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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logy Today: Perspectives, Principles and Criteria

오늘의 신학: 전망, 원칙, 기준

 

차례

서론 · 

제1장 하느님 말씀의 경청 · 

1. 하느님 말씀의 수위권 · 

2. 신앙,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 · 

3. 신학, 신앙의 이해 · 

제2장 교회의 친교 안에 머무름 · 

1. 신학의 영혼인 성경 연구 · 

2. 사도적 전승에 대한 충실성 · 

3. ‘신자들의 신앙 감각’(sensus fidelium)에 주목함 · 

4. 교회 교도권에 대한 책임 있는 추종 · 

5. 신학자들의 공동체 · 

6. 세상과 대화하며 · 

제3장 하느님의 진리를 설명함 · 

1. 하느님의 진리와 신학의 합리성 · 

2. 신학의 단일성과 그 방법 및 분야의 다수성 ·

3. 학문과 지혜 ·

결론 · 

* * *

국제신학위원회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5년 임기의 회기 중에 이미 신학의 지위에 관한 주제로 연구를 시작했다. 이 작업은 산티아고 델 쿠라 엘레나(Santiago del Cura Elena) 신부를 위원장으로 하여 브루노 포르테(Bruno Forte) 대주교, 사비오 혼 타이-파이(Savio Hon Tai-Fai, S.D.B.) 대주교, 안토니오 카스텔라노(Antonio Castellano, S.D.B.) 신부, 토미슬라프 이반치치(Tomislav Ivanĉić) 신부, 토마스 노리스(Thomas Norris) 신부, 폴 루아나(Paul Rouhana) 신부, 레오나르 상테디 킹쿠푸(Leonard Santedi Kinkupu) 신부, 예르지 시미크(Jerzy Szymik) 신부, 토마스 죄딩(Thomas Söding) 교수로 구성된 소위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소위원회가 진행 중이던 작업을 완료하여 문헌을 발행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기에, 국제신학위원회의 새로운 5년 임기의 회기를 통해 이전의 작업을 기초로 하여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소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그 위원장은 폴 맥파틀런(Paul McPartlan) 몬시뇰이고 위원들은 얀 리선(Jan Liesen) 주교, 세르주 토마 보니노(Serge Thomas Bonino, O.P.) 신부, 안토니오 카스텔라노 신부, 아델베르 드노(Adelbert Denaux) 신부, 토미슬라프 이반치치 신부, 레오나르 산테니 킹쿠푸 신부, 예르지 시미크 신부, 사라 버틀러(Sara Butler, M.S.B.T.) 수녀, 토마스 죄딩 교수 등이었다.

소위원회의 수많은 회합들과 2004년부터 2011년까지 매년 로마에서 열린 국제신학위원회의 정기 총회들을 통해 이 주제에 관한 전반적인 토론이 이루어졌다. 이 문헌은 동 위원회에 의해 “특수한 형태로”(in forma specifica) 2011년 11월 29일에 승인되었으며, 그 후에 위원장인 신앙교리성 장관 윌리엄 레바다(William Levada) 추기경에게 제출되었고 그가 문헌의 발행을 인준하였다.

* * *

서론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시기는 가톨릭 신학을 위해 지극히 풍요로운 기간이었다. 새로운 신학의 목소리들이 특히 평신도들과 여성들에게서도 나타났고, 새로운 문화적 맥락들로부터, 구체적으로는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신학들이 등장했으며, 평화, 정의, 해방, 생태학과 생명 윤리와 같은 새로운 고찰 주제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성서학, 전례학, 교부학, 중세 연구의 부흥으로 기존의 주제들이 더 깊이 있게 연구되었으며, 교회 일치 대화, 종교 간 대화, 문화 간 대화 등 새로운 숙고의 장들이 열리기도 했다. 이들 모두는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발전들이다. 가톨릭 신학은 인류 가족 전체와 대화하고 “교회가 성령의 인도로 그 창립자에게서 받은 구원의 힘”을 제공함으로써 “온 인류 가족에 대한 연대와 존경과 사랑”1)을 표현하고자 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어 놓은 길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신학에서는 일종의 단편화가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신학은 바로 위에 언급된 대화에서 언제나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유지해야 하는 도전에 항상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톨릭 신학을 특징짓고 또한 신학의 다양한 형태들 안에서 그 신학에게 오늘의 세계와 대면하는 데에 있어서 분명한 정체감을 갖게 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에 이른다.

2. 교회가 그리스도의 유일한 메시지를 세상에 전달하고자 한다면, 신학적 차원에서나 사목적 차원에서나 어느 정도 공통된 담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신학에서 어떤 단일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단일성을 획일성이나 단일한 방식과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단일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신학의 단일성은 신경에서 고백하는 교회의 단일성과 마찬가지로, 보편성(catholicity)의 개념과 긴밀히 상호 연관되고 또한 거룩함(holiness)과 사도 전래성(apostolicity)의 개념과도 상호 연관되어야 한다.2) 교회의 보편성은 온 세상과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유래한다(에페 1,3-10; 1티모 2,3-6 참조).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민족과 문화 안에 거처하며 “구원과 성화(聖化)를 위해 모든 것을 모아들이고자”3) 노력한다. 구세주가 단 한 분이라는 사실은 보편성과 단일성 사이의 필연적인 연관을 보여 준다. 하느님 신비의 무한성,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이 다양한 맥락들 안에서 구원을 위해 작용하는 수없이 많은 방법들을 탐구하는 신학은 마땅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된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의 유일한 진리를, 그리고 유일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유일한 구원 계획을 연구함에 있어 이 다수성은 그들을 특징짓는 유사한 특징들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3. 국제신학위원회는 특히 「신앙의 단일성과 신학적 다원주의」(Theological Pluralism, 1972), 「교도권과 신학」(Thes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Ecclesiastical Magisterium and Theology, 1975), 「교의들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ogma, 1990)과 같은 이전의 문헌들에서도 이미 신학적 임무의 다양한 측면들을 검토하였다.4) 본 문헌은 가톨릭 신학을 규정짓는 공통된 특징들을 밝히려 하는 것이다.5) 여기에서는 가톨릭 신학을 특징짓는 기본적인 전망과 원리들을 고찰할 것이며, 다수의 상이한 신학들이 참으로 가톨릭 신학으로서 가톨릭 교회의 사명에 동참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기준들을 제시할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사명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의 사람들에게(마태 28,18-20; 묵시 7,9 참조)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그들에게 유일하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함으로써 그들 모두를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로 불러 모으는(요한 10,16 참조) 것이다. 이 사명은 단일성 안에 다양성을, 또한 다양성 안에 단일성을 지닌 가톨릭 신학을 요구한다. 가톨릭 신학들은 가톨릭 신학으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교회와 친교를 이루며 그러한 것처럼, 가톨릭 신학들은 서로 지탱해 주고 서로 책임을 지도록 부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본 문헌은 3장으로 구성되며 그 주제는 다음과 같다. 신학의 표현들, 주인공들, 개념들과 맥락들은 풍요로운 다수성을 지니지만, 그 신학이 하느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데에서 흘러나오며(제1장 참조) 의식적으로 그리고 충실하게 교회의 친교 안에 머문다면(제2장 참조), 그리고 오늘의 남녀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형태로 하느님의 진리를 전해 줌으로써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지향한다면(제3장 참조), 신학은 ‘가톨릭적’(보편적)이고 따라서 근본적으로 하나이다.

제1장

하느님 말씀의 경청

4.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성과 지혜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당신 뜻의 신비를(에페 1,9 참조) 기꺼이 알려 주려 하셨으며, 이로써 사람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다(에페 2,18; 2베드 1,4 참조).”6) “성경 계시의 새로운 점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시고 그 대화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알게 하신다는 데에 있습니다.”7) 신학은 그 모든 다양한 전통과 분야와 방법들에서 언제나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 바로 그분께 신앙으로 귀를 기울이는 근본적인 행위를 기초로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가톨릭 신학의 결정적인 원리이다. 이러한 경청이 이해, 선포, 그리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형성을 가져오는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 위에 세워집니다. 교회는 말씀으로부터 태어나고 그 말씀으로 살아갑니다.”8)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1요한 1,3).9) 온 세상은 구원의 부름을 들어, “구원의 선포를 들음으로 믿고, 믿으며 바라고, 바라며 사랑하게”10) 되어야 할 것이다.

5. 신학은 교회가 신앙으로 보편적인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신적 계시에 대한 학문적인 성찰이다. 이 계시의 순수한 충만함과 풍요로움은 단 하나의 신학으로 파악하기에는 너무 방대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상이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므로, 이에 따라 실제로 다수의 신학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하느님의 유일한 진리에 봉사하는 데에서 일치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학의 단일성은 획일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직 하느님의 말씀에 단일한 초점을 맞추는 것을 요구하며, 그 헤아릴 수 없는 풍요로움에 대한 신학들의 여러 가지 설명은 서로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학들의 다수성은 단편화나 불일치를 뜻해서는 안 되며, 하느님의 유일한 구원 진리를 수많은 방법들로 탐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1. 하느님 말씀의 수위권

6.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요한 복음은 이 ‘서문’으로 시작된다. 이 찬가는 계시의 우주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그 계시가 하느님 말씀의 육화로 절정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창조와 역사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공간과 시간이 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상은(창세 1장 참조) 또한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시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무한히 더 크시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성자의 육화는 이 변함없는 사랑의 절정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계시(요한 3,16.35 참조)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세상의 구원자”(요한 4,42)이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실현된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씀하셨지만, 시간의 충만함 속에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는데,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던 것이다(히브 1,1-2). 사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7. 교회는 성경을 매우 공경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책의 종교’가 아니며” “‘기록되고 소리 없는 말이 아닌, 강생하시고 살아 계신 말씀’의 종교”11)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하느님의 복음은 근본적으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모두 증언하고 있다.12) 성경은 “하느님께 영감을 받아, 영원토록 한 번 쓰여서 하느님 자신의 말씀을 변함없이 전달해 주며,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소리가 울려 퍼지게”13) 한다. 성전(聖傳)은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수하는 것으로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에 의해 성경의 경전 안에서, 그리고 교회의 전례(leiturgia)와 증언(martyria)과 봉사(diakonia) 안에서 입증되고 있다.

8.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영감 받은 저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들의 말을 통해 그 말씀이 전달되었다고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통하여 인간적 방법으로 말씀하시며,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를 찾으신다.”14) 성령께서는 성경 저자들을 감도하시어 적절한 증언의 말을 찾아내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성경 독자들을 도우시어 성경의 인간적 언어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하신다. 성경과 성전의 연관은 하느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하여 당신 말씀 안에서 계시하시는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경에 기록되기를 원하신 진리를 확고하고 성실하게 그르침이 없이 가르친다.”15) 그리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성령께서는 “신자들을 온전한 진리 안으로 이끄시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 안에 풍성히 머물도록 하여 주신다(콜로 3,16 참조).”16) “하느님의 말씀은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며, 성경은 영감 받은 계시의 증언으로서 교회의 살아 있는 성전과 함께 신앙의 최고 규범이 된다.”17)

9. 하느님 말씀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것은 가톨릭 신학의 기준 가운데 하나이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곧 창조 안에서, 예언자들과 현자들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말씀하신다(히브 1,1-2 참조).

2. 신앙,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

10.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그의 서간에서 말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여기에서 중요한 점이 두 가지 있다. 한편으로 바오로는 하느님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신앙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그것은 언제나 “하느님 영의 힘으로”(로마 15,19) 이루어진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귀에까지 이르게 되는 방법들을 밝혀 준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말씀을 선포하고 신앙을 일깨우도록 파견된 이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로마 10,14-15 참조). 그러므로 모든 시대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은 사도들을 기초로 해서(에페 2,20-22 참조) 그리고 사도적 계승 안에서만(1티모 4,6 참조) 권위 있게 선포될 수 있는 것이다.

11.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중개자이시며 동시에 모든 계시의 충만”18)이시므로, 말씀께서 찾으시는 응답인 신앙 역시 인격적이다. 신앙으로 인간은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드리는 행위로써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내맡긴다.19) 그러므로 “믿음의 순종”(로마 1,5)은 인격적인 것이다. 신앙으로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귀를 열고, 또한 그분께 기도와 찬미를 드리기 위해 입을 연다. 성령의 선물을 통해 그들 안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로마 5,5 참조) 위하여 마음을 열고,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치게 된다”(로마 15,13). 그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로마 5,5).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은 희망과 사랑 모두를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바오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불러일으켜진 신앙이 마음 안에 머물며 입으로 고백하게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9-10).

12. 계시가 우리를 구원하고(2티모 2,13 참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요한 8,32 참조) 하느님의 진리에 다가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라면, 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수반하는 하느님 체험이다. 바오로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그들이 믿는 이로서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갈라 4,9; 1요한 4,16 참조)라고 말한다. 신앙 없이는 이 진리를 꿰뚫어 보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 진리는 하느님에 의해 계시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느님에 의해 계시되고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진리는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합당한 예배”(logikè latreia)을 가져오는데, 바오로는 이 합당한 예배가 정신을 새롭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말한다(로마 12,1-2). 창조 업적들로부터 이성의 도움으로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존재하시고 단 한 분이심을 알 수 있다는 것을, 구약 성경과(지혜 13,1-9 참조) 신약 성경에(로마 1,18-23 참조) 들어 있는 오랜 전통이 말해 준다.20) 그러나 하느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요한 3,16 참조) 당신 아드님의 육화와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내적인 생명에 있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라는 것은 신앙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13. ‘신앙’이란 믿거나 신뢰하는 행위를 뜻하기도 하고 믿거나 고백하는 내용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들은 각각 ‘행위로서의 신앙’(fides qua)과 ‘내용으로서의 신앙’(fides quae)이라고 일컬어진다. 그 두 측면은 분리할 수 없이 일치되어 작용한다. 신뢰는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의 메시지를 따르는 것이고, 신앙 고백은 내용 없는 단순한 말들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철저히 인격적이면서 동시에 교회적인 실재이다. 신앙 고백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믿나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신앙은 성령의 친교(koinonia) 안에서 고백되는데(2코린 13,13 참조), 그 친교는 모든 신자들을 하느님께 결합시키고 그들 서로를 결합시키는 것으로서(1요한 1,1-3 참조) 성체성사를 통해 가장 탁월하게 표현된다(1코린 10,16-17 참조). 초대 교회 시기부터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는 신앙 고백들이 생겨났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개인적으로 증언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지만, 신경들은 교회가 바로 교회로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신앙 고백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복음에 상응하는 것이며 교회는 그 복음 안에 굳건하게 서 있고 그 복음으로 구원된다(1코린 15,1-11 참조).

14.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에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끌어들이는 …… 자들입니다”(2베드 2,1).21) 신약 성경은 교회의 시초에서부터 공통된 신앙에 ‘이단적인’ 해석을, 사도적 전승에 배치되는 해석을 제시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자주 보여 준다. 요한의 첫째 서간에서, 사랑의 친교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그 가르침이 그릇된 것임을 보여 주는 표지가 된다(1요한 2,18-19). 그러므로 이단은 복음을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교회의 친교에도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이단이란 세례 받은 후 거룩한 가톨릭 신앙으로 믿어야 할 어떤 진리를 완강히 부정하거나 완고히 의심하는 것”22)이다.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이러한 완고함을 범하는 이들은 (신앙의 형상적 동기인)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곧 ‘행위로서의 신앙’(fides qua)을 자기 자신의 판단으로 대치시키는 것이다. 이단은 우리에게 교회의 친교는 온전한 가톨릭 신앙을 기초로 해서만 보증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교회로 하여금 친교 안에서의 진리를 항상 더 깊이 있게 추구할 것을 촉구한다.

