적 중요성이 현세적 문제들을 2차적인 것으로 몰아붙이는 듯 한 느낌을 주었다(예 : 하느님 나라의 박두라는 주제).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신비에서 발사되는 빛 때문에 인간적 요망은 그리 급한 것이 못된다고 여겨졌다. 또 한편 로마제국의 정치적 상황이 그리스도신자들로 하여금 현세에 큰 관심을 기울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새 복음과 신약의 윤리가 사회평가를 활성화하기에 적합한 많은 규범과 생활의 표본을 가져왔다는 것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원수 사랑의 계명(루가 6,35; 마태 25,31-46), 부자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 관한 사건들과 위협(루가 6,24 이하; 마태 6,24; 1고린 11,20 이하; 야곱 2,1 이하; 5,1 이하),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돌볼 의무(루가 6,20; 1고린 12,22 이하), 아무 차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이웃을 도와주라는 계명(마르 10,21; 루가 12,33)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배격함(마르 10,42-45; 마태 20,25-28; 루가 22,25-27) 인간들의 보편적 형제애(마태 23,8; 25,41 이하) 같은 것만 생각하면 넉넉하다.

신약성서는 또한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실천을 위한 제도적 형태를 취하도록 신자들에게 권장한다. 그 예는 예루살렘에 보내기 위한 조직적 모금이다(2 고린 8,1 이하). 또한 부제들을 세워 자선사업을 하게 한 것도 마찬가지다(1고린 12,28; 15,15; 로마 12,7; 16,1; 필립 1,1; 1디모 3,8과 12). 그러나 적어도 시초에는 이런 자선제도가 신자공동체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 크게 발전하지 못 하였다.

해방분야에 있어서 신약성서는 검토의 대상이 될 만한 한 가지 중요한 다른 요소를 제공한다. 이로써 해방(liberatio)을 어떤 뜻으로 알아들었는지가 밝혀질 것이므로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아야 하겠다. 예를 들면 사도 바오로가 새 자유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은 의화(iustificatio)의 선포와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해방 그 자체로서는 다른 주제들을 떠나서 별도의 주제를 이루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은 인간 마음의 내면 깊은 곳을 열어놓았다. 따라서 참 자유의 부정과 인간의 참 예속의 뜻을 잘못 오해하기 쉽다. 의화의 복음을 깊이 살펴보면 인간은 악한 세력에 속박되어 있다. 죽음과 없어질 것, 죄의 세력, 율법(현세적 요소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등에서의 해방이 선행되지 않으면(로마 5-7장) 아무도 진정하고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갈라 5,1). 의심없이 여기에 하느님께서 전인류 역사를 심판하실 때 의인들에게 선물로 주실 자유의 시작 (anticipatio)이 있다. 하느님의 정의는 성신과 그 능력을 통하여 우리에게 解放 운동을 가능케 해주신다. 이로써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고, 이 운동은 사랑 에서 그 최고완성을 얻는다. 그러므로 신약성서가 ‘자유를 주는 해방’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은총이요, 윤리적 충동이며 종말적 언약으로서 이러한 표현들이 의화의 선포 속에 포함되었고, 따라서 자유는 의화에 바탕을 두고 거기서 모든 힘과 권위가 흘러나온다. 사물을 이런 깊은 수준에서 관찰할 때에 비로소 신자들이 신약성서 안에서 해방운동을 위하여 발견하는 활력을 이해할 수 있고 길러갈 수 있다.

신약성서의 빛으로 관찰하면 인간과 하느님, 인간과 인간의 화해 없이는 사회의 참 변혁이란 있을 수 없다. 인간들이 화해와 정의로써 ‘새 피조물’이 되어야만 비로소 인간생활이 충분하고 항구한 방법으로 개선되어질 수 있다. 인권, 복지, 인간해방 등은 소유할(habendi) 대상이 아니고 근원적으로 존재양식(essendi)이란 범위 내부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서 인간존재의 온갖 조건의 개혁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4. 체계적 신학적 고찰

