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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th and Inculturation

신앙과 토착화

 

〔국제 신학위원회는 1987년 12월 총회 중에 신앙과 토착화에 관한 이 문서를 준비한 다음 1988년 10월의 회의에서 그것을 인준했다. 그리하여 이제 위원회의 의장인 라칭거 추기경의 발언을 받아 공개되었다. 교황청 문화위원회와 공동으로 특별히 연구된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자연 본성과 문화 및 은총에 관한 연구, 구원 역사 안에서의 토착화, 토착화의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서 문

1. 국제 신학위원회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신앙과 문화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1) 1984년 국제 신학위원회는 1985년의 특별 시노드를 위해서 마련한 교회의 신비에 대한 연구에서 신앙의 토착화에 대하여 직접 언급했다.2) 한편 교황청 성서위원회는 성서에 비추어 본 신앙의 토착화3)란 주제에 대하여 1979년의 총회에서 다루었다.

2. 오늘날 국제 신학위원회는 신앙의 토착화에 대한 이 주제가 특별히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과 교회의 교도권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이 주제를 다루어 온 그 열성 때문에 보다 더 깊고 보다 더 체계적인 방법으로 이 연구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3. 그 연구의 기초는 공의회 문헌들과 그 문헌들을 발전시킨 시노드의 텍스트가 제공한다.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 안에서 공의회는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체험한 최초의 토착화 경험에서 교회가 어떠한 교훈과 어떠한 정표를 끌어냈는지 보여 주었다.4) 그리고 공의회는 문화의 발전에 대하여(de culturae progressu rite promovendo) 이 문서의 한 장 전체를 할애했다.5) 공의회는 문화를 보다 더 인간적이고 보다 더 좋은 세계 건설을 위한 노력이라고 서술한 다음 문화와 구원의 메시지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길게 다루었다. 그리고는 이어 문화와 관련해서 그리스도교인들의 가장 절실한 의무들 가운데 몇 가지를 발표했다. 즉 모든 사람들의 문화에 대한 권리 옹호, 완전한 문화의 발전, 문화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관계 조화이다. 교회의 선교 활동에 대한 교령과 비그리스도교 종교들에 관한 선언은 이러한 방향 가운데 몇 가지를 다시 채택했다. 2차례의 정기 시노드가 문화의 복음화를 분명하게 다루었다. 1974년의 시노드는 복음화에 대해 다루었고6) 1976년의 시노드는 교리교육에 대하여 다루었다.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20주년에 개최되었던 1985년의 시노드는 토착화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 합류됨으로 인한 진정한 문화적 가치의 내적 변화와 여러 가지 인간 문화 안에 내리게 되는 그리스도교의 뿌리”8) 라고 말했다.

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특별한 방식으로 복음화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즉 그의 눈에는 교회와 문화들의 대화가 세상이나 교회의 장래를 위하여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이었다. 교황은 이 커다란 사업에서 당신을 도울 수 있도록 하나의 특별한 교황청 조직 즉 교황청 문화위원회9)를 창설했다. 국제 신학위원회가 오늘 신학의 토착화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게 된 것도 바로 이 기구와 함께 한 것이다.

5. “말씀의 강생 (incarnation)은 또한 문화의 강생(육화 : 肉化)이다.”라는 확신에 의거하여 교황께서는 유비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비교될 수 있는 문화들이 좋은 것을 지니고 있는 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조명과 표현을 위해 적극적인 중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했다.10)

6. 이러한 관점에 대하여 두 개의 본질적인 주제가 연결된다. 우선 계시가 이야기되고 있는 곳의 문화와 관련된 계시의 초월성 문제가 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그것을 전하는 문화의 요소들에 배타적인 방식으로 연결되거나 동일화되지를 않는다. 복음은 때때로 그 복음이 자리잡은 곳에서 사고 방식의 전환이나 관습의 수정을 요구한다. 즉 문화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정화되고 복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7.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에서 두 번째의 큰 주제는 문화들의 복음화가 시급하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 일은 비판적 호의로써 특수한 문화적 동질성들을 파고들어 이해한다는 것과, 모든 문화들 가운데 인간의 고유한 진실에 일치하는 보편성의 관심 안에서 문화들 상호간의 교류를 좋게 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교황 성하께서는 교회의 교부들 이래로 그리스도교 사상 안에 깊이 뿌리박은 인간학적 개념 위에서 문화들의 복음화를 기도했다. 문화는, 그것이 올바를 때, 인간의 본질을 계시하고 강화시키기 때문에 문화의 그리스도교적 침투는 인간의 개념 안에 있는 모든 역사주의와 모든 상대주의의 초월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문화들의 복음화는 인간 자신을 위한, 자신에 대한 사랑, 특히 위협받고 있는 자가 문화와 자기 존재의 측면에서 사랑으로 영감을 얻어야 한다.11)

8. 이 가르침과 신앙의 토착화란 주제가 교회 안에 일으킨 사색에 비추어서 우리는 우선 서로 서로 관계가 있는 자연(본성), 문화, 은총이 자리잡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어서 우리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 토착화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즉 고대 이스라엘, 예수의 생애와 업적, 원시교회에서 이루어진 토착화이다. 마지막으로는 민간 신앙, 비그리스도교 종교들, 젊은 교회들 안에 있는 문화적 전통들, 현대의 다양한 특성들과 만남으로써 현재 신앙에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을 다룰 것이다.

1. 자연 본성, 문화, 은총

1. 인류학자들은 문화를 서술하거나 정의하기 위하여 때로는 상반되기까지 하는 자연 본성과 문화 사이의 구별을 기꺼이 따른다. 그렇지만 이 자연 본성이란 말의 의미는 자연과학, 철학, 신학의 여러 가지 개념들에 따라서 다양하다. 교도권은 이 말을 아주 정확한 의미로 이해한다. 즉 한 존재의 본성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향해 이끌리는 힘과 더불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다. 자연 본성들이 그들의 고유한 목적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지니게 된 것은 하느님에 의해서이다. 이때부터 자연 본성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하느님의 창조적 의도”1)를 읽을 수 있다는 표시를 지니게 된다.