15. 교회의 신앙을 자신의 원천이고 맥락이며 규범으로 삼는다는 점은 가톨릭 신학의 또 한 가지 기준이다. 신학은 ‘행위로서의 신앙’(fides qua)과 ‘내용으로서의 신앙’(fides quae)을 모두 포괄한다. 신학은 “성경 말씀대로”(1코린 15,3.4) 선포되는 사도들의 가르침, 곧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교회 신앙의 규범이며 자극으로서 제시한다.

3. 신학, 신앙의 이해

16.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신앙의 행위는 신앙인의 지성을 새로운 지평들로 개방시킨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 4,6). 이러한 빛 안에서 신앙은 온 세상을 새롭게 관조한다. 신앙은 세상을 더 참되게 보게 되는데, 그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시각을 공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진리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이해하기 위해 믿으라.”(crede ut intelligas.)고 권고한다.23) 또한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우리는 ……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1코린 2,12). 더 나아가서, 이 선물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 바로 그분을 이해하도록 이끌린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역주: 1코린 2,10)하시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라고 가르침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앎에까지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또 그러므로 하느님의 당신 자신에 대한 앎에까지도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17.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에페 3,8)를 누리게 된 믿는 이들은, 그들이 믿는 바를 마음 안에 되새기며(루카 2,19 참조) 그에 대해 더욱 충만하게 이해할 수 있기를 추구한다. 그들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그리고 그들의 모든 이해력을 다하여, 하느님 말씀의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을 받아들여 그들 신앙의 빛과 양식이 되게 한다. 그들은 하느님께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기를”(콜로 1,9) 간구한다. 바로 이것이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에 이르는 길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설명하듯이, 이렇듯 이해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것은 신앙의 역동성 자체로부터 나온다. “참된 이성을 통하여 이전에는 오직 믿음으로써만 확실하다고 여기던 것을 이해하게 된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이해하려고 갈망하는 사람보다 물론 더 낫습니다. 그러나 갈망을 느끼지도 않으며,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을 다만 믿음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과연 신앙이 무슨 목적으로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24) 한편 신앙을 이해하는 이러한 작업은 신앙을 양육하고 자라나게 하는 데에 기여한다.25) 그래서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26)인 것이다.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의 길은 믿는 데에서부터 시작되고, 그 믿음은 영광 중의 관조(지복직관, 1요한 3,2 참조)에 이르는 원천이고 항구한 원리이다. 신앙의 이해는 그 관조를 선취하는 것이다.

18. ‘신앙의 이해’는 신자들의 다양한 은사에 따라 교회의 삶 안에서와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영적 독서, 묵상, 설교, 학문으로서의 신학 등). 신앙인이 그리스도교 신비의 내용을 합리적이고 학문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려는 과제에 착수할 때 그 이해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신학이 된다. 그러므로 신학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과 만물에 대해 지니신 앎에 대한 이성적 참여라는 점에서 곧 ‘하느님의 지식’(scientia Dei)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 가톨릭 신학의 기준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것이 신앙의 학문이고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27)이기에 합리적인 차원을 지닌다는 것이다. 신학은 교회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교회가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느님의 관점에서’(sub specie Dei)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한다. ‘하느님의 지식’(scientia Dei)으로서 신학은 하느님의 구원 진리를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기를 추구한다.

제2장

교회의 친교 안에 머무름

20. 신학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한데 모인 교회 안이다. 신학의 교회성은 신학적 임무의 구성적(構成的)인 측면이다. 신학은 신앙에 기초하는데, 신앙 자체가 개인적이며 동시에 교회적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계시는 하느님 백성을 불러 모으고 쇄신하는 것을 지향하고, 신학자들은 바로 교회를 통하여 그들 탐구의 대상을 부여 받게 된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신학의 ‘장소들’(loci), 곧 신학적 임무를 위한 근본적인 기준점들에 대한 주목할 만한 숙고가 있어 왔다.28) 중요한 것은 그 장소들(loci)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뿐 아니라 그들의 상대적인 비중과 그들 서로 간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이다.

1. 신학의 영혼인 성경 연구

21. “성경 연구는 신학의 영혼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29) 이것은 신학과 관련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도 이를 되풀이하여 말씀하신다. “신학이 본질적으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경 해석이 아닐 때 그 신학은 기초가 없게 될 것입니다.”30) 신학은 그 전체가 성경에 부합되어야 하고, 성경은 모든 신학 작업을 지탱하고 동반해야 한다. 신학은 “복음의 진리”(갈라 2,5)를 다루는 것이고, 성경 경전 안에 들어 있는 그 진리에 대한 규범적인 증언들을 연구할 때에만,31) 그리고 그 연구에서 성경에 들어있는 인간적인 말들을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과 연결시킬 때에만 그 진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주석가들은 …… 자신들이 하느님 말씀을 해석하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그들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오늘을 위한 하느님 말씀으로 설명했을 때 비로소 자신들이 맡은 과업의 참다운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32)

2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헌장’에 따르면 주석의 과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33) 밝히는 것이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34) 주석은 적절한 철학적, 역사적, 문학적인 방법을 모두 사용하여 성경을 그 배경과 시대 안에서 명확하게 이해하고자 해야 한다. 그러므로 계시의 역사성이 방법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계시 헌장’ 12항은 특히 문학 유형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에 대해 언급한다. “진리는 본문에서 역사적, 예언적, 시적 양식 또는 다른 화법 등 여러 양식으로 각각 다르게 제시되고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성경 의미의 새로운 측면들을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방법들이 발전되었다.35) 그러나 ‘계시 헌장’ 12항은 ‘성경의 신적 차원’을 인식하고 성경의 참으로 ‘신학적인’ 해석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 가지 근본 기준’이 반드시 또한 고려되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36) 그것은 성경의 일체성, 교회 전승의 증언, 그리고 신앙의 유비(類比)이다.37) 공의회가 성경의 일체성을 언급하는 것은, 성경은 다양한 형태를 지닌 그 전체성 안에서만 구원의 진리 전체를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8) 주석학은 성경의 경전 전체를 성경 해석을 위한 해석학적 기준점으로 삼기 위한 방법론을 발전시켰고, 이로써 여러 책들과 단락들의 문맥과 내용이 지니는 의미를 평가할 수 있게 된다. 공의회가 가르치듯이 주석은 세기의 흐름 속에서 성령의 활동에 힘입어 하느님 백성의 신앙과 삶이라는 넓은 맥락 안에서 성경 본문들을 읽고 해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맥락 안에서 주석은 ‘자구적 의미’를 찾으며 성경의 ‘영적인 의미’ 또는 ‘더욱 충만한 의미’(sensus plenior)에 자신을 열어 놓는다.39) “방법론적인 이 두 차원, 곧 역사적 비판적 차원과 신학적 차원이 존중될 때에만 신학적 주석, 이 책에 적합한 주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40)

23. 성경 연구가 신학의 ‘영혼’이라고 말하면서 ‘계시 헌장’은 모든 신학 분야를 염두에 두고 있다. 성경과 성전에 증언된 대로의 계시된 하느님 말씀에 기초를 둔다는 것은 신학을 위하여 본질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신학의 가장 우선적 임무는 구원 진리로서의 하느님의 진리를 해석하는 일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촉구한 바와 같이 가톨릭 신학은 그 모든 작업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자 하며, 그러기에 성경의 증언을 경청하고자 한다.41) 따라서 신학적인 설명들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성경의 주제들을 제시”42)해야 한다. 이러한 접근은 다시 “첫째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성경 주석가들’”43)이었던 교부들의 접근 방법에 상응하고, 교회 일치 차원의 협력 가능성을 열어 준다. “함께 성경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사랑의 대화로 이끌고 또한 진리의 대화에서 자라날 수 있게 합니다.”44)

24. 가톨릭 신학의 기준들 가운데 하나는, 언제나 성경의 정경적인 증언을 원천으로 하고 교회의 모든 가르침과 실천을 그 증언에 근거하게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복음 선포가 바로 그리스도교가 그렇듯이 성경들로 양육되고 규정되도록”45)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에 접할 수 있도록(히브 4,12 참조) 그들에게 성경을 활짝 열어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46)

2. 사도적 전승에 대한 충실성

25. 사도행전은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삶을 묘사해 주는데, 이는 모든 시대의 교회를 위하여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묵시 1,3 참조). 성령께서 사도들의 입을 열어 설교하게 하시고 그들의 말을 들은 많은 이들을 신앙으로 이끄셨던 성령 강림 이야기의 끝 부분에 자리한 이 간략한 묘사는, 교회 안에서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성령의 활동의 핵심적인 여러 측면들을 부각시킨다. 여기에서는 교회의 가르침과 성사 생활, 교회의 영성과 애덕 실천을 미리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사도 공동체 안에서 시작되었으며,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통합적 생활 방식의 전달이 바로 사도적 전승이다. ‘기도의 법’(lex orandi)과 ‘믿음의 법’(lex credendi)과 ‘생활의 법’(lex vivendi)은 모두 이 전승의 본질적인 측면들이다. 바오로가 자신이 “전해 받은” 것을 “전해 준다”고 말할 때에(1코린 15,1-15; 또한 1코린 11,23-26 참조), 그는 자신이 사도로서 그 안에 합체되어 있는 이 전승을 가리키고 있다.

26. 그러므로 전승은 살아 있고 생명을 지닌 것이며, 언어의 다양성과 문화의 상이성들 속에서 신앙의 단일성이 표현되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전승이 화석화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전승이 아니다. “사도들에게서 이어 오는 이 성전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 안에서 발전한다. 전해진 것들과 말씀들에 대한 이해가, …… 증진된다. 곧 교회는 그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완성될 때까지 세기에 걸쳐 하느님 진리의 충만을 향하여 꾸준히 나아간다.”47) 전승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다. 곧 성령께서는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확고하게 세워 주시고(요한 14,26 참조), 교회가 그 사도적 기원에 충실하도록 유지시키시며, 신앙의 확실한 전달을 가능하게 하시고, 사도들의 후계자인 목자들의 지도 아래 복음이 언제나 생생하게 제시될 수 있도록 격려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바와 같이 교회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끄신다(요한 16,13 참조).48) 그러므로 전승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들은 성경에 대한 늘 새로운 연구, 전례 예식, 역사의 흐름 속에서 신앙의 증인들이 가르쳐 온 것에 대한 주목, 신앙의 성장을 도와주는 교리  교육,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실천적 사랑, 조직화된 교회 직무와 하느님 말씀에 대한 교도권의 봉사이다. 전달된 것은 “하느님 백성의 삶을 거룩하게 이끌고, 신앙을 키우는 데 기여하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교회는 “자신의 가르침과 생활과 예배를 통하여 그 자신의 모든 것과 그리고 그 자신이 믿는 모든 것을 영속시키며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전달한다.”49)

27. “거룩한 교부들은 이 성전이 살아 있음을 증언하고, 믿고 기도하는 교회의 관습과 생활 안으로 이 성전의 풍요로움이 흘러 들어온다고 가르친다.”50) 동방과 서방의 교부들은 계시된 진리를 ‘충실하게 전달하고 설명’하는 데에서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51) 그들의 저술은 가톨릭 신학의 특수한 기준점(locus)이 된다. 전례의 계열들이나 영성 전통들, 그리고 주석적이고 신학적인 전통들의 다수성(예를 들어,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에서 나타나듯이 교부들이 알고 생활했던 전승은 다각적이며 생명이 고동치고 있는데, 이러한 다수성은 유일한 신앙에 확고하게 기초하고 있고 거기에 결합되어 있다. 4세기와 5세기의 주요한 신학 논쟁들에서, 어떤 학설이 교부들의 공통된 의견에 부합하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그 학설이 정통적인지 또는 이단인지를 입증하는 기준이 되었다.52)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교부들의 일치된 증언은 곧 교회의 목소리였다.53) 칼케돈과 트리엔트 공의회는 그 장엄한 선포들을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서”54)라는 양식으로 시작하였고, 트리엔트 공의회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부들의 “한결 같은 동의”가 성경 해석을 위한 확실한 지침이라고 명확하게 지적하였다.55)

28. 교부들 중 많은 이들은 주교들로서 다른 주교들과 함께 공의회에 모이곤 했었다. 처음에는 지역 공의회들이 있었고 이후에는 세계 공의회 또는 ‘보편’(ecumenical) 공의회들이 열렸는데, 이 공의회들은 초세기부터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사도 15,6-21 참조) 교회의 삶을 특징지었다. 교부 시대에 신앙과 교회의 일치를 위협했던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에 관련된 이단들에 대처하여 주교들은 –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에페소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제2차 니케아 공의회와 같은 – 주요한 보편 공의회들에 모여 오류를 단죄하고 신경들과 신앙 정의들을 통해 정통 신앙을 선포했다. 이 공의회들은 그들의 가르침, 특히 그들의 장엄한 정의들에 규범적 성격과 보편적인 구속력을 부여했다. 또한 이 정의들은 사도적 전승을 표현하고 그 전승에 속하는 것으로서, 지속적으로 신앙과 교회의 일치에 공헌한다. 서방에서 보편 공의회로 인정받은 이후의 공의회들은 이러한 관습을 이어 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과 교회 주교들의 가르치는 직무 내지 교도권을 언급하면서, 주교들이 로마의 주교와 함께 모여 보편 공의회를 통해서든, 아니면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로마의 주교와 친교를 이루면서든 간에, 신앙과 도덕에 관한 특정한 가르침이 “확정적으로 고수하여야 할 것으로” 합의하는 때에 그들은 오류 없이 가르치는 것이라고 진술한다. 주교단의 단장인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자이며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확정적 행위로 선언하는 때에”56) 무류적으로 가르친다.

29. 가톨릭 신학은 보편 공의회의 교도적 권위, 주교들의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교도권, 그리고 교황의 교도권을 인정한다. 교의(dogma)들, 곧 “교회가 계시된 진리를 확정적인 것으로 그리고 온 교회에 대하여 구속력을 갖는 방식으로 제시하여, 이를 부정할 경우 이단으로 배척되고 파문(anatema)을 받게 되는” 진술들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한다.57) 교의들은 살아 있으며 언제나 지속되는 사도적 전승에 속한다. 신학자들은 그들의 해석 작업에 따르는 어려움들을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검토의 대상이 되는 문제를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이해하고 어떤 교의의 의미와 내용이 그 표현 양식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식별하는 것이 필요하다.58) 그렇지만 교의들은 교회 신앙의 확실한 기준점들이며 신학적 숙고와 논증에서 그런 것으로서 사용되어야 한다.