가. 해방자로서의 하느님과 인간의 해방운동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해방에 관한 구약성서의 표현들이 신약의 쇄신된 상황 속에서, 모든 입장에서 모두 맞는 말일 수는 없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계시는 구원의 계속적 역사과정을 약속의 시대와 실현의 시대로 구분한다. 이 두 계약을 결합시키는 요인은 최상주시요 지극히 자유로우신 하느님 홀로 인간들의 복지를 섭리해주신다는 보증이다. 그분 홀로 참뜻의 해방자이시다. 분명 신앙의 이같은 주장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해방 요청이 경제적 물질적 어려움에서 뿐 아니라 위험과 상실의 조건까지를 합한 전체적 상황에서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 홀로 참으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탄한 주장을 미신적인 것으로(Deus ex machina) 알아들어서는 안된다. 미신을 숭상한다면 오히려 불행 속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무력성과 비활동성과 무감각성을 더욱 부채질하는 셈일 것이다. 진정한 신앙의 입장에서 보면 비인간적 조건을 앞에서 책임을 변할 수도 없거니와 공범의 책임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혁명의 소요 속에 개입하시지 않는다. 다만 당신 은총으로 인간들의 정신 과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 산 신앙의 힘으로 보다 정의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데 노력하도록 양심을 통하여 밀어주신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키 위하여 전인적으로 온갖 악의 권세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 효과적인 회개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쇄신이야말로 실제로 해방되기 위한 필요요소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신앙에 따라 완전한 해방은 현재 사건들의 진행과정에서 즉 역사 속에서는 완성될 수 없다. 그것은 ‘새 땅’과 ‘하느님의 도시’에서만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그 동안에는 온갖 해방운동도 일시적 성격을 띠었으며 최후심판 때의 상벌의 대상이 될 것 이다.

우리의 고찰은 정신적 쇄신과 개인적인 구호활동에만 국한시킬 수 없다. “일정한 제도의 형태를 취한 불의”의 경우도 고찰해야 한다. 이것이 지배하는 동안 그 상황 자체가 정의의 발전과 개혁을 요구한다. 현대인들은 사회구조가 자연스럽다거나, 이런 상태가 하느님의 뜻이라거나, 어떤 진화의 무명법칙의 결과라고는 이제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신자라면 사회제도는 사회의식의 소산이며 윤리적 책임의 대상이라고 항상 생각해야 한다. 성경상의 죄라는 말이 인간자유의 개인적이고 고의적인 (expressa) 결정을 뜻하는 한, 의심없이 우리는 ‘제도적 죄’라든가 ‘죄스러운 구조’라는 말을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죄 때문에 멸시와 불의가 사회 정치구조 속에서 잠동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마 말한대로 개선의 노력은 불의한 상황과 구조에도 미쳐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의식을 가지게 된다. 과거에는 여기에 관한 책임감을 오늘과 같이 명백하게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의라는 말은 모든 사람들의 동등한 품위 의 기본적 인정, 행복한 발전, 본질적 인권옹호(정의평화위원회: 교회와 인권 참조), 주요 생활필수품의 공평한 분배 등을 뜻한다.

나. 인간적 발전과 하느님께로부터 온 구원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과 인간의 해방운동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려면 먼저 인 간발전과 구원, 현세 건설과 종말론적 건설과의 관계를 보다 정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고찰해온 내용에서 결론지을 수 있듯이, 우선 인간활동과 그리스도교적 희망과의 관계의 올바른 개념을 가져야 하겠다. 마치 한편으로 현 지상 세계만 존재하고 다른 편으로 현세와 전혀 상관없는 후세만이 존재한다는 식으로 이 두가지를 온전히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의 지배와 세계건설의 인간활동이 그 진행과정에서 온전히 통일한 것이라고 보는 ‘진화론적 낙관주의’도 피해야 한다.

사목헌장 자체도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 인간발전, 신화작용과 인간화작용, 하느님 은총의 질서와 인간활동의 질서(38.39.40.42.43.58항; 평신도교령, 7항)의 구별을 짓고 있다. 비록 그에 앞서 두 질서에 서로 이바지하는 요소들을 취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상에서의 인간을 봉사는 ‘하늘나라의 재료’를 준비한다(사목헌장, 38항).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는 우리 활동의 좋은 결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온갖 결함을 씻어버리고, 빛을 받고 변형된 모습으로 남게 된다. 즉 사랑만이 남는 것이(l고린 13,8) 아니라 사랑의 업적까지 남는다(사목헌장, 39항).