2. 따라서 자연 법칙에 의해서 표현된 인간 본성의 기본적인 경향들은 창조주의 뜻을 표현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자연법은 인간 본성의 특수한 요청을 드러내며 그러한 요청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피조물 위에 당신 계획의 표시가 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 본성을 유일한 의미로 파악하여 인간을 물질적인 본성에 환원시키는 모든 오해를 무산시키는 것이다.

3. 또한 동시에 역사의 시간 안에서 인간의 구체적인 활동 전개에 따라 인간 본성을 고찰하는 것도 합당하다. 그것은 흔히 감정에 예속되어 잘못할 수 있는 자유를 타고난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으로 실행한 것이다. 새로운 세대에 전해진 이 유산은 지혜와 예술과 너그러움이란 크나큰 보화를 지니면서 동시에 상당히 많은 탈선과 사악함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인간 본성과 인간 조건에 대하여는 전체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그것은 그 중에 일부 -죄악과 은총- 가 구원의 역사에 관련된 인간의 실존적 내용을 이루는 표현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최근의 교황들이 했던 것처럼 문화란 말을 긍정적인 의미에서 –예를 들자면 발전과 같은 의미로- 우선 사용하더라도 우리는 문화가 오만과 이기주의의 선택을 지속시킬 수 있고 용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Gaudium et spes)이 특별히 가르치는 것처럼 문화는 자기 목적성의 성취로서 인간 본성의 요청을 연장시키는 데서 이해된다. “인간은 문화를 통해서만 즉 자연의 선과 가치를 캐냄으로써만 참되고 완전한 인간성에 도달한다는 것이 인격의 특정이다······문화란 광의로는 인간이 정신과 육체를 연마하고 발전시키는 데 이용하는 모든 사물을 말한다.”2) 이렇게 문화의 영역은 대단히 많다. 인간은 지식과 노동으로써 우주를 정복하려고 애쓴다. 인간은 풍속과 제도의 발전을 통하여 사회 생활을 인간화시킨다. 인간은 시대에 따라서 자신의 크나큰 소망과 위대한 영적 체험들을 드러내고, 소통하고, 결국 자신의 업적 안에 보존하며 그러한 것들이 수많은 사람들, 나아가 온 인류에게까지 봉사하도록 한다.

5. 문화의 첫째 주제는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에서 고찰된 인격 자체이다. 인간은 스스로 경작(culture)한다. - 여기에 문화의 일차적인 목적성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 문화의 업적 덕분에 그리고 문화적인 회상 덕분에 교양을 쌓는다. 또한 문화는 인간이 안에서 그리고 그 덕분에 성장할 수 있는 환경(milieu)도 가리킨다.

6. 인격은 친교적 소통의 존재 (être de communion)이다. 인간은 받음으로써 주고 성숙한다. 따라서 인격이 성장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 연대성 안에서 그리고 살아 있는 사회 관계를 통해서이다. 또한 국가, 사회, 국민 같은 설재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문화 유산과 더불어 인간 발전을 위한 “역사적 특정 환경을 이루고 거기서 문화 발전에 필요한 여러 재화를 발견하게 된다.”3)

7. 언제나 구체적이고 특수한 것이 되는 문화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상위의 가치들에 개방되어 있다. 따라서 한 문화의 독창성은 자기 자신 안에 위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선이 되는 보화를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적 다원주의는 폐쇄된 세계의 문화를 나란히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보편적인 가치를 향하고 있는 모든 설재의 교향곡에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역사에서 흔히 있었던 문화들의 상호 침투 현상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가치에 대하여는 특수 문화들이 기본적으로 개방되어 있고, 그로 인해 그 특수 문화들이 서로서로 개방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8. 인간은 자연 본성으로 종교적인 존재이다. 절대자에게로 향하는 것은 인간 존재 깊숙이 새겨져 있다. 넓은 의미에서 종교는 문화의 내적 요소(partie intégrante)이며 거기에서 뿌리를 내리고 거기에서 피어난다. 또한 위대한 문화들은 모두가 수천년의 문화 역사를 표시하고 있는 위대한 영감의 성취로서 종교적인 차원을 구성하는 건물의 천정 열쇠가 되었다.

9. 위대한 종교들의 뿌리에는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상승 운동이 있다. 이 운동은 자신의 무게와 탈선에서 벗어나 진지한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선물이 이식되는 것도 바로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교의 그 신앙을 구별하는 것은 바로 신앙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성령을 가득 채워주신 하느님의 무상적인 사랑이 내건 제안에 자유로이 결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선물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인간의 모든 바람과 요청과 정복과 자연획득에 직면하여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독창성이 자리잡고 있는 인간성을 이루신 것이다.

I0.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한편으로는 문화들이 올바른 이성과 선한 뜻에 맞는 점을 지닌다는 면에서 그런 모든 문화들과 양립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지극히 뛰어난 정도로 문화의 활력소가 된다는 것도 그리스도교 신앙이 자연 본성과 문화의 모든 질서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원리가 신앙과 문화의 관계를 전반적으로 밝혀 준다. 즉 은총은 자연 본성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은총은 죄의 상처로부터 자연 본성을 치유하며 강화하고 키워준다. 하느님의 생명에로 초월하여 높여 주심은 은총의 고유한 목적이지만 그것이 자연 본성을 치유하지 않고 실현될 수 없으며 초자연계에로 올려 주심은 자신의 고유한 노선 안에서 자연 본성을 충만한 완성에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11. 토착화의 과정은 주어진 사회 문화 환경이 자신의 모든 고유한 가치에 따라 복음과 융화될 수 있게 될 때부터 성장할 수 있도록 초대하면서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사회 문화 환경 안에 파고들도록 하기 위한 교회의 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토착화란 말은 복음과 사회 환경의 만남이란 사실에서 개인과 단체가 서로 풍요로워지고 성장한다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토착화는 복음이 토착 문화 안에 육화(incarnation)되는 것이며 동시에 교회의 생활 속에 그 문화를 도입하는 것이다.”4)

2. 구원 역사 안에서의 토착화

야훼와 계약의 백성 세상의 주님이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과 사도들의 교회

1. 자연 본성과 문화 그리고 은총의 관계는 우리가 고찰하게 될 인간과 하느님 계약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 있다. 특정한 백성과 함께 시작하여, 하느님의 아들도 되는 이 백성의 한 아들 안에서 정점을 이루고 그로부터 시작하여 세상의 모든 나라에까지 퍼져나간 이 역사는 “영원한 지혜의 놀라운 자비”를 보여 준다.l)

이스라엘, 계약의 백성

2. 이스라엘은 하느님에 의하여 직접적인 방식으로 형성된 것처럼 이해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경전인 구약 성서도 선택된 백성의 구성원들에게 살아 있는 하느님 계시의 영원한 증인이다. 이 계시는 기록된 형태 안에서 이 백성들과 주변 문화들이 역사 안에서 부딪쳐 왔던 수천년의 문화척 사회적 경험도 지니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은 이미 위대한 문화를 탄생시켰던 세계에서 태어났고 그런 문화들과 관련해서 성장했다.