30. 가톨릭 신앙 안에서 성경, 성전, 교회 교도권은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성전과 성경은 교회에 맡겨진 하느님 말씀의 유일한 성스러운 유산을 형성한다.” 그리고 “기록된 하느님 말씀이나 전해지는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는 직무는 ……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다.”59) 성경은 단순한 하나의 본문이 아니라, 처음에는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에 의하여 그리고 마지막에는 신약 성경에서 사도들이 증언한(로마 1,1-2 참조)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locutio Dei)60)이고 또한 ‘하느님의 말씀’(Verbum Dei)61)이다. 하느님 백성의 품 안에서 태어나고 또한 하느님 백성에 의해 하나로 결합되고 읽혀지고 해석된 성경은 모든 시대를 위한 신앙의 기준적 증언이 되는 교회의 살아 있는 전승에 속한다. 실상 “성경은 기록된 전승의 첫 번째 요소다.”62) “사도적 전승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성경은 그 전승의 흐름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선포하고, 듣고, 받아들이고, 체험해야 하는 것”63)이다. 이러한 과정은 성령에 의하여 지탱된다. “성령께서는 복음의 생생한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하여 세상 안에 울려 퍼지도록 하신다.”64)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기록되었으므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곧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하느님의 말씀은 성전으로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되는데, 후계자들은 진리의 성령에게서 빛을 받아 자신의 설교로 그 말씀을 충실히 보존하고 해설하며 널리 전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오로지 성경으로만 모든 계시 진리에 대한 확실성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65) 교회는 사도적 전승으로부터도 그러한 확실성을 얻는데, 이는 사도적 전승이야말로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살아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31.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전(聖傳)과 교회 역사의 특정한 시대, 또는 수도회나 특수한 지역 교회들 같은 특정 지역과 공동체들에 속하는 전승들을 구별한다.66) 전승(Tradition)과 전승들(traditions) 사이의 이러한 구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신학의 주요한 과제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또 지난 몇 십 년 동안 신학 전반의 과제가 되기도 했다.67) 이는 교회의 보편성과 깊이 연관된 과제이며, 교회 일치에 관련하여 수많은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는 과제이다. 많은 의문들이 제기된다. 예를 들면, “유일한 전승(Tradition)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다 더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가? 어떤 방법들로 이를 규정할 수 있는가? 스스로 그리스도교 전승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전승들은 그 유일한 전승(Tradition)을 포함하고 있는가? 참된 전승(Tradition)을 구현하고 있는 전승들과 순전히 인간적인  전승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진정한 전승(Tradition)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허약해진 전승 또는 전승의 왜곡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인가?”68) 한편으로 신학은 사도적 전승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형성된 상이한 전승들 안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신학은 왜 어떤 전승들은 교회 전체의 특징이 아니라 특정한 수도회, 지역 교회 또는 시대들만의 특징이 되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사도적 전승(Apostolic Tradition) 자체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전승들(traditions)은 언제나 비판에 개방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교회가 필요로 하는 ‘끊임없는 개혁’69)이 가능하게 되고, 또한 교회가 자신의 유일한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를 토대로 하여 항구한 자기 쇄신을 거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어떤 특정한 전승이 실제로 교회의 신앙을 특정한 장소와 시간 안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를 밝혀내려 하는 것이며, 그 여부에 따라 모든 장소와 모든 시대의 살아 있는 신앙과 접촉함으로써 그 전승을 강화 또는 교정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32. 사도적 전승에 대한 충실성이 가톨릭 신학의 기준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충실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도적 전승의 다양한 증언들과 표현들에 대한 능동적이고도 분별력 있는 수용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과 전례, 그리고 교부들과 교회 학자들의 저술에 대한 연구와 교도권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3. ‘신자들의 신앙 감각’(sensus fidelium)에 주목함

33.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 2,13). 이 말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온 백성의 초자연적 신앙 감각(sensus fidei),”70) 그리고 신자들이 지니고 있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좀  더 깊은 인식”71) 곧 ‘신자들의 감각’(sensus fidelium)이라고 일컬었던 것을 묘사해 준다. 신앙의 주체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확언하는 전체로서의 하느님 백성이다. 바로 이 때문에 공의회는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예수님의 예언자직에 참여하고,72) 또 성령에 의해 도유를 받았기에(1요한 2,20.27 참조)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73)고 선언한다. 하느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목자들은 백성의 신앙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무엇보다 그들 스스로가 먼저 믿는 이들이 이루는 친교의 구성원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헌장’은 먼저 하느님의 백성과 그 백성이 지니게 되는 신앙 감각(sensus fidei)에 대해 말하고74) 그 다음에 주교들에 대해 말한다.75) 주교들은 주교직에서 사도들을 계승하고 또한 그들에게 특수하게 부여되는 확실한 진리의 은사(charisma veritatis certum)를 받기에,76) 로마의 주교이며 성 베드로 사도좌의 계승자인 그들의 단장과 교계적 친교를 이루는 주교단으로서77) 교회의 교도권을 구성한다. 마찬가지로 ‘계시 헌장’은 하느님의 말씀이 “교회에 맡겨졌다”고 가르치고, “거룩한 하느님 백성 전체”가 그 말씀을 충실하게 따른다는 것을 말한 다음에,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해석하는 직무가 교황과 주교들에게 맡겨졌다고 특별하게 언급한다.78) 이러한 순서는 가톨릭 신학에서 근본적이다. 그러기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에게 저는 주교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Vobis sum episcopus, vobiscum sum christianus).79)

34. ‘신앙 감각’ 또는 ‘신자들의 감각’이 지니는 본성과 그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신자들의 감각’이란 단순히 한 특정 시대나 문화 안에서의 다수 의견을 뜻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먼저 교도권에 의해 가르쳐진 것에 대한 이차적인 긍정만을 의미하는 것 또한 아니다. ‘신자들의 감각’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신앙의 길에서 목자들의 인도를 받는 하느님 백성 전체의 ‘신앙 감각’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감각’이란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이해하며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 안에 깊이 뿌리를 둔 신앙의 감각인 것이다.

35. 신학자들에게 ‘신자들의 감각’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주의를 기울이고 존중해야 할 대상일 뿐 아니라, 그들의 작업을 위한 기초이며 기준점(locus)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신학자들은 그들이 탐구하고 설명하는 신앙이 하느님의 백성 안에 살아 있는 것이기에 ‘신자들의 감각’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분명 신학자들 자신이 교회의 삶에 참여하여 그 삶에 대한 진실된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신학자들이 하는 고유한 봉사는 바로 성경, 전례, 신경들, 교의, 교리 교육 안에, 그리고 ‘신자들의 감각’ 그 자체 안에 담겨 있는 그대로의 교회 신앙을 설명하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신앙의 진리에 관련된 문제들이 복잡할 수 있기에 그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정확하게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제시하면서, ‘신자들의 감각’의 내용을 밝히고 진술하도록 이끈다.80) 때로는 대중 신심의 표현들, 교회 내의 새로운 사상 조류와 운동들을 사도적 전승에 대한 충실성의 이름으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로 주어지기도 한다. 신학자들의 비판적 평가는 언제나 건설적인 것이어야 하기에, 겸손과 존경 그리고 애덕으로 제시되어야만 한다. “지식(gnosis)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agape)은 성장하게 합니다”(1코린 8,1).

36. ‘신자들의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가톨릭 신학의 기준들 가운데 하나이다. 가톨릭 신학은 가톨릭 신자들이 실제로 믿고 있는 것을 찾아내어 올바르게 진술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함으로써, 믿는 이들이 신앙 안에 성숙해지고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에페 4,14-15).

4. 교회 교도권에 대한 책임 있는 추종

37. 가톨릭 신학에서 교도권은 신학 작업 자체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신학은 하느님으로부터 교회를 통해 그 대상을 받게 되는데, 교회의 신앙은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에 의해서만”,81) 곧 교황과 주교들의 교도권에 의해서만 유권적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교도권에 대한 충실성은 신학이 ‘신앙의 지식’(scientia fidei)이 되고 교회적인 임무가 되기 위하여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학 방법론은 여러 다양한 차원에서의 교도권의 본성과 권위에 대한, 그리고 교회 교도권과 신학 사이에 존재하는 올바른 관계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요구한다.82)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서로 구별되는 소명을 가지고 있기에, 교도권이 신학을 단순한 반복적 학문으로 축소시키거나 신학자들이 스스로 교회 목자들의 가르치는 직무를 대체하려고 나서는 일이 없도록 각자의 고유한 권한을 서로 존중해야만 한다.

38. 교회를 친교로서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신학자들과 주교들, 신학과 교도권 사이에 풍요로운 협력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고찰하기 위한 좋은 기준틀이 된다. 첫째로 인정해야 할 것은, 신학자들의 작업과 주교들의 교도권은 양편 모두 하느님 말씀의 수위권 아래 있으며 결코 그 위에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83) 주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는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협력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적 경청과 그에 대한 충실한 선포에 있어서, ‘신자들의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신앙의 성장과 성숙에 봉사함에 있어서, 새로운 질문과 도전들을 존중하면서 하느님 말씀을 미래 세대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에 있어서, 그리고 이미 받은 선물들에 대한 희망 가득한 증언에 있어서 등 이 모든 일들 안에서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하나의 공통된 사명 안에 각각의 고유한 역할을 지니고 있으며,84) 그 하나의 공통된 사명으로부터 교도권과 신학은 각기 자신의 정당성과 역할을 도출해 낸다.85) 신학은 교회의 신앙을 연구하고 진술하며, 교계적 교도권은 그 신앙을 선포하고 유권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86)

39. 한편으로 교도권은 자신의 개입에 있어 교의적인 권위만이 아니라 신학적인 자격과 비판적 평가 능력도 입증하기 위하여 신학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교도권적 선언들을 준비하고 작성하는 데에 협조하도록 부름 받아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교도권은 신학에 필수 불가결한 도움이 된다. 교도권이 특히 결정적인 식별의 순간에 ‘신앙의 유산’(depositum fidei)을 권위 있게 전수하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은 교도권의 진술들이 신학적 발전에 미친 공헌을 인정하고 그러한 진술들의 수용에 협력해야 한다. 교도권의 개입은 신학적 숙고를 고무할 수 있으며,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교도권의 이전 교의적 진술들에 부합되며 그 진술들을 더욱 심화시킨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교회 안에는 실제로 신학자들의 어떤 ‘교도권’이 존재하기는 하지만87) 그것이 다른 교도권과 병행되거나 반대하고 대체하는 교도권일 수는 없으며,88) 또한 신학을 교회 교도권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입장을 취해서도 안 된다.

40. 신앙의 ‘유권적’ 해석과 관련해서 교도권은 신학이 단순하게 떠맡을 수 없는 역할을 수행한다. 신학은 학문적인 신학적 공동체로부터 나온 판단으로 주교들의 판단을 대체할 수는 없다. 신앙의 진정성에 관련된 교도권의 이러한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은, 교도권적 진술들의 서로 다른 여러 수준들에 대한 인식을 요구한다.89) 이 상이한 수준들에 대하여 믿는 이들과 신학자들 편에서 각각 차별화된 응답이 대응된다. 교도권의 가르침은 모두가 같은 비중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것 자체가 신학적 작업에 속하는 것이고, 실상 그 상이한 수준들은 “신학적 분류 또는 주해(註解)”라고 일컬어지는 명칭들에 의해 기술된다.90)

41. 바로 이러한 단계들이 있기 때문에, 신학자들이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으로서 지녀야 할 교도권에 대해 순종은 언제나 건설적인 비판적 평가와 논평을 포함한다.91) 가톨릭 신학이 교도권에 대하여 ‘불일치’를 표명할 수는 없지만, 신학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자 한다면 탐구와 질문을 하는 것은 정당할 뿐 아니라 필수적이다.92)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신학자들이 단지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순종이나 추종을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신학자들은 교회 교도권에 의해 선포된 진리에 대한 그들의 성찰을 심화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교적 삶과 진리에 대한 봉사를 위해 내포된 의미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학자들은 자신의 역할을 올바로 수행하게 되고, 신학적 담화 안에서 교도권의 가르침은 단순한 장식용 인용으로 축소되지 않게 될 것이다.

42.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많은 경우 각각의 소명과 책임에 대한 마땅한 존중 속에서 상호 진심 어린 신뢰의 관계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주교들은 신학위원회들의 국가적 또는 지역적 회합들에 참석하고 참여하며, 그들 자신의 가르침과 지침들을 작성할 때에 신학 전문가들에게 의뢰한다. 또 그들의 교구 안에 있는 신학 대학과 학교들을 방문하고 지원한다. 신학자들과 주교들의 관계에서 불가피하게 때로는 긴장이 발생할 수도 있다. 살아 있는 유기체인 교회 안에서 예언자이고 사제이며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삼중 직무 사이에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상호 작용에 관한 심도 있는 분석에서 존 헨리 뉴먼 복자는 “지속적인 충돌 또는 대립”의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가 이러한 대립과 충돌을 “사물의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음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93) 그는 “신학이 교회 체제 전체를 규정하는 근본 원리”이지만, “신학이 언제나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94) 신학자들과 교도권 사이의 긴장에 관하여 국제신학위원회는 1975년에 이렇게 말했다. “참된 생명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긴장이 존재한다.” “그 긴장이 적대감이나 진정한 대립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다. 이는 오히려 대화를 통해 각자의 고유한 임무를 공동으로 수행하게끔 이끄는 생명력 넘치는 자극일 수 있는 것이다.”95

43. 신학과 신학자들의 자유는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주제이다.96) 그러한 자유는 “신학자들의 진정한 학문적 책임으로부터 도출된다.”97) 교도권에 대한 추종이라는 개념은 때때로 (신앙과 교회적 순종이라는 전제들이 결여된) 소위 ‘학문적’ 신학과 (종교적 신봉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위 ‘신앙 고백적’ 신학 사이에 비판적인 대립을 만들어 내지만, 그러한 대립은 부적절한 것이다.98) 신앙인의 양심적 자유 또는 신학 연구에 있어 학문적 진보가 지니는 중요성에 관해서도 논쟁들이 제기되는데, 때로는 교도권이 진보를 힘으로 억압하고 제한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분석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신학의 과제에 속하며, 이를 통하여 신학의 학문적 측면과 신앙 고백적 측면이 올바르게 서로 통합되고 신학의 자유가 하느님의 계획과 뜻이라는 지평 안에서 고찰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44. 여러 단계들로 이루어진 교도권을 책임성 있게 따르는 것은 가톨릭 신학의 기준들 가운데 하나이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성경과 성전으로 전달된 하느님의 말씀을 유권적으로 해석하는 주교들, 특히 교황을 단장으로 하는 주교단의 권한을 인정해야 한다.99)

5. 신학자들의 공동체

45.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들이 그렇듯이 신학자의 직무도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이고 단체적이다. 그 직무는 교회 안에서 교회 전체를 위해 수행되고, 같은 소명을 지닌 이들과의 연대성 안에서 살아지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와 세상을 위한 봉사 안에서 그들을 서로 결합시켜 주는 깊은 유대를 마땅히 의식하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신학대학과 학교의 동료들로서, 같은 신학 학회와 협회의 구성원들로서, 연구의 협력자들로서, 저술가이며 교육자로서,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서로에게 영감을 준다. 또한 그들은 신학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 특히 대학생들에게 멘토(mentor)와 역할 모델(role model)로서 그들을 인도하고 도와준다. 더 나아가서 그러한 연대성의 유대는 마땅히 시간적 공간적으로 확장되어 세계 여러 나라와 문화의 신학자들을, 그리고 서로 다른 시대와 배경에 속하는 신학자들을 서로 결합시킨다. 이러한 연대성은 본 문헌에서 밝힌 바와 같은 가톨릭 신학의 기준들을 의식하고 준수하도록 촉진하는 데에 참으로 유용하다. 가톨릭 신학자들이 그들의 학문 분야의 진정한 특징들에 부합하게 가능한 최선의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누구보다 더 잘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동료 신학자들이다.