종말론적 희망은 속세생활의 구조를 통해서도 표현되어야 한다(사목헌장, 35항) 그렇기 때문에 공의회는 현세의 여정이란 특성뿐 아니라 그 변형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사목헌장, 38.39항). 지상국가와 천상국가가 신앙의 지도를 받아 서로 결부된다. 그 둘의 구별도 존중하면서 동시에 일치의 조화를 이룬다(사목헌장, 36항). 이러한 교리는 평신도사도직 교령에서도 재론된다. “그리스도의 구원성업은 본래 사람들을 구원할 목적을 가졌지만, 현세질서를 개선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은총을 사람들에게 전할 뿐 아니라, 현세질서에 복음정신을 침투시켜 현세질서를 완성하는 그것이다. 영적질서와 현세질서는 비록 서로 구별되지만, 하느님의 한 계획 속에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하느님께서는 전우주를 그리스도 안에 새로 창조하실 계획이시며 이 새로운 창조는 이 지상에서 시작하시어 마지막 날에 완성하실 것이다”

이 문헌으로 보아 우리는 정의를 위한 투쟁과 현세개선에의 참여를 ‘신앙선포의 한가지 구성요소’로 보아야 한다(1971년 주교시노드, 세계 정의에 관한 문헌 서론). ‘구성요소’(constitutivum)라는 이 표현은 아직도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보다 정확한 해석을 요구한다. 이 표현의 엄격한 뜻을 찾는다면 본질적(essentia1e)이 아닌 보충적(integrans) 요소라는 말이다(1974년 시노드 해석). 일반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은 남용된 이분법을 배격하면서 현세건설의 인간 노력과 종말론적 구원의 조화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해석이 통상적 해석이다.

오늘날 이 두 대상의 일치성을 강조하면서도 오히려 양자의 상위성을 더욱 확실하고 엄격하게 분별할 필요가 있다. 현세상황이 선의의 적극적 변혁을 반대하는 저항 자체와 죄의 세력과 인간 발전의 이중적 결과(평신도교령, 7항) 등은 구원역사의 일치 속에서까지 하느님 나라와 인간발전 사이에 항존하는 상위성을 명백히 인정하고 참된 구원운동의 필수조건인 십자가의 신비를(사목헌장, 22.78항) 인정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런 상위성을 밝혀놓는다면 -다른 편으로 이 두 대상을 연결시키는 매듭을 잊지 않는다면-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이원론’(dualismus)은 모두 배제될 것이다. 반대로, 이렇게 완전한 이해를 갖춘다면 오히려 더 큰 인내와 항구와 신뢰로써 선익 및 정의촉진의 의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며, 노력이 아무 결실을 못 거두었을 경우에 생길 수도 있는 실망을 방지할 능력을 보장 받을 수 있다.

이같은 결부의 일치성과 인간발전과 그리스도교적 구원과를 구별지어주는 상위성은 그 구체적 형태에 있어서 확실히 새로운 탐구와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신학이 수락해야 할 임무 중의 하나이다. 문제된 이 일치성의 근본 성격이 말하자면 현실 중심에 뿌리박혀 있으므로 이를 모르는 체 할 수는 없다.

한편으로 구체적 역사는 거기서 이 세상이 하느님의 신비에 정할 정도로 변혁되는 자리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과 그 결실이 ‘남는다.’ 이것이 현세적 행복과 권리를 구원에 결부시키는 요소를 인정할 수 있는 마지막 이유이다. 그러나 종말의 도래가 구체적 역사를 제거하고 지나가게 하느니 만큼 완전한 일치는 성립될 수 없다.

또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를 지배하며 절대적으로 온갖 지상실현의 가능성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업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아무리 완전하게 발전했다고 인정하더라도,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의 관계를 끊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개인의 역사 속에서 이같은 불연속성은 죽음으로 절감하게 되고, 변화라고 보면 그것은 전 역사에 걸쳐 현세의 ‘멸망’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두개의 혼동할 수 없는 원리 속에 나타난 변증법은 해결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나그네’(viator) 상태에 있는 한, 현세생활에서 없앨 수도 없고 없애서도 안된다. 아직 기다림의 대상인 종말론적 완성이 바로, 왜 우리가 하느님 나라와 역사와의 관계를 일원론적으로도 이원론적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가 하는 그 이유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계의 정의는 본질상 보유된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또 한편 종말론적 구원의 선포와 역사적 시간으로 따진 미래의 건설이란 관계도 그 조화와 상위성을 도외시하고 일선상(in linea unica)의 진행같이 일의적(univoce)으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아마 이런 뜻으로 성 루가 복음의 말씀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17,20-21). 사목헌장은 역사와 구원과의 이 근본관계의 또 한가지 결론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땅과 인류의 완성시기를 알지 못한다. 우주변혁의 방법도 모른다. 죄로 이즈러진 현세의 모습은 분명 지나간다”(39항).