3. 이스라엘의 가장 오래된 제도들 (할례, 봄축제, 안식일)은 이스라엘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그런 제도들을 이웃 민족들로부터 빌려왔다. 이스라엘 문화의 대부분도 비슷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서의 백성은 그런 것들을 빌려와서 자신의 신앙과 종교 생활 안에 흡수해 들일 때 크나큰 변화를 겪도록 했다. 이스라엘은 그런 것들을 아브라함의 위격적인 하느님(그분은 우주의 자유로운 창조주이며 현명한 조정자로서 죄악과 죽음도 안에서는 기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께 대한 신앙의 체로 걸려냈다. 계약 안에서 살아온 이 하느님과의 만남이 남자와 여자를 인격적언 존재로 이해하게 하며 결과 다른 문화에 깃들어 있는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배척하게 한다.

4. 성서 저자들은 한 백성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점을 이루게 될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또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을 이루도록 불린, 온갖 문화를 지닌, 백성들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그 시대의 문화를 이용했고 또 동시에 변형시켰다.

5. 구약 성서에는 여러 문화들이 용해되고 변형되어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계시하는데 사용되었으며 계시는 계약 안에 살아 있고 성서 안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신약 성서에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은 보다 깊이 계시되고 성령의 충만함 안에서 드러났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모든 문화들이 변형될 수 있도록 초대한다.

6.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위에 접목”2) 되었다면 하느님의 본래 계획은 창조 전체에 관련된 것이라는3) 점을 강조해야 한다. 사실 계약은 노아를 중개로 하여 의롭게 살 태세가 되어 있는 지상의 모든 백성들4)과 맺어졌다. 이 계약은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맺은 계약보다 앞서는 것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이 받은 모든 축복을 소통시켜 주도록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심을 받은 것도 결국은 지상의 모든 가족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5)

7. 다른 한편 우리는 이스라엘 문화의 여러가지 측면들이 하느님의 계시와 모두 같은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어떤 점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저항하는 것들도 있고 또 다른 점들은 그것을 잘 수용한다. 이렇게 잘 수용하는 것 가운데에는(예식이나 법적인 지침들처럼) 일시적인 것들도 있고 보편적인 차원의 것들도 있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들 및 시편들”6) 가운데 있는 어떤 요소들은 예수의 전사(前史)가 되는데 바로 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세상의 주님이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1. 모든 문화의 관계에서 본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성

8. 하나의 확신이 예수의 설교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당신 자신에 대한 확신,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인격에 대한 확신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훨씬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 그것을 이루신다.7) 예수께서는 모든 민족들과 모은 문화들에 대해 참된 지혜이고 지고한 빛이다.8) 예수께서는 당신의 활동 자체 안에서 이미 이스라엘에 의하여 창조주요 주님으

알려진9) 아브라함의 하느님이 복음을 믿게 될 모든 사람들도 다스릴 태세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셨다. 더욱이 예수님에 의하여 하느님은 이미 다스리고 계신 것이다.10)

9. 예수의 가르침, 특히 비유 안에서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본성과 활동에 대하여 역사와 기성 종교 및 문화가 동시대인들에게 불어넣어 준 수많은 개념들에 맞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잘못되면 반박도 서슴지 않았다.11)

10. 하느님께 대한 예수님의 자녀다운 깊은 친밀성이나 자신의 생명과 죽음을 아버지께 바치게 한12) 사랑어린 순종은 죄악으로 그르치게 된 하느님 창조의 본래 계획이 당신 안에서 회복되었음을 증거한다.13) 우리는 새로운 창조, 새로운 아담 앞에 있는 것이다.14) 또한 하느님과의 관계도 여러 가지 면에서 크게 변한 것이다.15) 이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메시아를 강타한 저주가 온 인류를 위한 축복이 되고16) 구세주 예수께 대한 시내산 율법의 통치를 대신할 만큼 새로운 것이다.17)

11.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그 덕분에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 안에 내리게 했으며 지극히 인간적인 지혜와 윤리의 불충분함을 보여 주었다. 또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까지도, 선에 대해 알 수 있게 하는 모든 제도들도 그 선을 성취할 수는 없었으며 죄에 대한 인식도 그 죄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18)

2. 문화와 문화들에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

a) 세계의 주님이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특수성

12. 하느님 아들의 강생은 완전하고도 구체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문화적인 강생이 되었다. “그리스도 자신이 당신의 수육(受肉)으로 말미암아 같이 사신 동향 사람들의 특정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당선을 적합시키셨다.”l9)

13. 하느님의 아들은 갈릴레아 나자렛의 유다인이 되기를 원하셨고 아라메아어를 말하셨으며 이스라엘의 신심깊은 부모에게 예속되어 예루살렘의 성전에 따라가셨으며 거기에서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는 중이었다.”20) 예수께서는 1세기 팔레스티나의 풍속과 제도 가운데서 성장하셨으며 그 당시의 직업을 배웠고, 그 주변의 죄인들과 농부들, 그리고 장사꾼들의 행동을 관

찰했다. 예수께서 장차 랍비로서의 상상력을 키우게 된 장변과 경치들은 분명히 정해진 장소와 시대의 것이었다.

14. 이스라엘의 신심 가운데 성장하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대단히 독특한 체험 속에 놀라운 영성의 깊이를 지닐 수 있었던 예언자들과 율법의 가르침으로 교육을 받은 예수께서는 확실하게 두드러진 영적 전통 즉 유다의 예언적 전통 속에 계셨다. 과거의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대변자였으며 회개를 촉구했다. 그분의 예언 양식 또는 전형적인 예언자들의 것이었다. 용어와 문학 유형, 예언의 전개 방식 등 모든 것이 엘리아와 엘리세오의 노선을 상기시킨다. 즉 성서의 병행 귀절들, 격언들, 역설적인 말들, 권고들, 행복에 대한 말들과 상징적인 행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러했다.