46. 오늘날에는 동일한 신학 분야 내에서와 서로 다른 분야들 사이에서 모두 연구와 출판 계획에 있어서의 협력이 점점 더 증대되고 있다. 신학 기관들과 대학들의 동료들 사이에 상호 인식과 존중을 강화해 줄 수 있는 발표와 세미나, 심포지엄의 기회들이 촉진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신학자들과 철학자들, 자연 과학자들과 사회 과학자들, 역사학자들 등의 학제 간(inter-disciplinary) 만남과 교환의 기회들 또한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본 문헌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신학은 다른 학문들과의 상호 작용 안에서 발전되는 학문이고, 또 다른 학문들 편에서도 신학과의 풍요로운 교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47. 신학자들은 그들 임무의 본성상 자주 교회의 체험과 숙고의 전방에서 작업하게 된다. 특히 오늘날 평신도 신학자들의 수가 많이 증가했는데, 이들은 성직자와 수도자 신학자들이 정통(精通)하기 힘든 특정 분야들에서 교회와 세상, 그리고 복음과 삶의 상호 작용을 체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상황 속에서나 새로운 쟁점들에 직면하여 바로 신학자들이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처음으로 진술하는 경우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신학자들은 교회를 위한 그들의 진지한 노력에서 교회 공동체 전체의 기도, 특히 서로 간의 기도로 지지를 받는 것을 필요로 하고 또 마땅히 그것을 받아야 하지만, 그러한 상황들에서는 가톨릭 신학의 근본 기준들을 주의 깊게 따르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신학자들은 그들의 노력이 본질적으로 임시적이라는 것을 언제나 의식하고 그들의 작업을 교회 전체의 검토와 평가에 맡겨야 한다.100)

48. 신학자들이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봉사들 가운데 하나는 상호 질문과 상호 교정이다. 예를 들어 중세의 관습인 논쟁(disputatio)이나 오늘날 자신의 저술들을 서로 검토해 주는 것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를 통해서 사상과 방법들이 점차 다듬어지고 마침내 완성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절차는 일반적으로 신학 공동체 자체 안에서 건전하게 이루어진다.101) 그러나 이는 그 본성상 느리고 사적인 차원에서의 절차이다. 특히 즉시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고 고유한 의미의 신학 공동체의 경계 밖으로 사상들이 퍼져 나가는 이 시대에는, 자체적인 교정이라는 장치로 모든 경우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별로 현실적이지 못하다. 신자들을 가르치고 돌보며 그들을 보호하는 주교들은 분명 그들이 오류적이거나 해롭다고 여기는 신학적 저술에 대해 발언하고 개입하며 필요하다면 검열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102)

49. 교회 일치를 위한 연구와 대화는 가톨릭 신학자들과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에 속한 신학자들이 서로 협력하기 위하여 더없이 특전적이고 생산적 가능성을 지닌 영역이 된다. 이러한 교류에서 신앙과 의미와 표현에 관한 주제들이 깊이 있게 고찰된다. 아마도 여러 세기 동안 각 전통들 사이에 이견(異見)으로 작용하였던 문제들에 대한 상호 이해를 촉진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신학자들은 세상이 믿게 하도록(요한 17,21 참조) 그리스도인들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거룩한 임무에서 그들 공동체를 위한 사절 역할을 한다. 이러한 사절 역할은 가톨릭 참가자들에게 위에서 제시된 기준들을 각별히 따를 것을 요구한다. 교회 일치 대화나 모든 협력은 언제나 어떤 의미로 “은사들의 교환”인데, 그러한 교환에서 가톨릭 전통이 담고 있는 수많은 풍요로움이 참으로 제공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러한 기준들이 필요한 것이다.103)

50. 신학이 교회적 친교 안에 가톨릭 신학자들 전체의 공동체와 전문적이면서도 기도와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는 협력 안에서, 상호 존중과 지지의 정신으로, 신자들의 필요와 의견에 그리고 교회 목자들의 인도에 주의를 기울이며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가톨릭 신학의 원리들 가운데 하나이다.

6. 세상과 대화하며

51. “하느님의 백성은 온 누리에 충만하신 주님의 성령께 인도되고 있음을 믿는다.”104)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현대 세계의 “사건과 요구와 염원 안에서” 어떤 것들이 참으로 성령의 활동의 표지인지를 식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단언했다.105) “이러한 임무를 완수하고자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signa temporum perscrutandi)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 세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교회는 현세와 내세의 삶의 의미 그리고 그 상호 관계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그 세계의 기대와 열망 그리고 때로는 극적이기도 한 그 특성을 인식하고 이해하여야 한다.”106)

52. 세상 안에서 신앙을 가지고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삶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위기들을 해석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모든 이들은 대화와 논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거기에서는 불가피하게 신앙에 관한 질문이 제기되며 또 그에 대한 응답이 요청된다. 말하자면 교회 전체는 복음과 일상생활의 접촉면에서 살고 있는 것이고, 또한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따라 과거와 미래의 경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는 언제나 대화하고 있고 언제나 움직이고 있으며 세례 받은 이들의 친교 안에서 모든 이들이 역동적으로 이에 참여하고 있지만, 공의회가 강조하는 바와 같이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특별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백성 전체, 특히 사목자들과 신학자들의 소임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현대의 다양한 말을 경청하고 식별하고 해석하며 이를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계시 진리가 언제나 더 깊이 받아들여지고 더 잘 이해되고 더욱 적절히 제시될 수 있다.”107)

53. 이 점에 있어 신학은 특별한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 시대의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조류들과 끊임없이 대화함으로써, 그리고 나름대로의 고유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이러한 발전들을 연구하는 다른 학문들에 대한 개방을 통하여, 신학은 신자들과 교도권으로 하여금 인간 역사의 발전들, 사건들, 경향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성령께서 교회와 세상을 향해 말씀하시는 방법들을 식별하고 해석하도록 도울 수 있다.

54. ‘시대의 징표’는, 그 중요성이나 영향력으로 인해 어떤 의미에서 한 시기를 규정하고 그 시대 인류의 특수한 요청이나 열망들을 표현해 주는 인간 역사의 사건이나 현상들로 이해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대의 징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공의회가 세상의 역사성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요한 17,14.16 참조) 세상 안에 있는(요한 17,11.15.18 참조) 교회의 역사성도 온전히 인식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세상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교회와 무관한 문제일 수가 없다. 세상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증언하며 인간 삶의 드라마에 참여하는 장소인 것이다.

55. 지난 몇 세기 동안에는 주요한 사회적, 문화적 발전들이 이루어졌다. 역사성의 발견, 계몽주의와 같은 운동들, 프랑스 혁명(자유, 평등, 박애라는 그 이상과 함께), 여성 해방과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한 운동, 평화와 정의를 위한 운동, 해방과 민주화의 운동, 환경 운동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역사의 모호성으로 인하여, 교회는 과거에 때로는 이러한 운동들이 가톨릭 교리와 신앙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만을 보고 이들에 대해 지나치게 경계하여 그들이 지닌 의미를 소홀히 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들은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 덕분으로, 예언자적인 개별 신앙인들의 분명한 시각 덕분으로, 그리고 신학자들이 인내를 가지고 주변 문화와 대화한 덕분으로 점차 변화되기에 이르렀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보다 더 준비된 자세로써, 복음의 빛에 비추어 더 나은 식별이 이루어졌다. 모든 경우에 식별은 복음에 병립될 수 있는 요소들과 복음에 대립되는 요소들을, 그리고 긍정적인 공헌들과 이념적인 측면들을 주의 깊게 구별해야만 하지만, 그 결과로 얻어지는 세상에 대한 더욱 명민한 이해는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더욱 통찰력 있는 인식을 촉진하지 않을 수 없다.108)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56. 인간 문화의 세계가 교회의 활동에서 유익을 얻는다면, 교회 역시 “인류의 역사와 발전에서” 도움을 얻는다. “지난 여러 세기의 경험, 학문의 진보, 인간 문화의 다양한 형태 속에 숨어 있는 보화들은 인간 자신의 본성을 더욱 충만하게 밝혀 주고, 진리를 찾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며, 교회에도 도움이 된다.”109) 이 길들을 더 잘 비추고 넓혀 가기 위하여 다른 분야들과 학문들과 문화들과의 유익한 관계를 설정하고자 하는 힘든 작업은 바로 신학자들의 고유한 임무이며, 시대의 표징들을 식별하는 것은 그로부터 제기되는 복잡한 해석학적 문제들이 있음에도 신학적 시도를 위한 중요한 기회들을 제공한다. 많은 신학자들의 작업 덕분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자신의 가르침에 연관되는 시대의 다양한 징표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110)

5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최종적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장소들과 문화들 안에서도 그분 목소리의 반향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열려 있다(사도 14,15-17; 17,24-28; 로마 1,19-20 참조). 공의회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민족적 종교적 전통에 익숙해져야 하고 그들 안에 감추어진 말씀의 씨앗을 기꺼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찾아내야 한다.”111)고 촉구했다. 특별히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가 비그리스도교들 안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그 종교들의 계율과 교리들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112) 이러한 씨앗들을 찾아내고 그러한 빛들을 식별하는 것 역시, 종교 간 대화에 중요한 기여를 해야 할 신학자들의 특별한 임무이다.

58. 세상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는 것은 가톨릭 신학의 기준들 가운데 하나이다. 신학은 교회가 하느님의 계시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시대의 표징들을 읽고, 이로써 자신의 삶과 사명에서 유익을 얻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제3장

하느님의 진리를 설명함

59. 신앙 안에 받아들여진 하느님 말씀은 믿는 이의 지성과 이해에 빛을 비추어 준다. 계시는 인간 정신에 의해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을 지닌 이성은 계시된 진리를 능동적으로 수용한다.113) 이 말씀이 그의 가장 깊은 질문들에 응답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움직여져 그 말씀을 자신 안에 흡수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계시의 풍요로움을 남김없이 파악할 수 있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으면서도, 이성은 하느님 말씀의 가지성(可知性)을 인정하고 탐구하며 –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 –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제공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이해에 상응하는 이성적이고 학문적인 방식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표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60. 이 장에서는 현재의 여러 쟁점들을 다루면서 세 측면의 연구를 통하여, 모든 지적 탐구의 영역 안에서 자신의 참되고 대체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성적 인간 활동인 신학의 몇 가지 본질적 측면들을 검토할 것이다. 첫째, 신학은 신앙으로 비추어진 이성(ratio fide illustrata)의 작업으로서, 계시에 표현된 하느님의 말씀을 학문적인 담화로 옮겨 놓고자 한다. 둘째, 신학이 사용하는 이성적 방법들의 다양성과 그 결과로 생겨나는 신학의 전문 분야들의 다수성은, 어떤 경우이든 계시의 빛에 비추어 본 하느님에 관한 담화로서의 신학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단일성과 병립이 가능하다. 셋째로, 신학은 영적 체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신학은 영적 체험을 비추어 주지만, 또한 역으로 영적 체험을 통해 신학이 양육된다. 신학은 그 본성상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의 초월성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통해 진정한 지혜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1. 하느님의 진리와 신학의 합리성

61. 이 단락에서는 신학의 학문적 본성과 관련하여 신학사의 몇 가지 양상들을, 그 초기의 도전들로부터 오늘날의 도전들에 이르기까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도록, 하느님의 진리를 알도록 부름을 받았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오셨고(요한 18,37 참조),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으로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 이 진리는 “빛의 아버지”(야고 1,17)로부터 내려오는 선물이다. 이렇게 빛을 비추어 주기 시작하신 분은 하느님 아버지이시고(갈라 4,4-7 참조), 바로 그분께서 이를 모두 완성하실 것이다(묵시 21,5-7 참조). 성령께서는 신자들을 위로하시는 파라클레토스이시고, 또한 동시에 진리를 감도하고 비추시며 “모든 진리 안으로”(요한 16,13) 신자들을 인도하시는 “진리의 성령”(요한 14,16-17)이시다. 하느님의 충만한 진리는 인류와 창조의 마지막 완성에서 최종적으로 계시될 것이다(1코린 15,28 참조). 이에 따라, 삼위일체의 신비는 신학적 관조의 중심이 되어야만 한다.

62.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하느님의 진리는 인간 이성과 만난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창세 1,26-27) 인간은 이성의 빛으로 사물들의 외양을 넘어 그 깊은 진리를 통찰하고 이로써 보편적 실재에 자신을 열어 놓을 수 있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공통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한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인간 정신은 직관적이면서 또한 이성적이다. 인간 정신이 직관적이라는 것은 실재와 사고의 제1원리들을 저절로 파악한다는 점에서이다. 이성적이라는 것은, 이 제1원리들에서 출발하여 분석과 탐구의 엄격한 절차들을 사용함으로써 점차로 전에는 알지 못하던 진리들을 발견하고 이들을 일관성 있게 조직한다는 점에서이다. ‘학문’은 이성적 의식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형태로서, 사물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지금과 같은 상태로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의 형태를 지칭한다. 인간 이성(human reason)은 그 자체로 창조된 실재의 일부로서, 풍요로움과 복잡성을 지닌 실재에 가지성(可知性)의 구조를 투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며, 실재의 내재적인 가지성에 자신을 순응시킨다. 대상에 따라, 곧 연구하고 있는 실재의 고유한 양상에 따라 이성(reason)은 대상 자체에 적합한 상이한 방법들을 적용한다. 그러므로 이성적 합리성(rationality)은 하나이지만 다양한 형태들을 취하며 그 모두는 실재의 가지성을 파악하기 위한 엄밀한 도구들이다. 이에 따라 학문도 다양한 형태를 띤다. 각 학문은 고유한 대상과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에는 ‘학문’(science)이라는 용어를 (수학, 경험 과학 등의) 자연 과학에만 유보시키고 이러한 학문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지식은 비이성적이라고 여기거나 단순한 의견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학문과 이성적 합리성(rationality)에 대한 이러한 일의적 시각은 축소적(縮小的)이며 부적합하다.

63.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시된 진리는 믿는 이의 이성을 요구하고 동시에 이를 고무시킨다. 한편으로, 하느님 말씀의 진리는 믿는 이에 의하여 숙고되고 입증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이 지상에서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믿는 이의 열망이 형태를 취한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가 시작된다.114) 그 목적은 결코 신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115) 오히려 그것은 믿는 이의 신앙 행위로부터 자연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며, 실상 반대에 직면하여 신앙이 흔들리는 이들을 도울 수가 있다.116) 믿는 이의 이성적 성찰의 결실은 신앙의 진리들에 대한 이해이다.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믿는 이는 구원 역사의 여러 단계들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파악하게 되며, 또한 서로를 비추어 주는 신앙의 여러 신비들 사이의 관계성도 파악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신앙은 이성 자체를 자극하고 그 한계를 넓혀 준다. 이성은 혼자서는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길들을 탐구하도록 각성되는 것이다. 이성은 하느님 말씀과의 만남을 통해 풍요로워진다. 그 만남에서 새롭고 예상하지 않았던 지평들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117)

64. 그러므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에서 설명하듯이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대화는 신앙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또한 이성에게도 필요하다.118) 이성을 거부하거나 멸시하는 신앙은 미신이나 광신에 빠질 수 있고, 의도적으로 신앙에 자신을 닫아 놓는 이성은 크게 진보할 수 있다 해도 인식될 수 있는 것의 절정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화는 진리가 다양한 측면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단일성을 이루기 때문에 가능하다.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와 이성에 의해 발견된 진리는 동일한 원천에서, 곧 이성을 창조하시고 신앙을 주신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서로 모순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119) 사실상 서로를 지탱해 주고 비추어 준다. “실로 올바른 이성은 신앙의 기초를 드러낸다. 그리고 신앙의 빛으로 비춰진 이성은 신적인 것들에 대한 학문을 자라게 한다. 한편 신앙은 이성을 오류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고 보호해 주며, 이성에게 다각적인 인식들을 가르쳐 준다.”120)

65. 고대의 사상에서는 종교와 철학이 자주 대립되었음에도 그리스도교 신앙이 처음부터 이들을 더 넓은 전망 안에서 조화시켰던 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실상, 초기 그리스도교는 종교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자주 그 자신을 새로운 종교로서가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참된 철학으로 간주했었다.121) 그리스도교는 스스로 하느님에 대한 진리와 인간 실존에 대한 진리를 모두 가르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교부들은 진리를 위하여 투신하면서 의식적으로 그들의 신학과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던 ‘신화적’이고 ‘정치적’인 신학 사이에 거리를 두었다. 신화적 신학은 신들의 이야기를 신적인 것의 초월성을 존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술했고, 정치적 신학은 종교를 순전히 사회학적이고 실용주의적으로만 접근하여 진리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교부들은 그리스도교를 신들의 ‘본성’에 대한 합리적인 조명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과 나란히 놓았다.122) 그러나, 만물의 원리인 로고스(Logos)가 얼굴과 이름을 가진 인격적 존재이고 그 로고스가 인류와의 우정을 추구했다고 가르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철학적인 신(神) 개념을 정화하고 변모시켰으며 사랑(agape)의 역동성 안으로 그 개념을 끌어들였다.