이것은 확실히 계시의 주요 사건들을 통해서 얻어진 우리 문제의 형식적 (formale) 해답이다. 그러나 이 관계의 구체적 진행과정에 있어서 이 관계가 구체적 현실에 적용될 때 서로 다른 여러 국부적 형태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알아듣게 될 것이다. 역사과정에서 이 해답의 올바른 적용 방법을 택하려면 구세계, 신세계, 제삼세계에서 서로 다른 방법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 구라파와 북미같이 이윤에 자극을 받아 공업발전에 진보한 나라들에 적용되는 것이 인구의 대부분이 빈곤에 허덕이는 대륙에서는 같은 효력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정도의 차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위에서 확인된 인간발전과 그리스도교적 구원과의 근본관계를 무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 모호하지 않고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하느님 예배, 기도, 성체와 다른 성사, 개인윤리, 죽음과 영생 같은 종말의 문제, 역사 속에서 어두움의 세력을 거스려 수행해야 할 힘겨운 투쟁(사목헌장, 37항) 등을 뒷전에 몰아붙일 정도로 사회적 내지 정치적 해방운동을 특권적 위치에 올려놓는다면 위에서 말한 인간발전과 구원과의 근본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죄와 불의의 상황에 있어서 신앙의 진리를 때에 맞추어 선언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이런 방법으로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옹호하며 가끔 들려오는 비판도 제거할 수 있다. 흔히 교회는 사람들의 불행을 베일로 가리어 버린다거니, 가난한 사람들을 그들의 곤궁한 상태에 잠재우고 있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참된 원조를 제공하는 것과 고통감을 경감시키는 데에 국한시켜 거짓 위안의 희망만을 북돋아주는 것은 전혀 다른 두가지 일이다.

다. 인간발전과 구원과의 관계와 교회의 사명

교회가 현 시점에서 증거를 보여주어야 할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교회공동체는 일정한 정치적 선택이 이루어진 구체적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는 아주 특수한 공동체를 이룰 수밖에 없다. 교회는 일정한 이데올로기의 지배 속에서 이런 혹 저런 구체적 방법으로 권력이 실제로 행사되고 있거나 권력을 쟁취하려는 후보자들이 경쟁하고 있는 시합장에 계속 살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기원상으로 보나, 초자연적 그 성격으로 보나, 종교적 그 사명으로 보나, 종말론적 그 희망으로 보나 교회는 “어떤 민족이나 국가에도, 또 어떤 특수관습이나 고금의 어떤 생활습성에도 불가분의 배타적 관계로 얽매이지는 않는다”(사목헌장, 58.42항; 교회헌장, 9항). 교회는 다른 어떠한 사회적 체제와도 흔동될 수 없고, 또 그것과는 어떠한 불가분의 필연적 자격으로도 맺어질 수 없다. 교회는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음모에 걸려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중립적(neutrale)이고 무관심적(indifferens)인 태도만 지닐 수도, 온전히 비정치적 (apolitica) 유보태도만 보일 수도 없다. 분명 현시점에서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교회의 행동 가능성은 몹시 제한되어 가끔 다른 모양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다른 모양의 증언이라고 해서 덜 예언적일 수는 없다. 예컨대 우리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강요된 침묵 속에서 당하는 고통이 바로 그런 것이다. 교회는 정치세력들처럼 어떤 계략이나 음모를 꾸며서는 안되고 오히려 조심스럽게 자기 행동이나 침묵으로 야기될 정치적 변화를 미리 내다보아야 한다. 때로는 가난한 사람, 억눌린 사람, 불의의 희생자들의 상황을 고발하지 않거나 더구나 이런 상태를 덮어두거나 간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공범자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본받아 교회는 신앙의 빛으로 사회 현실을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양심을 세련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성을 유지해야 하며 그 범위는 정신적 심리적 물질적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포용해야 한다. 이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장해주는 효과적 구제사업은 분명 옛날부터 교회와 신자들의 주요임무 중 하나였다. 오늘에 와서 이런 활동은 산 신앙의 보다 빛나는 증거가 되었고 교회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 신빙성 판별의 명백한 표준이 된다.