15.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당신이 자리잡고 있는 그 백성들과 종교적 전통은 그 사실 자체로서 인류 구원 역사에 유일 무이한 그 무엇이 된다. 이 선택된 백성들과 그들이 남겨준 종교적 전통은 인류를 위해 영원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6. 물론 그리스도의 강생은 절대로 즉흥적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을 준비하고, 당신을 선포하며, 당신을 미리 그리고 있는 역사 안에 들어오셨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로 베풀어 주고자 하는 선물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내신 백성들과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육체를 미리 이루셨다고 말할 수 있다. 예언자들이 선포한 모든 말씀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본체적인 말씀의 전주곡이다.

17. 또한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의 역사,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의 역사는 그 역사를 이야기하고 밝혀 주는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해서도 그 모든 것을 간직하고 필수 불가결의 대치할 수 없는 교육적 역할을 한다. 또한 예수에게서 나온 이 백성의 선택은 결코 취소된 적이 없었다. “나의 동족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었고 하느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율법이었고 참된 예배가 있고 하느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들은 저 훌륭한 선조들의 후손들이며 그리스도도 인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영원토록 찬양합시다. 아멘.21) 좋은 올리브 나무는 자신에게 접붙여진 야생 올리브 나무 때문에 그 좋은 특성을 상실하지 않았습니다.22)

b) 유일한 존재의 보편성

l8. 육(肉)이 되신 말씀의 조건 - 따라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형성하고 그것을 지속시키는 문화 - 이 아무리 특수하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아들이 결합되어 들어간 것이 우선적으로 이 특수성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도 인간이 되심으로써 어떠한 모양으로든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시대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 본성을 취하셨지만 소멸시키지 않으셨으므로 우리 안에서도 인간 본성은 자동적으로 고상한 품위에 까지 들어 높여졌다. 성자께서는 사실 당신의

화신(化身)으로 어떤 의미에서 당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신 것이다.”23)

19. 따라서 그리스도의 초월성은 인류 가족 위에 당신 자신을 고립시켜 놓지 않고 모든 특수성을 넘어서 모든 사람 안에 당신을 현존하게 한다. “그리스도는 어느 누구에게나 또 어디서나 이방(異邦)의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25)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공통된 본성이 실현되는 개인의 다양성이나 다수성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루는 일치

안에서 우리와 결합한다.

2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우리 문화의 다양성과 상호 보완성 안에서 우리에게 이르지 못한다면 우리 구체적인 인간성의 진리와도 결합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우리를 생활 속에 받아들이고 우리를 형성하며 우리와 동반하고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은 언어, 역사, 인생관, 갖가지 제도들과 같은 문화들이다. 만약 온 우주가 모두 신비스럽게도 은총과 죄악의 자리라면 어떻게 우리의 문화도 그렇지 않겠는가? 고유한 인간 활동의 싹이고 열매인 그것들이 말이다.

2l.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문화들은 그것들이 은총과 신앙의 영감을 받고 쇄신되는 정도에 따라서 상호 보완적이 된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거쳐 나올 때 같은 복음과 진리 정의 사랑 자유의 같은 원리에서 나온 활력과 가르침이 가능한 다양한 형태의 풍요로움을 보게 한다.

22. 강생한 말씀의 신부인 교회 가 다양한 인류 문화의 운명에 간여하는 것이 이기적인 책략에 의한 것이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말씀의 씨앗으로 마련해 준 이 진리와 사랑의 자원들을 우리가 부패시킨 오류와 죄악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보호하며 내면으로부터 활력을 불어넣고자 한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믈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26)

사도들의 교회와 성령

a) 예루살렘에서 온 민족들에게: 신앙의 토착화에 대한 전형적인 시초

23. 오순절 날(성신 강림일)에 성령의 등장은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문화의 관계를 완성과 충만함의 사건으로 개시한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구원 약속은 성령께서 당신 자신을 불어넣어 주심으로 신자들의 마음을 채웠다.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들”이 이제는 모든 언어와 모든 문화의 사람들에게 “선포될”것이다.27) 인류가 바벨의 분열 표시 아래 살 때에 성령의 선물은 그에게 지극히 인간적이고도 초월적인 마음의 교향악이란 은총으로 주어졌다. 하느님의 친교적 일치(koinonia)는 그들 분열의 표시인 언어들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파고들어 인간 사이에 새로운 공동체를 재창조한다.

24. 성령은 초문화(超文化)를 창설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체들과 공동 작업으로 새로운 공동체에 생명력을 불어넣게 될 위격과 활력의 원리가 된 것이다. 성령의 선물은 구조적인 질서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이루어 놓은 예루살렘 교회는 신앙과 아가페의 공동체(koinonia)이며 이 공동체는 서로 분열되지 않고 다양성 안에서 서로 상통한다. 이 교회는 또한 그 지체들이 서로 나뉘어져 있지 않고 일치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지체들이 단일 형태(uniformite)로 있지 않고 일치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보편성(catholicite)에 대한 최초의 시련은 문화와 관련된 차이점들(헬레니즘 문화와 히브리 문화 사이의 줄다리기)이 친교적 일치(Communion)를 위협할 때 나타났다.29) 사도들은 그 차이점들을 없애버리지 않고 몸인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 즉 일치(koinonia)를 위한 봉사(diaconia)로 발전시킬 것이다.

25.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은 베드로와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 새로운 분별력을 불어넣어 주었다.30) 그리스도의 신앙은 새로운 신자들에게 유다인들의 율법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자신의 문화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 모든 백성들은 구원 약속의 은혜를 받고 그들을 위해 계약의 백성들에게 맡겨진 유산에 한 몫을 차지하도록 불리었다.3l) 따라서 사도들의 회의에서 결정된 바에 따르면 “긴요한 사항 외에는” 아무런 짐도 더 지우지 않는 것이었다.32)

26. 그러나 십자가의 신비는 유다인들에게 스캔들이었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바로 여기서 신앙의 토착화는 그리스도에게 흡수되지 않는 문화로부터 진리를 “가로막는”33) 근본적인 죄악 즉 우상 숭배에 부딪치게 된다.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기”34) 때문에 인간이 추구하는(경작하는:cultive)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의 불투명한 모상이다. 바오로의 복음 선포(kerygma)는 창조 때와 계약의 소명으로부터 출발하여 눈이 멀은 인간의 윤리적인 타락상을 고발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선포한다.