66. 동방의 위대한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철학의 만남을 계시의 진리, 곧 로고스의 진리를 성찰하기 위한 섭리적인 기회로 보았다. (삼위일체 위격들의 동일 본체성, 위격적 결합 등과 같은) 신앙의 신비들을 옹호하고 설명하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그러나 비판적으로 철학적 개념들을 채택했고 신앙의 이해를 위하여 이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신학의 부정적(否定的, apophatic) 차원, 곧 신학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차원도 확고하게 강조하였다. 곧, 신학은 결코 그 신비를 축소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123) 서방에서는 교부 시대의 끝 무렵에 보에티우스(Boethius)가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의 학문적 성격을 강조하는 신학 방법론을 열어 놓았다. 그는 자신의 저서 『신학 소품들』(Opuscula Sacra)에 철학의 모든 자료들을 수집해 놓고 그것을 그리스도교 교리를 설명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도록 했으며, 신앙에 대한 체계적, 공리적 설명을 제공하였다.124) 정교한 철학적 도구들을 사용하고 어떤 체계화를 추구하는 이러한 새로운 신학 방법론은 동방에서도 역시 어느 정도 발전되었는데, 다마스쿠스의 요한 성인에 의한 작업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67. 중세 시기 전체를 통해서, 특히 대학들이 마침내 설립되고 스콜라적 방법론이 발전되면서 신학은 점차 분화되기에 이르렀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의 다른 형태들(예를 들어 영적 독서와 설교)로부터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특히 그의 『분석론 후편』(Analytica Posteriora)에서 제시된 학문 기준에 따라 진정한 학문으로서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곧, 신학은 논증을 통하여 어떤 것이 왜 이러하며 다른 식이 아닌지를 입증할 수 있었고, 또한 논증을 통하여 원리들로부터 출발하여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해될 수 있는 내용들을 합리적이고 학문적인 종합의 형태로 제시하려 시도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신앙의 조항들(articles of faith)을 신학의 학문 안에서 원리들로 여겼다. 이어서 신학자들은 계시된 진리를 정확하게 확립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것이 이성에 배치되지 않음을 입증함으로써 또는 그 내적인 가지성을 입증함으로써 그 진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이성을 사용하였다. 이 마지막 경우에 그들은 모든 진리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 따라서 다른 진리들을 비추어 줄 수 있는 진리들이 무엇인지를 찾으며 진리들의 위계(ordo)를 양식화했다.125) 그들은 신비들 사이에서의 가지적인 관계들을(nexus mysteriorum) 분명히 진술하였고,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종합은 하느님 말씀의 가지적인 내용을 인간 이성의 요구와 능력에 따라 학문적인 방식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적 이상은 결코 이성주의적인 가설적-귀납적 체계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언제나 인간 이성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관조되는 실재를 모델로 형성된 것이었다. 나아가, 스콜라 신학자들이 다양한 과제들을 수행했고 성경 주해와는 구별되는 문학 장르들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생생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바로 성경이었다. 신학은 말씀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을 정확히 목표로 하였고, 보나벤투라 성인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그들 자신이 무엇보다도 ‘성경 교수들’(magistri in sacra pagina)이라고 여겼다. ‘적합성에 의한 논증’(argumentum ex convenientia)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신학자는 선험적으로(a priori) 추론하지 않지만, 계시를 경청하고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의 계획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하신 지혜로운 길들을 찾는다. 그러므로 확고히 신앙에 기초를 두고, 신학은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과 모든 사물들에 대해 소유하고 계신 지식에 대한 인간적 참여라고 이해하였다. “마치 모든 것에 대한 단일하고 단순한 신적 지식의 압인(壓印)과 같은 것이다”(quaedam impressio divinae scientiae quae est una et simplex omnium).126) 이것이 신학의 단일성의 일차적 원천이었다.

68. 중세 말엽에 이르러 신학을 중심으로 통일되어 있던 그리스도교 지혜의 구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철학과 여타의 세속 학문들은 점점 더 신학에서 분리되었고, 신학 자체는 여러 전문 분야들로 단편화되어 때로는 그들의 깊은 연관성을 고려하지 못했다. 신학 편에서 하느님 말씀에 거리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래서 어떤 경우에 신학은 종교적인 문제들에 적용된 순전히 철학적인 성찰이 되기도 했다. 동시에, 아마도 이렇게 성경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신학의 그 신(theo)-학적인 차원과 영적인 목적이 간과되었고 영성 생활은 합리화를 추구하는 대학의 신학과 분리되어, 심지어는 그와 대립되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127) 이렇게 단편화된 신학은 그리스도교 백성의 실제 생활과 점점 더 멀어졌고, 근대성(modernity)의 도전에 대응할 준비를 채 갖추지 못하였다.

69. 종교 개혁 시기에 스콜라 신학은 신앙의 합리성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고 죄가 이성에 미친 손상의 무게는 지나치게 경시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가톨릭 신학은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보는 인간학과 죄에 의하여 상처를 입었지만 파괴되지는 않은 이성의 능력과 책임을 계속해서 크게 강조함으로써, 그리고 교회가 참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신앙의 학문이 참으로 발전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이에 대응하였다. 이렇게 가톨릭 교회는 철학, 문헌학, 그리고 역사학 및 자연 과학과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70. 그러나 계몽주의 시기 동안 신앙과 신학에 대하여 제기된 비판은 더욱 급진적이었다. 어떤 면에서, 계몽주의는 종교적인 자극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계몽주의자들은 이신론(deism)과 손을 잡으면서부터 역사의 사실적 우연성과 이성의 진정한 필요들 사이에는 화해될 수 없는 차이가 있다고 보게 되었다. 그들에 따르면 진리는 역사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계시는 역사적 사건이기에 인간에게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원천이 될 수 없었다. 많은 경우에 가톨릭 신학은 계몽주의 사상의 도전에 대하여 방어적 태도로 대응했다. 신앙의 지혜적 차원보다는 호교론을 우선했고, 이성의 자연적 질서와 신앙의 초자연적 질서를 과도하게 분리시켰으며,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을 크게 중시하고 신앙의 신비들을 파악하는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를 너무 경시하였다. 이러한 만남에서 가톨릭 신학은 스스로 취했던 전략 때문에 많은 면에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그 최선의 모습들에서는 계몽주의 및 그 철학적 비판과의 건설적인 대화를 추구하기도 했다. 성경이나 교회 가르침과 관련해서는, 순전히 ‘가르침을 주는 것으로’(instructional) 보는 계시 개념이 신학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계시 개념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으로 새롭게 형성되었고, 따라서 역사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들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아직도 이해될 수 있었다.

71. 오늘날에는 새로운 도전이 있으며, 가톨릭 신학은 고전적 이성 자체에 대한 탈근대(post-modern)의 위기에 대응해야만 한다. 이 위기는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에 심각한 의미를 내포한다. ‘진리’의 개념은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진리’가 존재하는가? 유일한 ‘진리’를 말할 수 있는가? 그러한 개념은 불관용과 폭력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가톨릭 신학은 전통적으로 현상들을 넘어 실재에, 그리고 사물들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에 대한 강한 감각을 지니고서 작용해 왔지만, 오늘날 이성은 흔히 나약하고 원칙적으로 ‘실재’에 도달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가톨릭 신학의 과거 모델들에서 중요한 것이었던 철학의 형이상학적 방향 설정이 계속해서 깊은 위기를 겪고 있다는 문제가 생겨난다. 신학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형이상학에 새 생명을 주도록 도울 수 있다. 그렇지만 가톨릭 신학은 하느님과 진리 문제에 대하여 모든 현대 철학들과 대화하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다.

72. 회칙 「신앙과 이성」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철학적 회의주의와 신앙주의를 모두 거부하고 철학과 신학 사이의 유대를 새롭게 할 필요성을 환기시키셨다. 그분은 철학을 자율적인 학문으로, 그리고 신학의 결정적인 대화 상대로 인정하셨다. 또한 신학이 필연적으로 반드시 철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철학 없이는 신학이 자신의 주장들의 타당성을 적합하게 검토할 수도 없고, 그 개념들을 분명하게 할 수도 없으며, 다양한 사상 학파들을 올바로 이해할 수도 없다.128) 신학의 “원천과 출발점”은 역사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이며, 신학은 이 말씀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요한 17,17 참조), “인간의 진리 탐구”인 철학은 하느님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129)

73.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들을 학문적, 합리적으로 논증하여 제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가톨릭 신학의 기준 가운데 하나이다. 이를 위하여 신학은 이성을 사용해야 하고, 신앙과 이성, 무엇보다도 철학적 이성 사이의 강한 연관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신앙주의와 이성주의를 모두 극복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130)

2. 신학의 단일성과 그 방법 및 분야의 다수성

74. 이 단락에서는 신학과 신학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신학과 다른 학문들 사이의 관계를 검토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하듯이, 근본적으로 “신성(神性)에 관한 사유 내지 강화(講話)”131)로 이해되는 가톨릭 신학은 그 본질상 하나이며, 학문으로서의 고유한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신학의 고유한 대상은 한 분이고 유일하신 하느님이시며 신학은 그 대상을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곧 계시에 의해 조명된 이성을 사용하여 연구한다. 토마스 성인은 『신학 대전』의 서두에서 신학 전체가 하느님과 관련되어, 하느님의 관점에서(sub ratione Dei) 이해된다고 설명한다.132) 신학자들이 숙고하도록 인도된 매우 다양한 문제들은 이렇게 하느님과의 궁극적인 연관성 안에서 그 단일성을 발견한다. 다양한 신학 논고들에 포함된 모든 ‘신비들’은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유일한 절대적 신비, 곧 하느님의 신비에 관련된다. 이 신비와의 관련성이 그 광범위한 주제 문제들과 맥락들 속에서도 신학을 하나로 결합시키며, ‘(하느님의) 신비에로 환원시킴’(reductio in Mysterium)이란 개념은 신학적 명제들을 깊이 결합시키는 역동성을 드러내는 매우 값진 표현이다. 하느님의 신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계시되었으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신학 과목들이 “그리스도의 신비와 구원 역사의 관계를 더욱 생생하게 깨닫도록 개편”133) 되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75. 교부들은 ‘신학’이라는 용어를 단수형으로만 알았다. 그들에게 ‘신학’은 ‘신화’가 아니라 하느님의 로고스 그 자체였다. 인간 정신이 로고스의 계시를 통해 하느님의 성령으로 각인되는 그만큼, 그리고 그분의 본질과 행위의 무한한 신비를 관상하도록 인도되는 그만큼, 인간은 또한 신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스콜라 신학에서, 신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된 문제들의 다양성은 여러 방법들의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었지만 신학의 근본적인 단일성은 결코 의문에 처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중세 말에는 스콜라 신학과 신비신학, 사변 신학과 실증 신학 등을 구별하고 심지어는 분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근대에는 ‘신학’이라는 말이 점점 더 복수형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여러 저자들, 시대들, 또는 문화들의 ‘신학들’에 대해 말하는데, 실상 이는 ‘신학들’의 특징적 개념들, 중요한 주제들, 그리고 고유한 전망들을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76. 근대에 이렇게 ‘신학들’의 다수성이 나타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다.

- 신학 안에서는 성서학, 전례학, 교부학, 교회사, 기초 신학, 조직 신학, 윤리 신학, 사목 신학, 영성 신학, 교리 교육, 교회법 등의 여러 분야들로 내부적인 전문화가 점점 더 이루어졌다. 신학의 학문적 본성과 연구의 요구들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발전은 불가피한 것이고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철학, 언어학, 역사학, 사회 과학, 자연 과학, 생명 과학 등 다른 학문들의 외부적 영향에 따라 신학적 양식의 다양화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로, 오늘날 가톨릭 신학의 중심부에는 초월론적 신학과 구원사적 신학, 분석적 신학, 신스콜라적인 형이상학적 신학, 정치 신학과 해방 신학 등 매우 다양한 사고 형태들이 공존한다.

- 신학의 실천과 관련하여 주제, 장소, 제도, 지향, 맥락, 관심들의 다수성이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문화의 다수성과 다양성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134)

77. 신학들의 다수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필요하며 정당하다.135)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적 진리 자체의 풍요로움에서 나오는 귀결이다. 인간은 그 진리의 특정한 면들만을 파악할 뿐 그 전체를 파악할 수 없으며, 더욱이 최종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그 진리를 항상 새로운 눈으로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신학이 숙고하고 해석하는 대상들(예를 들어, 하느님, 인간, 역사적 사건들, 본문들)의 다양성과 인간 질문의 다양성 자체로 인하여, 신학은 연구되는 대상의 본성에 따라 불가피하게 다양한 분야들과 방법들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136) 신학들의 다수성은 실상 모든 장소와 모든 종류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단일한 복음을 선포하려고 노력하는 교회의 보편성을 반영한다.

78. 다수성에는 물론 한계가 있다. 신학의 정당한 다원주의는 상대주의, 정통을 벗어난 가르침 또는 이단과는 다른 편에 서 있으며 거기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그러나 만일 다양한 신학 분야들 사이에 소통이 없거나, 또는 신학의 다양한 형태들을 – 그들 자신과 다른 이들 모두에게 – 가톨릭 신학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하는 상호 합의된 기준들이 없다면, 다원주의 자체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피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학을 이성적인 작업인 동시에 신앙의 학문(scientia fidei)이며 하느님의 학문(scientia Dei)으로서 보는 근본적인 공통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로써 모든 개별 신학은 공통되고 보편적인 하나의 진리와 관련하여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79. 오늘날 신학들의 다수성 가운데서 단일성을 찾는 일은 여러 형태들로 이루어진다. 신학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교회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는 것에 대한 강조, 대화와 학제 간 협력의 실천, 그리고 신학이 관계하는 다른 학문 분야들이 신학에 대한 자신들의 ‘교도권’을 행사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교회 안에 (전승 자체[Tradition]와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것과 분리될 수는 없는137)) 공통된 신학 전통이 있다는 것은 신학의 단일성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다. 신학은 공통된 기억을 소유하고 있어서, 어떤 역사적 업적들은 (예를 들어, 동방과 서방 교부들의 저술들, 그리고 보편적 박사[Doctor communis]인 토마스 성인의 종합138)) 오늘날의 신학을 위한 기준점으로 남아 있다. 신학에서 과거 전승의 어떤 측면들은 버려질 수 있고 때로는 버려져야만 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학자의 작업은 그에 선행하는 전승을 비판적 기준으로 삼지 않을 수가 없다.

80. 오늘날 기본적으로 구분되는 신학의 다양한 형태들은 (예를 들어, 성서 신학, 역사 신학, 기초 신학, 조직 신학, 실천 신학, 윤리 신학) 서로 다른 원천, 방법, 과제들을 특징으로 하지만, 그들 모두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참된 지식을 추구하는 노력에 의해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 사이에는 긴밀한 통교와 협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화와 학제 간 협력은 신학의 단일성을 보증하고 표현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도구들이다. 단수형의 ‘신학’은 양식이나 개념의 획일성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진리를 향한 공통된 추구,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위한 공통된 봉사, 그리고 한 분 하느님에 대한 공통된 헌신을 지향하기 위한 것이다.