사회적 내지 정치적 현세질서의 건설과 개선은 분명 평신도들에게 특별히 맡겨져있다(평신도교령, 7항, 교회헌장, 31.37항; 사목헌장, 43항). 그러나 온 교회가 -주로 교황, 주교, 사제, 부제들의 봉사로 대표되는-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인권이 짓밟히고 있을 때 침묵을 지킬 권리는 갖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고 보면 교회는 전체적으로 너무 늦지 않게 힘있게 자신의 의견을 표시할 책임을 질 수 있다. 또 한편 많은 특수환경 속에서 그리스도신자는 공동목표 추구의 여러가지 방법 중에서 어느 한가지를 자유로이 선택하여 행동할 권리를 누린다(사목헌장 43항에 긴 설명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정치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 신자들 가운데서 생기는 논쟁을 온전히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얼핏 보아 서로 대립되는 듯한 교우들에게 교회는 서로의 입장과 서로의 행동 동기를 이해하도록 요구한다”(노동헌장 반포 80주년, 50항). 각자의 개인적 선택을 포기하는 일 없이도 공동목표를 실현시키는 데에 공헌하기로 노력하며 자신의 제안을 진술하며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을 것이다. 사고방식의 다양성 가운데서 신자라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공리를 잊지 않을 것이니, “신자들을 갈라놓는 요인보다 신자들을 일치시키는 요인이 훨씬 강한 것이다”(사목헌장, 92항).

그와는 달리 만일에도 사회계층 사이에 존재하는 불화가 ‘계급투쟁’ 조직에 흡수된다면 교회의 일치는 중대한 위험을 당하게 된다. 계급들 사이에 불평등이 있는 곳에서 어느 정도의 긴장까지 온전히 피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리스도신자는 이런 분쟁을 해결하는 그 방법에서 구별지어진다. 신자는 폭력을 거스려 폭력에 호소하지 않고, 의식개발, 의견교환, 폭력 아닌 운동에의 협조 등 다른 방법으로 상황의 변화를 얻으려고 힘쓴다(여기서 폭력이나 힘에 관계 되는 더 많은 문제들을 더 깊이 고찰할 수는 없다).

또한 신자라면 화해라는 가장 중요한 지침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사회적 내지 정치적 대립이 뜻하지 않게도, 예컨대 서로 다른 정치견해 때문에 투쟁하는 신자들끼리 그 이유 때문에 함께 미사도 봉헌하지 않거나 서로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는 것은 피해야 한다. 정치적 대립이 부자들과 탄압자들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할 구원의 그리스도교적 선교의 보편성까지를 위태롭게 할 정도로 싸울 권리는 주지 않는다. 교회는 그 사랑의 대상에서 아무도 배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치요인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도록 계속 세심한 심려를 기울여야 하겠다. 다른 정치견해를 전혀 용납하지 않는 배타적 정치선택은 폭군화할 뿐 아니라 정치의 본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독재정권이 혼자서 배타적으로 모든 사람의 각 분야를 다스린다고 주장하며 전제적 보복을 강행할 때 교회는 그것을 반대해야 할 거부치 못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분명 이러한 환경 속에서 가끔 교회는 공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알리기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교회는 주님의 모범을 따라 용감하게 권력의 남용을 반대하든지, 혹은 침묵의 고통을 당하든지, 흑은 온갖 형태의 순교를 하든지, 보다 고차원적 방법으로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해방은 이같은 극단적 상황 속에서 아무런 장애도 받을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최고 위안이요 우리 신뢰의 중심 기둥인 것이다.

결 론

이런 문제들의 고찰을 통하여 가톨릭교회의 품안에는 여러 지역교회들의 서로 다른 상황이 있다는 사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다양성 자체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불평등의 무게가 우리의 공통신앙의 일치와 중심을 이루는 요소에 있어서까지 긴장과 분열을 극복할 수 없는 것같이 짓누르는 경우가 있다. 국제신학위원회 안에서 이루어진 토론과 연구는 여러 민족의 상황이 얼마나 서로 다른 것인가도 명백히 밝혀놓았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아무도 자기자신만을 위해서 말하지 않는다. 형제들이 지구 그 어느 구석에서 외치든지 그들의 울부짖음에 모든 이가 귀를 기울여야 한다. 불의하게 학대를 받거나, 고통에 억눌려 있거니, 가난에 허덕이거나 기아에 못이기는 형제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서로 남에게 배워야 하겠다. 교회와 사회의 역사 과정에서 남들이 무수한 고통의 대가를 치르며 실현시켜 보았던 그릇된 해결책을 우리만은 비록 새로운 형태를 취해서라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배워야 하겠다. 문제해결을 위해 정치적 차원을 극구 찬양한 실패의 실례 등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이러한 노력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받아 일치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를 구성하는 여러 민족의 다양성과 인간적 문명수준의 다양성 가운데서 유지되는 교회의 단일성과 보편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요구인 것이다.

수고로이 얻은 것인 만큼 그것을 경솔함으로 위태롭게 해서는 안된다. 이 원칙은 그 무엇보다도 특별히 인간발전과 그리스도교적 구원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들에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다.

(역자 : 김남수. 수원교구장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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