27. 문화적으로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사이에 보편성이 시험을 받고 유다인들의 율법주의와 우상 숭배의 저항을 받은 다음 신앙은 그노시즘(gnosticisme) 안에서 문화에 굴복했다. 이 현상은 바오로와 요한의 마지막 편지들이 쓰여진 시기에 생겨났다. 그것은 그 다음 세기의 교의적인 위기들 대부분을 만들어낼 것이다. 여기서 인간 이성은 그 상처받은 상태로 하느님 아들의 강생에 대한 어리석음을 거부하고 그 당시의 지배적인 문화에 적응시킴으로써 강생의 신비를 수정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신앙은 인간의 지혜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에 따르는 것이다.”35)

b) 사도적 전통 : 신앙의 토착화와문화의 구원

28. 오순절에 시작된 마지막 때에 알파요 오메가이신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의 역사 안에 들어오신다. 그때에 역사의 의미 그리고 따라서 문화의 의미가 봉인을 떼며36) 성령께서는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소통시키고 현실화시킴으로써 그것을 계시한다. 교회는 이 계시와 소통(Communion)의 성사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영접된 모든 문화에서 다시 중심이 되며 “다가오는 세계”의 주축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교회는 “이 세상의 군주가” 파괴한 일치(Communion)를 회복시킨다. 문화는 이렇게 종말론적인 상황에 있는 것이다. 문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지만 그것은 악을 버리는데 협력함으로써만 완성으로 구원될 수 있는 것이다.

29. 성령 안에서 각개의 지역 교회 혹은 특정한 교회는 특정한 문화의 육화(肉化) 안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성사가 되어야 할 소명을 지니고 있다:

가. 젊은 교회든지 오래된 교회든지 지역 교회의 문화는 여러 문화의 활력과 그 변천 과정에 참여한다. 비록 이 문화가 종말적인 상황 속에 있을지라도 여러 가지 시련과 유혹을 당하게 되어 있다.37)

나. “그리스도교적인 참신성”은 지역 교회 안에서 문화적인 형태를 지닌 특수한 표현들(교리 내용의 표현 양식, 전례적인 상정들, 성덕의 형태들, 교회법적인 지침들 등)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교회들 사이의 일치(Communion)는 각 교회의 문화적 육화가 사도적 신앙 안에서의 상호 존중과 사랑 안에서의 공동 연대성에 가리개를 만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요구한다.

다. 모든 민족들에게 파견된 교회는 모두가 문화적인 관계를 고려하여 주님의 강생이란 최초의 비움 안에서 그리고 생명을 주는 당신 수난의 궁극적인 낮춤 안에서 주님과 일치하는 경우에만 그 주님을 증거하게 된다. 신앙의 토착화는 바오로 사도가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극적인 특성을 강조한 사도적 전통에 대한 표현들 가운데 하나이다.38)

30. 사도들의 기록과 교부들의 증언들은 문화에 대한 그들의 전망을 복음화에 이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에 그것을 끌어들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창조는 하느님 영광의 반영이며 인간은 그 살아 있는 모상이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비슷함이 주어진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문화는 인간과 세상이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재발견되도록 소명을 받은 자리이다. 그 만남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이냐는 정도에 따라서 흐려지기도 하고 놓치기도 한다. 사로잡힌 창조 세계의 내부로부터 “새로운 세상”39)의 움직임이 살아난다. 교회는 “작업 중”40)이다.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의 피조물들은 그들의 구원과 변화된 모습을 살아갈 수 있다.

3. 토착화의 현실적인 문제들

민간 신앙 :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의 만남; 젊은 교회들, 그리스도교의 과거와 조상들의 문화; 그리스도교 신앙과 현대

l. 우리가 우선 철학적인 관점(자연 본성, 문화, 은총)에서 특별히 고찰하고 이어서 역사와 교의의 관점(구원 역사 안에서의 토착화)에서 고찰한 신앙의 토착화는 신학적인 사색과 사목활동에 있어서 아직 많은 문제점들을 제시한다. 그래서 16세기에 신대륙의 발견이 제기했던 문제들이 계속 우리의 관심을 끈다. 어떻게 신앙과 백성들의 종교심에서 나온 자발적인 표현들을 조화시키는가? 비그리스도교 종교들에 대하여, 특히 “문화의 발전에 관련된”l) 종교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또 우리시대에는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우리 시대에 생겨난 “젊은 교회들”은 기존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토착화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그들의 그리스도적인 과거와 그들 백생들 각각의 문화적인 역사에 대하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특별히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는 새로운 세계를 복음이 어떻게 정화시키고, 강화시키며 생기를 돋구어 주어야 하는가? 이 네 가지 문제들이 현재 신앙의 토착화에 대한 조건들을 생각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것 같다.

민간 신앙(民間信仰)

2. 민간 신앙이라는 것은 복음이 전해진 나라에서, 한편에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심이, 다른 편에는 주민들의 과거 종교 형태들과 깊이 있는 문화가 결합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이 단순한 언어로 축제나 순례, 춤과 노래 동과 같은 데서 그들의 종교적인 감정들을 표현하는 대단히 많은 신심들을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민간 신앙들에 대하여 활력을 주는 통합(synthese vitale)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체와 영혼, 교회의 친교적 일치와 제도, 개인과 공동체, 그리스도교 신앙과 조국애(祖國愛), 지성과 감정을 결합시켜 주기 때문이다.2)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러한 통합의 질은 복음화의 깊이와 역사성, 그리스도교 신앙과 이런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전제들의 상통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3.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인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에서 교황은 이러한 민간 신앙의 새로운 인식을 확인하고 격려했다. “백성들 가운데 신과 신앙을 찾고자 하는 특수한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오랜 동안 순수한 것이 못된다고 때로는 무시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는 이러한 표현들을 어디서나 다시 생각해 보기에 이르렀습니다.”3)

4.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신다: “그러나 만일 그런 것들이 적절히 선도되고 특히 복음 선교의 방향으로 선도된다면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민간 신앙은 순박하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은 신앙을 위해서라면 헌신과 영웅적 희생도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부성(父性), 섭리(攝理), 사랑, 현존 동 하느님의 속성(屬性)을 이해할 수 있는 예리한 감수성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데서는 보기 드문 인내심,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십자가의 의의, 해탈(解脫), 귀의심(歸依心), 신심 등 내적 자세도 볼 수 있습니다.”4)

5. 그 밖에 민간 신앙의 뿌리에 있는 힘과 깊이는 바오로 6세께서 말씀하시는 그 기나긴 불신의 시대에 명백하게 드러났다. 민간 신앙의 표현들은 현대 세계와 세속주의의 발전이 책임지는 것 같은 수많은 소멸의 예고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그것은 지구상의 수많은 지역에서 민중들 위에 행사하는 매력을 보존했고 또 증가시키기까지 했다.