81. 고대에서부터 신학은 철학과 동반자적 관계 안에서 작업해 왔다. 이러한 동반자적 관계는 아직도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지만, 현대에 이르러 신학을 위한 더 많은 동반자들이 발견되었다. 성경 연구와 교회사는 본문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들의 발전으로부터, 그리고 사료의 역사적 유효성을 확인하고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서술하는 새로운 기술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왔다.139) 조직 신학, 기초 신학, 윤리 신학은 모두 자연 과학, 경제학, 의학과의 만남을 통해 유익을 얻었다. 실천 신학은 사회학, 심리학, 교육학과의 만남을 통해 도움을 받았다. 이 모든 접촉들에 있어, 가톨릭 신학은 사용된 방법과 학문들의 정당한 일관성을 존중해야 하지만, 신학자 자신의 정체성과 동기 부여의 일부인 신앙의 빛에 비추어 이들을 또한 비판적 관점에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140) 다른 학문 분야에서 가져온 방법들로 얻어진 부분적인 결과들은 신학자의 작업에 결정적일 수 없으며, 신학의 고유한 역할과 논증에 비판적으로 통합되어야만 한다.141) 다른 학문들의 지식과 방법들을 충분한 비판 없이 사용한다면 아마도 신학 작업의 왜곡과 단편화를 가져올 것이다. 사실, 이미 교부들도 신앙과 철학을 너무 성급하게 융합시키는 것이 이단의 한 근원이 된다고 밝혀내었다.142) 한마디로, 다른 학문 분야들이 신학에 그들 자신의 ‘교도권’을 행사하도록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 신학자는 분명 다른 학문 분야들이 제공하는 자료들을 받아들여 활용해야 하지만 이는 신학 자체의 고유한 원리들과 방법들의 빛에 비추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82. 이와 같이 신학이 다른 학문들로부터 유래하는 자료들을 비판적으로 융합시키고 통합함에 있어 철학은 그 중개 역할을 해야 한다. 다양한 학문들에서 얻어진 결과들을 보다 더 보편적인 전망 안에 삽입시키는 것은 이성적 지혜인 철학의 몫이다. 이러한 중개 역할을 위해 철학에 의지하는 것은 신학자로 하여금 학문적인 자료들을 마땅히 조심스럽게 사용하도록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생명의 진화 문제에 관련하여 얻어진 과학적 지식들은 신학에 의하여 고찰되기 전에 먼저 그 가치와 의미를 결정할 수 있도록 철학의 빛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143) 또한 철학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연구 방법과 연구 결과들을, 그와는 다른 접근을 요구하는 종교적 문제들에 일의적인 방법으로 적용하려는 유혹을 피하도록 도와준다.

83. 신학과 종교학 내지 종교적 연구들 (예를 들어 종교 철학, 종교 사회학) 사이의 관계는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종교학과 종교적 연구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본문, 제도, 현상들을 연구하지만, 그들의 방법론적 원칙의 본성상 이 연구는 외부로부터 이루어지고 그들이 검토하는 진리에 대해서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교회와 그 신앙은 다른 대상들과 다를 것이 없는 단순한 연구 대상들일 뿐이다. 19세기에는 신학과 종교학(religious sciences)/종교 연구(religious studies) 사이에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신학이 신앙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학문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었다. 종교학이나 종교 연구만이 ‘객관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학과 종교 연구는 신앙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반(反)신학적이라고 일컬어졌다. 이러한 옛 논쟁들은 지금도 가끔 다시 나타나지만, 오늘날은 양쪽 편의 유익한 대화를 위한 더 나은 조건들이 마련되었다. 한편으로, 종교학과 종교 연구는 이제 신학적 방법들의 구조 안으로 통합되어 있다. 주석학과 교회사뿐만이 아니라 사목 신학과 기초 신학을 위해서도 종교적 개념과 주제와 예식 등의 역사와 구조와 현상을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연과학들과 현대 인식론은 진리를 추구하는 중립적인 입장이라는 것은 결코 없다는 것을 더욱 일반적으로 입증했다. 탐구자는 언제나 특정한 전망과 통찰과 전제들을 동반하는데, 바로 이것들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연구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과 종교학/종교 연구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남아 있다. 신학은 하느님의 진리를 그 주제로 삼으며 그 주제에 관하여 신앙을 가지고 하느님에 비추어 성찰하는 데 비하여, 종교학과 종교 연구는 종교 현상들을 주제로 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방법론적으로 배제하고 문화적인 관심으로써 그 주제에 접근하는 것이다. 신학은 교회와 그 신앙에 대하여 내부로부터 고찰한다는 점에서 종교학과 종교 연구를 넘어서지만, 이들이 외부로부터 행하는 탐구들로부터 또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84. 가톨릭 신학은 다른 학문들의 정당한 자율성을 인정하고 또한 거기에서 발견될 수 있는 지식에 대한 전문적인 능력과 노력도 인정한다. 그리고 가톨릭 신학 자체가 여러 학문들의 발전을 촉진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학은 다른 학문들이 종교적인 주제들을 다룰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신학은 건설적인 비판을 통하여, 다른 학문들이 이성주의의 영향으로 지니게 된 반(反)신학적인 요소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돕는다. 이성주의와 실증주의는 신학을 학문들의 영역에서 몰아냄으로써 학문들 자체의 영역과 힘을 축소시켰다. 가톨릭 신학은 학문들이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모든 형태들을 비판한다. 이는 곧 자신을 축소시키고 빈곤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144) 대학 생활의 중심에 신학과 신학자들이 현존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현존으로 인해 가능하게 되는 다른 학문 분야들과의 대화는 지성적 삶의 폭넓고 유비적이며 통합적인 시각을 촉진시키는 데에 도움을 준다. 신학은 하느님의 학문(scientia Dei)이며 신앙의 학문(scientia fidei)으로서 학문들의 교향곡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학문 세계에서 자신의 정당한 위치를 주장하게 된다.

85.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라는 통일된 계획 안에 다수의 연구와 방법들을 통합하려 시도하며, 진리의 단일성을 주장하고 따라서 신학 자체의 근본적인 단일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가톨릭 신학의 기준 가운데 하나이다. 가톨릭 신학은 다른 학문들의 정당한 방법들을 인정하고 자신의 고유한 연구에서 이들을 비판적으로 활용한다. 가톨릭 신학은 비판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지 않고 학문적 대화를 환영한다.

3. 학문과 지혜

86. 이 마지막 단락에서는 신학이 학문일 뿐 아니라 또한 지혜이고, 모든 인간적 지식과 하느님 신비 사이의 관계성에 있어 특별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숙고한다. 인간은 부분적인 진리들로 만족하지 않고, 모든 사물들과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궁극적 진리에 대한 이해 안으로 지식의 다양한 요소들과 영역들을 통합하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지혜에 대한 추구는 의심할 여지없이 신학 자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신학을 영적인 체험과 또한 성인들의 지혜와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한다.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 가톨릭 신학은 결코 충만하게 파악되거나 정통하게 될 수 없는 궁극적 진리의 초월성을 인정하도록 모든 이를 초대한다. 신학은 그 자체로서 지혜일 뿐 아니라, 또한 다른 학문 분야들을 위하여 지혜를 향한 초대가 되기도 한다. 학문적 토론과 대학 생활에서 신학이 현존함으로써, 모든 이에게 인간 이성의 지혜적 소명을 상기시키고, 또한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말씀인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라는 중요한 질문을 일깨우는 유익한 효과를 가능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87. 구약 성경에서는, 지혜 신학의 핵심 메시지인 “지혜의 근원은 주님을 경외함”이라는 말씀이 세 번 나타난다(시편 111[110],10. 참조: 잠언 1,7; 9,10). 이러한 주장의 기초는 하느님의 지혜가 창조와 역사 안에 작용하고 있으며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세상과 사건들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리라는 이스라엘 현자들의 통찰이다(잠언 7장 이하; 지혜 7장 이하 참조). ‘하느님을 경외함’은 하느님 앞에서(coram Deo) 인간이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이다. 지혜는 하느님에 대한 신심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자기 삶의 방향을 잡아 나가는 기술이다. 코헬렛과 욥기에서는 하느님의 생각과 길에 대한 인간 이해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인간의 지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지혜의 지평 안에서 인간의 지혜를 심화하기 위해서이다.

88. 예수님 자신께서 이스라엘의 이러한 지혜 전통 안에 계셨고, 그분 안에서 구약 성경의 계시 신학이 변모된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라고 기도하셨다. 전통적 지혜를 이렇게 뒤흔들어 놓는 것은 새로운 무엇을 선포하는 복음적 맥락에서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종말론적 계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신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그분의 유명한 초대에 이르게 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7-29). 이 ‘배움’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성에서 나온다. 그분만이 성경을 열어 주신다(루카 24,25-27; 요한 5,36-40; 묵시 5,5 참조). 하느님의 진리와 지혜가 그분 안에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89.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저 “어리석음”으로 여기는 “세상의 지혜”를 비판한다(1코린 1,18-20). 바오로는 이 어리석음이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지혜”로서 지금 계시된 것이라고 선포한다(1코린 2,7). 십자가는 하느님 구원 계획의 결정적인 요소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시다(1코린 1,18-25). 믿는 이들 곧 “그리스도의 마음”(1코린 2,16)을 지닌 이들은 이 지혜를 받고, 이 지혜가 그들을 “하느님의 신비”에 다가갈 수 있게 해 준다(1코린 2,1-2). 중요하게 주목할 것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역설적인 지혜가 “세상의 지혜”에는 반대되지만 진정한 인간적 지혜에 반대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적 지혜를 초월하고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충만하게 한다.

90. 그리스도교 신앙은 곧 그리스의 지혜 추구와 만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 추구의 한계점들, 특히 지식(gnosis)만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 개념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지만, 또한 그리스인들로부터 몇 가지 참된 통찰들을 받아들여 병합시키기도 하였다. 지혜는 하나로 통합시키는 전망이다. 학문은 실재의 특정하고 제한적이며 분명하게 정의된 한 측면을 설명하려 노력하고, 연구 대상의 특성들을 설명하는 원리들을 부각시키지만, 지혜는 실재 전체의 통일된 전망을 제시하려 한다. 실제로 지혜는 가장 높고 가장 보편적이며 또한 가장 큰 설명력을 지닌 원인들에 따른 지식이다.145) 교부들에게 지혜로운 사람이란 지상 사물들의 규범인 하느님과 영원한 실재들에 비추어 만물을 판단하는 사람이었다.146) 그러므로 지혜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도 지니는 것이다.

91. 철학(philo-sophia)은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그 자신을 하나의 지혜로, 아니면 적어도 지혜를 사랑하며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특히 형이상학은 존재의 근본적인 신비를 중심으로 통합된 실재의 전망을 제시한다. 그러나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1코린 2,9)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더 높은 지혜를 향한 길을 열어 주신다.147) 철학의 순전히 인간적인 지혜를 초월하는 이 초자연적인 그리스도교의 지혜는 신학적 지혜와 신비적 지혜라는, 서로를 지탱해 주는 것이지만 혼동되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148) 신학적 지혜는 신앙으로 비추어진 이성의 작업이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신앙의 선물을 물론 전제한다 하더라도 습득된 지혜이다. 이는 가장 고귀한 계시 진리에 비추어 실재에 대한 통일된 설명을 제공하며, 그 자체로부터 고찰되고 동시에 창조와 역사 안에서의 그 행위로부터 고찰된 삼위일체라는 근본적 신비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것을 조명한다. 이에 관하여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에 의해 조명을 받은 이성이 참으로 인내와 열성과 신중함을 갖고 탐구한다면, 자연적으로 인식한 것에 대한 유비에 의해서든, 신비들의 자체적 연관 및 그것들과 인간의 최종 목적의 연관에 의해서든, 신비들에 대한 지극히 풍요로운 깨달음을 하느님의 도움으로 얻게 될 것이다.”149) 따라서 신학자의 이성적 작업에서 나오는 지적 관조는 참으로 지혜이다. 한편 신비적 지혜 또는 ‘성인들의 지혜’는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에서 도출되는 성령의 선물이다. 사실, 사랑은 인간 존재와 하느님 사이에 정서적인 공동 본성(affective connaturality)을 창조해 낸다.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 안에서 실제로 신적인 것을 체험함으로써 그것을 알게끔, 심지어는 그 ‘신적인 것을 견디어 내게끔’(pati divina)150)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 지혜는 비개념적인 지식으로서 종종 시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지혜는 관상으로, 그리고 평화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일치로 인도한다.

92. 신학적 지혜와 신비적 지혜는 형상적으로 구별되며, 이들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신비적 지혜는 결코 신학적 지혜를 대체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자 개인 안에서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나 그리스도교 지혜의 이 두 가지 형태 사이에 긴밀한 연관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한편으로, 동방과 서방의 교회 학자들의 모범이 보여 주듯이, 거룩함을 추구하는 강렬한 영성 생활은 진정한 신학을 위한 요구 조건이다. 참된 신학은 신앙을 전제하며 사랑으로 활력을 얻는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151) 이성은 신학에게 명철한 논리를 갖게 하지만, 마음은 이성을 정화시키는 자신만의 지혜를 지니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것, 곧 그들이 “성도(saint)로 부르심을 받았다”(1코린 1,2)는 것은 신학자들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신앙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제공하는 신학의 임무를 올바로 수행하는 것은 영적 체험의 진정성을 검증할 수 있게 해 준다.152) 그래서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자신의 수녀들이 신학자들의 조언을 구하기를 바랐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더욱 많은 은혜를 기도 중에 내리실 수 있도록 바랍니다. 그만치 선행과 기도는 튼튼한 기초 위에 바탕되어져야 할 것입니다.”153) 어떤 영적인 주장에 대해서든 그것이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인 것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는 교도권의 임무에 속한다.

93. 신학의 대상은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고, 신학자의 삶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반드시 각인되어 있어야 한다. 신학자는 실재 전체를 하느님과 관련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임무에서 자신의 삶을 제외시킬 수 없다. 진리에 대한 순종은 영혼을 정화시키며(1베드 1,22 참조),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야고 3,17). 따라서 신학적 추구는 신학자의 정신과 마음을 정화시켜야 할 것이다.154) 신학 작업의 이러한 특수한 성격은 신학의 학문적 특성을 전혀 침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거기에 깊이 부합된다. 그러므로 신학은 독특한 영성에 의한 특징을 지니게 된다. 신학자들의 영성에 필수적인 요소들은 진리에 대한 사랑, 마음과 정신의 회심을 위한 신속한 준비 태세, 거룩함을 향한 노력, 그리고 교회적 친교와 사명에 대한 헌신이다.155)

94.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봉사하도록 특수한 소명을 받았다. 그들이 받은 부르심과 은사들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 신비체와 또 그 모든 구성원들과의 특별한 관계 안에 존재하게 된다. 그들은 “성령의 친교”(2코린 13,13) 안에 살아가며, 거기에서 “교회가 끊임없이 생명을 얻고 자라나는”156) 성찬의 신비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도록 그들의 모든 형제자매들과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실상, 신앙의 신비들을 설명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들은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고, 곧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안에 계시며”, 그분의 살이 “성령으로 생명을 얻고 또 생명을 주게 되는”157) 성체성사에 특별히 결합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성체성사는 교회 생활의 “원천이며 정점”158)이고 “모든 복음화의 원천이며 정점”159)이듯이 또한 모든 신학의 원천이며 정점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심오한 차원에서 ‘신비적’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95. 그러므로 하느님의 진리는 단순히 체계적 고찰로 탐구되고 연역적인 추론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진리는 살아 있는 진리이며,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신”(1코린 1,30) 그리스도께 참여함으로써 체험되는 진리이다. 지혜로서의 신학은 연구되거나 체험된 신앙의 측면들을 모두 통합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진리에 봉사함으로써 이성적 관점에서 볼 때 엄밀하게 가능한 것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신학을 이렇게 지혜로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신학에 제기되는 두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첫째, 믿는 이들과 신학적 성찰 사이의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둘째,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이해를 확대시키는 길을 제공함으로써 다양한 지혜 전통들을 특징으로 하는 비그리스도교 문화들 안에서 교회의 사명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96. 신학을 고유하게 특징짓는 신비에 대한 감각은 신학적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를 갖게 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신비를 남겨 두지 않으려는 이성주의의 무모한 주장과 대조된다.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의 가르침은 핵심적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서 그 유사성을 언급할 수 있으려면 그들 사이의 더 큰 상이성을 언급해야 한다.”160) 신앙으로 조명되고 계시로 인도되는 이성은 언제나 자기 활동의 내재적 한계들을 알고 있다. 이로 인해 가톨릭 신학은 ‘부정 신학’(negative theology 또는 apophatic theology)의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97. 그러나 ‘부정 신학’은 신학에 대한 부정이 전혀 아니다. ‘긍정 신학’(cataphatic theology)과 ‘부정 신학’은 상호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될 것이다. ‘부정의 길’(via negativa)은 하느님의 신비를 향한 지성적 접근을 폄하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단순히 그러한 접근의 한계들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부정의 길’은 모든 진정한 신학적 담화의 근본적인 한 차원이지만, ‘긍정의 길’(via affirmativa)과 ‘초월의 길’(via eminentiae)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161) 인간 정신은 결과들로부터 원인(Causa)에로, 피조물들로부터 창조주에로 올라가면서, 피조물들 안에서 발견되는 진정한 완전성들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긍정하는 것으로 시작하고(긍정의 길), 그 다음에는 이러한 완전성들이 피조물들 안에서 그러한 것처럼 불완전한 방식으로 하느님 안에서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부정의 길). 마지막으로는, 그 완전성들이 인간의 이해를 벗어나는 고유하게 신적인 방식으로 하느님 안에 있음을 긍정한다(초월의 길).162) 신학은 마땅히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 참되게 말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지식이 참된 것이라 하더라도 결코 ‘이해’될 수 없는 하느님의 실재와 관련해서는 부적합한 것임을 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했듯이,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다.”163)