6. 사람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민간 신앙의 한계들을 폭로했다. 그것들은 종교의 갖가지 변질 즉 미신의 근거가 되는 일종의 단순주의에 매어 있다. 사람들은 여기서 진정한 신앙에의 결속이나 그 신앙을 이웃에 대한 봉사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문화적인 요소를 드러내는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 잘못 인도된 민간 신앙은 심지어 종교적 파벌들을 만들어내는 데 이를 수도 있고 또한 진정한 교회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그것들은 또한 정치 권력들에 의하여 조종될 수도 있고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다른 종교 세력들에 의하여 조종될 수도 있다.

7. 이러한 위험에 대한 인식은 진정한 민간 신앙의 가치를 얻고 동시에 분별력을 지닐 수 있는 현명한 교리 교습을 시행하도록 요청한다. 또한 살아 있고 적응되어 있는 전례는 대단히 순수한 신앙의 내용 안에서나 신자들의 전통적 형태의 종교 생활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초대된다. 아무런 의심 없이 민간 신앙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일상 생활을 지배하는, 대단히 상이한 방향의, 일부 경제 사회 제도들과 그리스도교 신앙 사이의 거리감, 때로는 비극적인 거리감을 없앨 수 있는 그리스도교 문화의 인류학에 비할 데 없는 공헌을 할 수 있다.

신앙의 토착화와 비그리스도교 종교들

8. 비그리스도교 종교들. - 초창기부터 교회는 강가지 차원의 다양한 종교들의 문제에 부딪쳤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인들은 아직도 세계 인구의 약 삼분의 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종교 문제에 있어서 다원주의가 점점 더 큰 지지를 받고 있는 세계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9. 문화에 있어서 종교가 큰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비그리스도교적인 문화 사회 환경 속에 자리잡은 지역 교회 또는 특수 교회는 이런 환경의 종교적인 요소들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그 종교적인 내용들의 깊이와 활력에 따라야 할 것이다.

l0. 하나의 대륙을 실례로 들어본다면, 우리는 세계의 위대한 종교적 흐름들이 많이 생겨난 아시아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교, 유교, 도교, 신도이즘 등 이들 종교체제들은 각각 아시아 대륙의 다른 지역들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백성들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고 많은 활력을 보여 주고 있다. 이들의 개인 생활은 사회 활동이나 공동체 생활과 마찬가지로 이 영적이고 종교적인 전통들에 의하여 결정적인 형태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한 아시아의 교회들은 비그리스도교 종교들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다. 또한 이 교회들은 그 종교들을 대화라는 특전적인 관계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11. 종교들과의 대화. -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생활에 내적 요소를 이루는 것이다. 상호 교류와 연구, 공동 작업을 통하여 이러한 대화는 다른 사람의 종교를 보다 더 잘 이해하고 신앙심 안에서 성장하게 하는데 공헌한다.

12.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그 기원과 목표에 있어서 즉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 상통(communion)에서 모두의 일치가 성령의 보편적인 활동과 현존을 수반한다. 대화를 하는 교회는 말을 듣고 배운다. “가톨릭 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 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5)

13. 이 대화는 종교들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독창적인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 많은 종교들은 흔히 차별과 시기, 광신과 독재 등 종교가 인류 가족 안에 분열의 원천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한 모든 것들을 가끔 생겨나게 했기 때문이다. “구원의 보편적 성사” 즉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 주는 표지요 도구인”6) 교회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백성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의 일꾼과 도구가 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다.

14. 문화와 관련된 복음의 초월성.- 그렇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자신의 모든 잠재력에 따라 뿌리를 내리고 꽃피워야 할 모든 인류 문화들과 관련해서 볼 때 복음이 초월적이라는 것을 잊을 수 없다. 한 민족의 문화적 유산 안에 있는 참되고 거룩한 것에 대한 존경이 아무리 커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 태도가 이 문화적 유산에 절대적인 특성을 부여하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아무도 복음이 처음부터 “유다인들에게는 스캔들이었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7) 이었음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종교들 사이에 대화의 길을 열어가는 토착화는 어떤 방식으로도 통합주의(syncretisme)의 담보물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 교회들과 그들의 그리스도교적 과거

l5. 교회는 야훼의 종의 신비를 현실화하고 연장시켜 나간다. “이 종은 만국의 빛으로 세워져서 땅 끝까지 구원이 이르게 하도록”8) 그리고“계약의 백성이 되도록”9) 약속된 존재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수난 전날 밤에 열두 제자들에게 둘러싸여서 당신의 몸과 피를 새로운 계약의 음식으로 당신 제자들에게 주시고 그들을 당신 자신의 몸과 비슷하게 만드시던 최후 만찬에서 실현되었다. 새로운 계약의 백성인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교회는 오순절에 그리스도의 영, 인류에게 대단히 깊이 뿌리박은 소망 즉 다양성을 철저하게 존중하는 가운데 철저한 일치를 이루는 소망을 들어주려고 이미 작업해 왔고 또 처음부터 회생된 어린 양의 영을 받을 것이다.

16. 같은 역사 안에 모든 특정 교회들을 일치시키는 보편 교회 (communion catholique)의 힘으로 젊은 교회들은 그들을 탄생시킨 그 교회 역사를 자기 고유한 역사의 일부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들 교회의 영적 성숙에 대한 표시가 되는 주된 해석 활동은 이 과거를 단순히 역사적인 것뿐만 아니라 근원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데 있다. 이것은 원로들이 선포한 복음을 신앙 안에서 영접할 때 젊은 교회들이 그들을 “믿음의 근원으로”10) 받아들이고 믿음이 증언되는 전통 전체를 유일하고 공통된 신앙이 이야기되는 본래적인 형태를 탄생시키는 능력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등한 존엄성과 같은 신비로 살아가는 진정한 자매 교회들인 이 젊은 교회들은 원로들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신비의 충만성을 드러낸다.

17. 새로운 계약의 백성인 교회는 빠스카 신비를 기념하고 끊임없이 주님의 재립을 선포한다. 이 교회는 백성들의 문화적 전통으로 시작된 종말론적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전통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부활하는 정화(淨火)의 법칙에 복종한다는 조건하에서이다.

18. 성 바오로가 아테네의 아레오파고 법정에서 한 것처럼 젊은 교회는 조상들의 문화에 대한 새롭고도 창조적인 해석을 한다. 이 문화가 그리스도께로 넘어갈 때 “너울이 벗겨진다.”11) 신앙이 배태될 때 이 교회는 그리스도를 성령 안에서 아버지의 “해석자요 해석”l2)으로 발견했다. 또한 이 교회는 자신을 그렇게 관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제 이 교회는 그리스도를 문화의 원천이요 목적인 인간의 “해석자요 해석”으로 발견한다. 십자가에서 계시된 미지의 하느님께, 과거 문화에서 은총으로 시작된, 살아 있는 빠스카 신비의 힘으로 젊은 교회가 선포하는, 미지의 인간이 응답한다.

19. 젊은 교회는 자신이 현존하게 하는 구원 안에서 특정한 인간 단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염려하신 모든 흔적들 즉 말씀의 씨앗들(semina Verbi)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히브리서의 서문이 성조들과 예언자들에 대하여 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다시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일종의 유비적인 방식으로 모든 인류 문화에 대하여, 그 문화가 올바르고 진실된 것을 지니고 있는 한 그것이 지혜를 내포하고 있는 한,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현대

20. 산업 혁명을 유발시킨 기술의 발전과 연이은 도시 혁명은 주민들의 영혼에 깊은 명향을 미쳤다. 그것은 주민들에게 혜택이 되었지만 때로는 그 변화의 희생자가 되게도 했다. 또한 이것은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온 구원과 관련된 기대와 필요성에서와 마찬가지로, 현대 문화를 그 두드러진 특성들 안에서 이해하여야 할 시급하고도 어려운 과제로 부과되어 있다.

21. 산업 혁명은 또한 온전히 문화혁명도 되었다. 그때까지 보장되었던 가치들이 의문시되었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하는 노동의 의미,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 보금자리가 되는 가정에의 소속감, 노동과 마찬가지의 공동생활, 인간적인 규모의 지역 공동체나 종교 공동체에 뿌리를 박는 것, 인간 실존의 중요한 순간에 의미를 주는 행사, 예식, 축제, 전통들에 참여하는 것 등이다. 산업화는 주민들을 무질서하게 밀집시킴으로써 공동체가 이러한 세속적인 가치들을 새로운 문화로 흡수해 들이지 못하고 심한 손상을 끼치게 되었다. 가장 무기력한 백성들이 자기들에게 고유한 발전의 모델을 찾고 있을 때 산업화의 위험이나 그에 대한 인간의 대가처럼 그 이점들도 더 잘 파악된다.

22. 수많은 생활 영역, 식품, 건강, 교육, 교통, 온갖 종류의 소비재들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그렇지만 무의식적인 집단 속에서 깊은 불안이 생겨났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래로 수많은 나라에서 발전에 대한 개념이 환멸을 가져왔다. 생산과 관리 문제에 있어서의 합리성은 그것이 사람들의 선익을 망각할 때에 이성에 거스르는 일을 한다. 소속된 공동체로부터의 해방은 고독한 군중 속으로 인간을 쫓아버린다. 새로운 소통의 수단들은 그것들이 일치시킬 수 있는 만큼 파괴시키기도 한다. 과학은 그 결실이 되는 기술의 창조에 의하여 창조적이며 통시에 살인적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라는 것에 절망을 느끼고 새로운 야만성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수많은 실패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모든 나라들은 윤리적인 도약을 희망해야 한다. 복음을 설교하고 듣게 한다면 문화적이고 영적인 회개가 가능하다. 복음은 모든 선이 지향하고 있는 하느님 아버지를 흠숭하도록 정의와 평화를 진작시키도록, 인간의 전인적인 선을 위하여, 공통 연대성에로 나아가도록 호소한다.

23. 현대사회 안에서 복음의 토착화는 구체적인 연구와 활동에 대한 조직적인 필요로 노력을 할 것이다. 이 노력은 복음화의 책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제안할 것이다: 1) 비판적인 분별력과 수용의 태도; 2) 새로운 문화들에 대한 인간적 갈망과 영적 기대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 현대 세계와의 효과적인 만남을 위한 문화적인 분석의 적합성이다.

24. 사실 수용의 자세는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고 복음화하려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현대 세계는 수많은 물질적 문화적 영역에서 부정할 수 없는 발전을 수반하고 있다. 인간의 안녕과 기동성, 학문, 연구, 교육, 연대성에 대한 새로운 의미 등이 그런 것이다. 더욱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새로운 조건들을 생생하게 의식하게 되었고 바로 이러한 문화 내일의 현대 안에서 교회가 건설될 것이다. 이러한 안목에 대하여 비오 12세께서 말씀하신 전통적인 지시 사항이 적용된다 : “여러 민족들의 문화와 제도들을 보다 깊이 이해해야 하고 그들의 자질과 그들의 가장 훌륭한 천품들을 배양해야 한다······민족들의 관습 안에서 불가피하게 미신이나 오류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모든 것은 호의로써 검토되어야 하고 고스란히 보존되어야 한다.”13)