98.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체험하고 있고 현대 문화의 넓은 부분에 스며들어 있는 공허감과 하느님 부재의 느낌을 의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학의 일차적 실재는 하느님의 계시이다. 신학의 필수적인 기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다. 이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당신 말씀을 통해 결정적으로 말씀하셨다. ‘긍정 신학’(affirmative theology)은 창조와 역사 안에 현존하시는 말씀에 대한 순종적 경청의 결과로서 가능해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계시된 하느님의 신비는 세 신적 위격 사이의 ‘몰아’(ekstasis), 사랑, 친교, 상호 내주(內住)의 신비이다. 또한 그 신비는 예수님께서 강생을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셨던 ‘비움’(kenosis)의 신비이며(필리 2,5-11 참조),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2베드 1,4)하게 되는 ‘신화’(神化, theosis)의 신비이기도 하다. 신학이 부정의 길과 언어의 부재를 말할 때, 이는 그 안에 구원이 있는 삼위일체의 신비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을 가리키는 것이다. 말로 온전히 묘사할 수는 없지만, 믿는 이들은 사랑으로 이미 그 신비에 참여하고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1,8-9).

99. 세상에게는 어리석음인 하느님의 지혜를 찾고 그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는 것은 가톨릭 신학의 기준 가운데 하나이다(1코린 1,18-25; 1코린 2,6-16 참조). 가톨릭 신학은 성경의 위대한 지혜 전통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하고, 동방과 서방 그리스도교의 지혜 전통들에 연결되어야 하며, 모든 지혜 전통들을 향해 다리를 놓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 신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참된 지혜를 찾으려 노력함에 있어, 신학은 하느님의 전적인 우선성을 인정한다. 신학은 하느님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에 의해 소유됨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성령께서 ‘성인들의 지식’을 통해 교회들에 말씀하고 계신 바가 무엇인지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신학은 거룩함을 향한, 그리고 하느님 신비의 초월성에 대해 점점 더 깊어지는 의식을 향한 노력을 내포한다.

결론

100. 신학이 교회와 사회에 대한 봉사이기에, 신학자들에 의해 작성된 이 본문은 우리 동료 신학자들을 위한, 그리고 가톨릭 신학자들이 함께 대화하게 되는 이들을 위한 하나의 봉사가 되고자 한다. 신학 연구를 수행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리고 신학적 소명의 기쁨과 특전을 깊이 느끼며 작성된 이 본문은 가톨릭 신학을 특징짓는 전망들과 원리들을 지적하고 신학이 무엇인지를 식별할 수 있는 기준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요약한다면, 가톨릭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신비를 연구하며, 교회를 진리에로 이끄시는 성령의 은총(요한 16,13)에 의해, 교회의 친교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이들의 신앙 체험을 진술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가톨릭 신학은 성부께서 세상에 당신 아드님을 선물로 주신 그 사랑의 지대함에 대하여(요한 3,16 참조), 또 그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계시된 기쁨과 은총과 진리에 대하여(요한 1,14 참조) 숙고하며, 피조물들보다는 하느님께 바라는 희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희망을 설명하려 노력한다(1베드 3,15 참조). 그 모든 노력 속에서, 언제나 “감사를 드리라”(콜로 3,15; 1테살 5,18)는, 심지어 역경 속에서도 감사를 드리라(로마 8,31-39 참조)는 바오로의 권고처럼, 근본적으로 신학은 찬미와 감사를 특징으로 하는 ‘영광송’(doxology)과도 같다. 우리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사업에 대해서 또 그분 업적들의 비길 데 없는 본성에 대해서 숙고하는 것이기에, 바오로 사도가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삶으로도 모범을 보인 바와 같이, 신학에 가장 적합한 양상은 바로 영광과 찬미이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그분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에페 3,20-21).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3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글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제3판 5쇄).

2. 이 마지막 두 가지 측면에 관하여 각각 아래 92-94항과 10.25-32항을 보라.

3.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Catholicism: Christ and the Common Destiny of Man, San Francisco: Ignatius Press, 1988, 298면.

4. 이 문헌들과 앞으로 언급될 국제신학위원회 문헌들은 International Theological Commission: Texts and Documents 1969-1985, ed. Michael Sharkey(San Francisco: Ignatius Press, 1989) 또는 International Theological Commission: Texts and Documents 1986-2007, eds. Michael Sharkey and Thomas Weinandy(San Francisco: Ignatius Press, 2009)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여기에서 ‘가톨릭’(Catholic)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고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맡겨진,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가톨릭 교회를 말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8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 4항;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인간 존엄성』(Dignitatis Humanae), 1항. 본문 전체에서 ‘신학’이라는 용어는 가톨릭 교회에서 이해하는 의미의 신학을 지칭한다.

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2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7. 베네딕토 16세,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  2010.9.3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제1판 4쇄), 안소근 옮김, 6항, 24면; 계시 헌장 2.6항 참조.

 8. 『주님의 말씀』, 3항.

  9. 별도로 표시한 경우 이외의 성경 인용은 모두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성경』(2006)을 따랐다.

10. 계시 헌장 1항; 참조: 성 아우구스티노, 『입문자 교리 교육』(De Catechizandis Rudibus), 4,8, 『라틴 그리스도교 문학 전집』(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CCSL), 46,129.

11. 『주님의 말씀』, 7항;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1997,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제2판 6쇄), 108항.

12. 계시 헌장 7.11.16항 참조.

13. 계시 헌장 21항.

14. 성 아우구스티노, 『신국론』(De Civitate Dei), 17,6,2, CCSL 48,567: “Deus […] per hominem more hominum loquitur; quia et sic loquendo nos quaerit.”; 참조: 계시 헌장 12항.

15. 계시 헌장 11항.

16. 계시 헌장 8항.

17. 『주님의 말씀』, 18항.

18. 계시 헌장 2항.

19. 계시 헌장 5항 참조. 여기에서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아드님』(Dei Filius), 제3장, 『신앙, 도덕에 관한 선언, 규정, 신경 편람』(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DH), 3008 인용.

20. 계시 헌장 3항;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아드님』, 제2장도 참조.

21. 1요한 4,1-6; 2요한 7; 갈라 1,6-9; 1티모 4,1도 참조.

22. 『가톨릭 교회 교리서』, 2089항.

23. 성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XXIX, 6, CCSL 36,287; 또한 『설교집』(Sermoes), 43,7, CCSL 41,511.

24. 성 아우구스티노, 『서한』(Lettera), 120, 『라틴 교회 저술가 전집』(Corpus Scriptorum Ecclesiasticorum Latinorum: CSEL), 34,2,704: “Porro autem qui vera ratione iam quod tantummodo credebat intelligit, profecto praepondendus est ei qui cupit adhuc intelligere quod credit; si autem non cupit et ea quae intelligenda sunt credenda tantummodo existimat, cui rei fides prosit ignorat.”

25. 성 아우구스티노, 『삼위일체론』(De Trinitate), XIV,1, CCSL 50,424: “그 지식은 …… 그것을 통해서 가장 건전한 믿음, 곧 진정한 행복으로 이끄는 믿음이 낳아지고 양육되며 옹호되고 강화되는 지식”(Huic scientiae tribuens […] illud tantummodo quo fides saluberrima, quae ad veram beatitudinem ducit, gignitur, nutritur, defenditur, roboratur).

26.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 1998.9.14, 이재룡 옮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7(제1판 3쇄), 여는 말.

27. 성 안셀모, 『프로슬로기온』(Proslogion), 서문, in S. Anselmi Cantuariensis Archiepiscopi Opera omnia, F. S. Schmitt 편, 1권, 94면. 믿음, 희망, 사랑 사이의 긴밀한 유대 때문에(위의 11항 참조),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희망’(spes quaerens intellectum, 1베드 3,15 참조)이고, 또 ‘이해를 추구하는 사랑’(caritas quaerens intellectum)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측면은 특히 동방 그리스도교에서 강조된다. 하느님 사랑의 계시인 그리스도의 신비(요한 3,16 참조)를 설명하는 것이기에, 신학은 곧 언어로 표현된 하느님의 사랑인 것이다.

28. 특히 멜키오르 카노(Melchior Cano), De locis theologicis, J. Belda Plans 편, Madrid, 2006 참조. 카노는 열 개의 장소들(loci)을 열거한다. 그것은 성경(Sacra Scriptura),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전승들(traditiones Christi et apostolorum), 가톨릭 교회(Ecclesia Catholica), 공의회들(Concilia), 로마 교회(Ecclesia Romana), 옛 성인들(sancti veteres), 스콜라 신학자들(theologi scholastici), 자연적 이성(ratio naturalis), 철학자들(philosophi), 인간 역사(humana historia)이다.

29. 계시 헌장 24항 수정 번역.

30. 『주님의 말씀』, 35항; 참조: 31항.

31. 트리엔트 공의회, 『성경과 성전에 대한 교령』(Decretum de libris sacris et de traditionibus recipiendis), DH 1501-1505 참조.

32. 교황청 성서위원회, 『교회 안의 성서 해석』(Th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in the Church), III.다.1., 193.4.15.,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창간호(1996),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63면; 참조: 『주님의 말씀』, 33항.

33. 계시 헌장 12항.

34. 계시 헌장 12항 참조.

35. 『교회 안의 성서 해석』, I.나-바 참조.

36. 『주님의 말씀』, 34항.

37. “성령을 통해 쓰인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성경 본문들의 뜻을 올바로 알아내기 위해서는 전체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과 신앙의 유비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성경 전체의 내용과 일체성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계시 헌장 12항).

38. 『주님의 말씀』, 39항 참조.

39. 『교회 안의 성서 해석』, II.나; 또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115-118항 참조. 중세 신학은 성경의 네 가지 의미에 대해 말한다. “글자는 행한 것을 가르치고, 우의는 믿을 것을 가르치며, 도덕은 행할 것을 가르치고, 신비는 향할 것을 가르친다”(Littera gesta docet, quid credas allegoria, moralis quid agas, quo tendas anagogia).

40. 『주님의 말씀』, 34항.

41. 신학에서 성경이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에 관하여, 성 보나벤투라, 『담화』(Breviloquium), 서문 참조.

4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 『온 교회의 열망』(Optatam Totius), 16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참조: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a, q.36, a.2, ad 1: “하느님에 대해서, 말로써나 의미로써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De Deo dicere non debemus quod in sacra Scriptura non invenitur vel per verba, vel per sensum).

43. 『주님의 말씀』, 37항.

44. 『주님의 말씀』, 46항.

45. 계시 헌장 21항.

46. 계시 헌장 22항 참조.

47. 계시 헌장 8항.

48. 계시 헌장 7항 참조.

49. 계시 헌장 8항.

50. 계시 헌장 8항.

51. 사제 양성 교령 16항 참조.

52.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는 에페소 공의회에 대한 교부들의 인용문들 모음을 제시했다.; Mansi IV, 1183-1195; E. Schwartz 편, 『공의회 회의록』(Acta Conciliorum Oecumenicorum) I, 1.1, 31-44면 참조.

53. 성 아우구스티노, 『펠라기우스파 두 서간 반박』(Contra duas epistulas pelagianorum), 4,8,20, CSEL 60,542-543; 4,12,32, CSEL 60,568-569; 『율리아누스 반박』(Contra Iulianum), 1,7,34, 『라틴 교부 총서』(Patrologia Latina: PL), 44,665; 2,10,37, PL 44,700-702 참조. 또한 르랭의 빈첸시오, 『비망록』(Commonitorium) 28,6, CCSL 64,187: “오직 다음과 같은 교부들의 명제들만이 수집되어야 한다. 그 교부들이란 신앙과 가톨릭 공동체 안에서 거룩하고 지혜로우며 항구하게 살고 가르치며 머무름으로써, 한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충실하게 죽거나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복되이 순교할 자격이 있는 이들이다”(Sed eorum dumtaxat patrum sententiae conferendae sunt, qui in fide et communione catholica sancte sapienter constanter viventes docentes et permanentes, vel mori in Christo fideliter vel occidi pro Christo feliciter meruerunt).

54. DH 301,1510 참조.

55. DH 1507,3007.

56. 교회 헌장 25항.

57. 국제신학위원회, 『교의들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ogma), 1990, B,III,3; 참조: 『신앙의 단일성과 신학적 다원주의』(Theological Pluralism), 1972, 6-8.10-12항.

58. 요한 23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연설(Allocutio in Concilii Vaticani inauguratione), AAS 84(1962), 792면; 사목 헌장 62항 참조. 이 문제 전체에 관한 상세한 분석은, 국제신학위원회, 『교의들의 해석』을 보라.

59. 계시 헌장 10항.

60. 계시 헌장 9항 수정 번역.

61. 계시 헌장 24항.

62. Johann Adam Mӧhler, Unity in the Church or the Principle of Catholicism, Presented in the Spirit of the Church Fathers of the First Three Centuries, Peter C. Erb, trans. and ed. Washington DC: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96, p.117.

63. 『주님의 말씀』, 7항.

64. 계시 헌장 8항.

65. 계시 헌장 9항.

66. 계시 헌장 8항; 교회 헌장 13.14항; 일치 교령 15.17항; 선교 교령 22항 참조.

67. Yves Congar, Tradition et traditions: I Essai historique; II Essai thélogique, 2 vols. Paris: 1960, 1963 참조.

68. “Scripture, Tradition and Traditions”, in P. C. Rodger and Lukas Vischer, eds., 신앙직제위원회의 제4차 세계 대회(The Fourth World Conference on Faith and Order), Montreal, 1963, New York: Association Press, 1964, 48항, 52면. 엄밀히 말해서, 이 문헌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대문자로 표기하는 전승(Tradition)과 소문자로 표기하는 전승(tradition)을 구별할 수 있다. 대문자로 표기한 전승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에 의하여 대대로 전달된 복음 그 자체”, 곧 “교회의 삶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고, 소문자로 표기한 전승은 “전달의 과정”이다(39항, 50면).

69. 일치 교령 6항 참조.

70. 교회 헌장 12항.

71. 계시 헌장 8항.

72. 교회 헌장 35항 참조.

73. 교회 헌장 12항.

74. 교회 헌장 제2장 참조.

75. 교회 헌장 제3장 참조.

76. 계시 헌장 8항; 성 이레네오, 『이단 반박』(Adversus Haereses), IV, 26,2 참조.

77. 교회 헌장 21.24-25항 참조.

78. 계시 헌장 10항; 위의 30항을 보라.

79. 성 아우구스티노, 『설교집』, 340A, PL 38,1483.