25. 복음은 현대인들의 처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메시지의 근본 즉 무조건적인 사랑, 복음적 가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예배와 그분의 뜻에 대한 끊임없는 복종을 이해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그들에게 고통과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가르칠 수 있는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부활의 업적에 믿음과 희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26. 우리는 문화들을 분석하고 그 영적 윤리적 영향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현대 세계에서 복음의 토착화라는 대단히 복잡한 일에 성공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온 교회가 동원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관심을 연결시켜야 한다 : “나는 나의 교황 취임 초부터 우리 시대의 문화들과 교회의 대화가 사활이 걸린 분야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바로 이 20세기 말의 세계 운명이 달린 것입니다.”l4)

l. “교회로서 복음 선교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다 넓은 지역에서 혹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배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판, 판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 양식 동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다음과 같이 요청한다: “복음화에 있어 중요한 것은 복음화가 문화를 마치 겉치장하는 것처럼 장식하는 것이 아니고 문화의 깊은 근원에까지 생명력 있게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나 문화들이라는 것은 사목 헌장 5항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넓고 풍부한 뜻을 가지고 있으며······ 복음이 가르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자기 고유의 문화에 깊이 젖어 있는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 건설에 있어서 인류의 모든 문화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1)

2.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이 20세기 말에 교회는 오늘날의 문화들을 호의적으로 맞아들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아직도 복음화되어야 할 국가나 지역, 환경, 사고방식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살아 있는 문화의 영혼에 침투하고 그들의 가장 높은 기대에 부응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차원에까지 자라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길고도 용기 있는 토착화의 과정을 전제로 합니다······ 흔히 문화들은 아직도 피상적으로만 다루어져 왔고, 또 이 문화들은 어떻게든지 끊임없이 변하면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문화의 새로운 분야들이 여러 가지 목표들과 방법들, 그리고 다양한 언어들과 더불어 나타나고 있습니다.”2)

주(註)


서문

l) 우리는 국제 신학위원회의 문헌집(1969-1985), Paris Cerf, l988에서 “신학적 다양성”(1972), “인간의 발전과 그리스도교의 구원”(1976), “혼인 성사에 대한 가톨릭 교리”(1977), “그리스도론에 관해 뽑은 문제들”(1979)에 관한 문헌들을 볼 수 있다.

2) 앞에서 언급한 문헌 336-340쪽에 "Thèmes choisis d'ecclésiologie a l'occasion du 20e anniversaire de la clôture du Concile Vatican II" (1984).

 3) Pontifical Biblical Commission, Fede e cultura alla luce della Bibbia / Foi et culture a la lumière de la Bible (Turin: Editrice Elle di Ci, 1981).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 헌장, 44항.

5) 상동 53 62항.

6) 바오로 6세, Evangelii Nuntiandi, 18-20항.

7) 요한 바오로 2세, Catechesi tradendae, 53.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20주년 기념 특별 시노드에서 교부들이 투표한 최종 보고서, 1985년 12월 7일.

9) 요한 바오로 2세, “Letter of foundation of the Pontifical Council for Culture, 20 may 1982”, Acta Apostollcae Sedis, 74(1983), 683-688; Documentation catholique, 79, 20 June 1982, 604 -606면.

10) 요한 바오로 2세, 1982년 5월 15일 Coimbra 대학에서 하신 연설, Documentation catholique, 79, 6 jun 1982, 549면. 1980년 5월 7일 케냐 주교들에게 하신 연설, Documentation catholique, 1 June 1980, 534면.

11) 요한 바오로 2세, 1983년 1휠 18일 교황청 문화위원회의 위원들에게 하신 연설, Documentation catholique, 5 February 1983, 147면.

l. 자연 본성, 문화, 은총

1) 교황 바오로 6세, 산아 제한에 관한 회칙 : 인간 생명, Documentation catholique, 65, 1 September 1968, col. l447.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 헌장 53항.

3) 상동.

4) 요한 바오로 2세,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의 선교: 1100주년을 위한 칙서 Slavorum Apostoli, 1985년 6월 2일, 21항, Documentation catholique, 1985년 6월 2일자, 724면.

2. 구원 역사 안에서의 토착화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 l3항.

2) 로마 11, 11-24 참조.

3) 창세 1,1 -2 4a.

4) 창세 9,1-17; 집회 44,17-18 참조.

5) 창세 12,1-5, 예레 4,2; 집회 44,21.

6) 루가 27,27.44.

7) 마르 13,10 ; 마태 12,21 ; 루가 2,32

8) 마태 11, 19 루가 7, 35. ;

9) 시편 93,1-4;이사 6,1.

10) 마르 1, 15 ; 마태 12, 28 ; 루가 11, 20 , 17, 21.

11) 마태 20, 1-16, 루가 15,11-32; 18,9-14.

12) 마르 l4, 36.

13) 마르 1,14-15;10,2-9,마태 5,21-48.

14) 로마 5,12-19; 고린 전 15,20-22.

15) 마르 8,27 33; 고린 전 1,18 25.

16) 갈라 3,13; 신명 21,22-23.

17) 창세 3,12-14.

18) 로마 7,16 이하;3,20,7,7;디모 전 1,8.

19)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선교 교령, 10항.

20) 루가 2,46.

21) 로마 9,4-5.

22) 로마 11,24.

23) 사목 헌장, 22항.

24) 선교 교령, 8항.

25) 갈라 3,28.

26) 골로 1,16-17.

27) 사도 2,11.

28) 사도 2,42.

29) 사도 6,1 이하.

30) 사도 10장과 11장.

31) 에페 2,14-15.

32) 사도 15, 28.

33) 로마 1, 18.

34) 로마 3,23.

35) 고린 전 2,4 이하.

36) 묵시 5,1-5.

37) 묵시 2장과 3장 창조.

38) 고린토 전서와 후서의 여기 저기에서.

39) 묵시 21, 5.

40) 로마 8, 18 - 25 창조.

3. 토착화의 현실적인 문제들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

2) 제3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 총회, 현재와 미래의 라틴 아메리카 복음화, 448항.

3) 바오로 6세, 현대의 복음 선교, 48항, 이종홍 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1, 61-62면.

4) 상동.

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

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1항.

7) 고린 전 1,23.

8) 이사 49,6.

9) 이사 49,8.

10) 히브 12, 2

1l) 고린 후 3, 16.

12) Henri de Lubac, Exégèse médiévale, “Théologie” 41항, Paris, 1959, t. I, 322-324l면 참조.

13) Pius XII, Summi Pontificatus, 20 October 1939, Documentation Catholique, 40, 5 December 1939, c. 1261.

14) John Paul II, Letter on foundation of the Pontifical Council for Culture, 20 May 1982.

결론

1)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 이종홍 신부 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1.

2) John Paul II, Discourse to the Pontifical Council for Culture, 18 January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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