80. 교황청 신앙교리성, 신학자의 교회적 소명에 관한 훈령 『진리의 선물』(Donum Veritatis), 1990.5.24.,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회보』 62호(199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42면. 이 훈령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선사하시는 진리에 대해 말하고(2-5항) “신학자의 소명”을 하느님 백성이 신앙으로 받은 선물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 백성에게 직접적으로 봉사하는 것으로 본다.

81. 계시 헌장 10항.

82. 국제신학위원회는 『교도권과 신학』(1975)이란 문헌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다루었고, 신앙교리성 역시 『진리의 선물』에서 이를 다루었다.

83. 계시 헌장 10항 참조.

84. 『교도권과 신학』, 제2명제.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물론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완전히 구분된 두 개의 집단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85. 『진리의 선물』, 21항 참조.

86. 사목 헌장 21-25항; 주교 교령 12항; 계시 헌장 10항 참조.

87.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사목적인 교좌의 교도권’(magisterium cathedrae pastoralis)과 ‘가르치는 교좌의 교도권’(magisterium cathedrae magistralis)을 구별했는데, 전자는 주교들에게 해당되고 후자는 신학자들에게 해당된다. 오늘날 ‘교도권’ 또는 ‘교회 교도권’이라는 말은 그 두 가지 의미 가운데 첫 번째 것을 특수하게 지칭하고, 이 본문에서도 바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다(위의 26.28-30.33항 참조). 신학자들이 실제적으로 가르치는 역할을 지니고 있고 그것이 공식적으로 교회에 의하여 인정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주교들의 교도권과 혼동되거나 그것에 대립되어서는 안 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전례와 수도회를 업신여기는 자들에 대한 반박』(Contra Impugnantes), c. 2; 『자유토론집』(Quaestiones de Quodlibet), III, q.4, a.9, ad 3; In IV Sent., d.19, q.2, a.3, q.3, ad 4; 또한 『진리의 선물』, 각주 27번 참조.

88. 『진리의 선물』, 34항 참조.

89. 『진리의 선물』, 13-20항 참조.

90. 『교의들의 해석』, B.II.3. 다양한 수준에서 교도권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신학적 견해들은 그에 상응하게 차별화된 부정적 평가 내지 견책의 대상이 되며, 그 책

임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 요한 바오로 2세, 자의 교서 『신앙의 옹호』(Ad Tuendam Fidem), 1998.5.28.,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3호(2000), 41면 참조.

91. 『교도권과 신학』, 제8명제 참조.

92. 『진리의 선물』, 21-41항 참조.

93. J. H. Newman, “Preface to the Third Edition”, in The Via Media of the Anglican Church, H. D. Wiedner 편, Oxford: Clarendon Press, 1990, p. 27.

94. “Preface to the Third Edition”, 29-30면. “모든 지식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견해는 비록 참된 것이라 할지라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이단적’이거나 ‘오류적’인 것은 아니지만 ‘무모하고, 경건한 귀에는 거슬리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34면).

95. 『교도권과 신학』, 제9명제. 국제신학위원회는 논쟁이 일어날 경우에 따를 절차에 관한 지침들을 또한 제시한다(제11-12명제 참조).

96. 『교도권과 신학』, 제8명제 참조.

97. 『교도권과 신학』, 제8명제.

98. 아래의 83항을 보라.

99. 교회 헌장 22.25항 참조.

100. 『진리의 선물』, 11항 참조.

101.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서간집』(Epistulae), 82,5,36(CCSL 31A,122)에서 예로니모 성인을 격려하며, 친구의 자유로움과 형제적 사랑으로 서로 솔직하게 교정해 줄 것을 말한다. 또한 『삼위일체론』(De Trinitate), I,3,5(CCSL 50,33)에서는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사랑과 진리에 입각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또한 그의 주장을 논박하는 데 성공한다면 매우 유익하리라고 말한다.

102. 『교의들의 해석』, C, III, 6 참조.

103.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Ut Unum Sint), 1995.5.25., 28항,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2호(1996),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5면 참조.

104. 사목 헌장 11항.

105. 사목 헌장 11항.

106. 사목 헌장 4항.

107. 사목 헌장 44항.

108. 사목 헌장 44항 참조.

109. 사목 헌장 44항.

110. 전례 헌장 43항; 일치 교령 4항; 종교 자유 선언 15항; 평신도 교령 14항; 사제 생활 교령 9항 참조.

111. 선교 교령 11항.

112. 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

113. 『신학 대전』, IIa-IIae, q.2, a.10. 참조.

114. 『프로슬로기온』, 제1장: “저는 제 마음이 믿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를 원합니다”(Desidero aliquatenus intelligere veritatem tuam, quam credit et amat cor meum).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 박승찬 옮김, 아카넷, 2002, 182면; 또한 성 아우구스티노, 『신국론』, XV, 28,51, CCSL 50A,534 참조.

115. 『프로슬로기온』, 제1장,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 182면 참조: “주님, 저는 당신의 숭고함에 침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 그래서 저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만일 네가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믿기 때문입니다”(Non tento, Domine, penetrare altitudinem tuam. …… Neque enim quaero intelligere ut credam, sed credo ut intelligam. Nam et hoc credo: quia ‘nisi credidero, non intelligam’).

116. 오리게네스, 『첼수스 논박』(Contra Celsum), 서문, 4, M. Boret 편, 『그리스도교 원전』(Sources Chrétiennes), vol.132, 72-73면; 성 아우구스티노, 『신국론』 I, CCSL 47 참조.

117. 『신앙과 이성』, 73항 참조.

118. 『신앙과 이성』, 77항 참조.

119.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아드님』, DH 3017; 또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 『이교도 논박』(Summa Contra Gentiles), I, c.7 참조.

120. 『하느님의 아드님』, 『보편 공의회 문헌집 제3권-트렌토 공의회/제1차 바티칸 공의회』, 쥬세페 알베리고 외 엮음, 김영국/손희송/이경상 옮김, 가톨릭 출판사, 2006, 809면.

121. 유스티노, 『트리폰과 나눈 대화』(Dialogus cum Tryphone), 8,4, Iustini philosophi et martyris opera quae feruntur omnia, C. T. Otto 편, Corpus apologetarum christianorum saeculi secundi, 2, Iéna, 1877, 32-33면; 타치아노, Oratio ad Graecos, 31, Corpus apologetarum christianorum saeculi secundi, 6, Iéna, 1851, 118면; 또한 『신앙과 이성』, 38항 참조.

122. 『신국론』, VI, 5-12, CCSL 47,170-184 참조.

123. ‘급진적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신학적 이성주의에 대한 반대 응답으로,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그리스 철학 전통은 본성에 의해서든 은총에 의해서든 영광의 상태에 있어서조차 이 지상에서 신적 본질을 그 자체로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강조하였다. 인간의 지복(至福)이 오직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1요한 3,2) 뵙는 데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던 라틴 신학은, 복된 이들에게 약속된 신적 본질에 관한 지식과 하느님 자신만이 소유하고 있는 하느님 본질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구별하였다. 베네딕토 12세는 헌장 Benedictus Deus(1336)에서 복된 이들이 하느님의 본질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바라본다고 정의하였다(DH 1000).

124. 성 토마스 아퀴나스, 『보에티우스의 삼위일체론에 대하여』(In Boethium De Trinitate), 서문, Leonine 편, t.50, 76면 참조: “삼위성을 논하는 방식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삼위일체론』의 제1권에서 주장하듯이, 두 가지이다. 곧, 권위에의 호소와 논증에의 호소가 그것이다. 아우구스티노의 진술은, 그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두 가지를 다 활용한다. 그러나 암브로시오와 힐라리오와 같은 다른 일부 교부들은 오직 첫 번째 방법, 곧 권위의 방법만을 활용하였다. 보에티우스는 다른 사람들이 권위의 방법을 통해서 도달한 결과들을 전제하고 다른 (두 번째) 방법, 곧 논증을 통한 방법에 착수하기로 결정한다”(Modus autem de Trinitate tractandi duplex est, ut dicit Augustinus in I de Trinitate, scilicet per auctoritates et per rationes. Quem utrumque modum Augustinus complexus est, ut ipsemet dicit; quidam vero sanctorum patrum, ut Ambrosius et Hilarius, alterum tantum modum prosecuti sunt, scilicet per auctoritates; Boethius vero elegit prosequi per alium modum, scilicet per rationes, praesupponens hoc quod ab aliis per auctoritates fuerat prosecutum).

125. 『신학 대전』, IIa-IIae, q.1, a.7 참조.

126. 『신학 대전』, Ia, q.1, a.3, ad 2., 『신학 대전 1』, 정의채 옮김, 성 바오로 출판사, 1993, 36면.

127. 토마스 아 켐피스, 『준주성범』(Imitatio Iesu Christi), I.3 참조.

128. 『신앙과 이성』, 66항.

129. 『신앙과 이성』, 73항 참조.

130. 『하느님의 아드님』, DH 3008-3009.3031-3033 참조.

131. 성 아우구스티노, “De divinitate ratio sive sermo”, 『신국론』, VIII, 1, CCSL 47, 216-217, 『신국론 제1-10권』, 성염 역주(譯註), 분도출판사, 2004, 811면.

132. 『신학 대전』, Ia, q.1, a.7, 『신학 대전 1』, 45면: “거룩한 가르침에 있어서 모든 것은 하느님의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다루어지는 것들이 하느님 자신이거나 또는 그 시원과 궁극으로서의 하느님께로 질서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참으로 이 학문의 주제다”(Omnia autem pertractantur in sacra doctrina sub ratione Dei, vel quia sunt ipse Deus, vel quia habent ordinem ad Deum, ut ad principium et finem. Unde sequitur quod Deus vere sit subiectum huius scientiae).

133. 사제 양성 교령 16항.

134. 국제신학위원회, 『신앙과 토착화』(Faith and Inculturation), 1988.10.8.,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회보』 58호(199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62면 참조.

135. 『신앙의 단일성과 신학적 다원주의』 참조.

136. 『교의들의 해석』 참조.

137. 위의 제2장 2. 사도적 전승에 대한 충실성을 보라.

138. 사제 양성 교령 16항 참조.

139. 『교회 안의 성서 해석』 참조. 이 문헌은 성경 자체에 근거하고 제2차 공의회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계시 신학의 지평 안에서 현대의 여러 주석 방법들의 가능성과 한계들을 고찰한다는 점에서 값진 패러다임 역할을 한다.

140. 『신학 대전』, Ia, q.1, a.5, ad 2 『신학 대전 1』, 40쪽 참조. 여기에서 토마스 성인은 신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거룩한 가르침은 철학적 학문들에서 어떤 것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필연성에서 철학적 학문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가르침이 전달하는 것을 더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다. 사실 거룩한 가르침은 자기 원리들을 다른 학문들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로 받는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다른 학문들을 (자기보다) 더 위의 것으로 하여 그것들에게서 (자기 원리들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문들을 더 아래 것으로, 또 하녀로서 사용하는 것이다”(Haec scientia accipere potest aliquid a philosophicis disciplinis, non quod ex necessitate eis indigeat, sed ad maiorem manifestationem eorum quae in hac scientia traduntur. Non enim accipit sua principia ab aliis scientiis, sed immediate a Deo per revelationem. Et ideo non accipit ab aliis scientiis tamquam a superioribus, sed utitur eis tamquam inferioribus et ancillis).

141.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 1993.8.6.,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제2판 2쇄). 이 회칙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윤리 신학자들에게 행동 과학들을 사용함에 있어 식별을 행할 것을 권고하셨다(특히 33.111.112항).

142. 초기 교부들은 이단들, 특히 영지주의의 여러 형태들이 종종 특정한 철학 이론들을 충분한 비판 없이 채택한 데에서 생겨난 것임을 강조했었다. 예를 들어, 테르툴리아노, 『이단자들의 시효에 대하여』(De Praescriptione Haereticorum), 7,3, Sources Chrétiennes 46, 96면: “마침내 이 이단들은 철학에 의해서 무장된다”(Ipsae denique haereses a philosophia subornantur).

143.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청 과학원 총회의 참석자들에게 보낸 담화, 1996.10.22.,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3호(1997),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87면; 또한 『신앙과 이성』, 69항 참조.

144.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이성이 궁극적인 진리와 하느님에 관한 질문들을 멀리할 때 나타나는 증상을 관찰하신다. 이렇듯 해롭게 자기 자신을 제한한 다음, 이성은 인간적 이익들에 종속되며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다. 이렇게 하여 상대주의를 향해 가게 된다. 이러한 위험성들 때문에 베네딕토 교황께서는 반복해서 신앙이 “이성 자체를 정화하는 힘”임을 강조하신다. “신앙은 이성을 그 맹점에서 해방시켜 그 자체로 더욱 완전해지도록 도와줍니다. 신앙은 이성이 더욱 효과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그 고유한 목적을 더욱 명확히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베네딕토 16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 2005.12.25., 2011(제1판 14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8항.

145. 『신학 대전』, Ia, q.1, a.6 참조.

146.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삼위일체론』(De Trinitate), XII, 14,21-15,25, CSSL 50,374-380 참조.

147. 『신학 대전』, Ia, q.1, a.6 참조.

148. 『신학 대전』, Ia, q.1, a.6, ad 3 참조.

149. 『하느님의 아드님』, 제4장, DH 3016, 『보편 공의회 문헌집 제3권-트렌토 공의회/제1차 바티칸 공의회』, 808면.

150. 위(僞)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 『하느님의 이름들』(De Divinis Nominibus), ch. 2,9, in Corpus Dionysiacum, I. Pseudo-Dionysius Areopagita De divinis nominibus, Herausgegeben von Beate Regina Suchla, “Patristische Texte und Studien, 33”, 134면 참조.

151. 성 막시무스 증거자, Four Hundred Texts on Love, 2,26 (G.E.H. Palmer, Philip Sherrard, Kallistos Ware, trans. & ed., The Philokalia, vol.2, London/Boston, 1981, p.69) 참조: “지성이 신학의 은총을 얻는 것은, 사랑의 날개에 태워져(……) 하느님께 들어 높여지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 인간 지성에게 가능한 한 - 하느님의 속성들을 식별하게 될 때이다.”; 또한 생 빅토르의 리샤르(Richard), De praeparatione animi ad contemplationem 13 (PL 196, 10A): Ubi amor, ibi oculus; Tractatus de gradibus charitatis 3,23 (G. Dumeige, ed, Textes philosophiques du Moyen Age, 3, Paris, 1955, p.71): “사랑은 눈이며, 사랑하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amor oculus est, et amare videre est) [리샤르는 이 문장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것이라고 본다].

152. 언제나 교회의 판단에 종속되며, 참된 것이라 하더라도 “공적 계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가치를 갖는 사적 계시에 관해서는, 『주님의 말씀』, 14항 참조.

153. 예수의 성녀 데레사(아빌라의 데레사), 『완덕의 길』(The Way of Perfection), 최민순 옮김, 바오로딸, 22002, 제5장의 2번, 82면.

154. 『교의들의 해석』, B.III.4 참조: “교의들의 신학적 해석은 지적인 과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보다 깊은 차원에서, 그것은 진리의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고 먼저 ‘마음의 눈’의 정화가 있을 때에만 진행 가능한 영적인 작업이다.”

155. 베네딕토 16세, 회칙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 2009.6.2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0(제1판 3쇄), 1항 참조.

156. 교회 헌장 26항;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 2003.4.7.,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제1판 12쇄), 1항 참조.

157. 사제 생활 교령 5항.

158. 교회 헌장 11항; 참조: 전례 헌장 10항.

159. 사제 생활 교령 5항.

160.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DH 806, 『보편 공의회 문헌집 제2권 전편-제1~4차 라테란 공의회/제1~2차 리옹 공의회』, 김영국/손희송/이경상/박준양/변종찬 옮김, 가톨릭 출판사, 2009, 232면.

161. 성 토마스 아퀴나스, In IV Sent., d.35, q.1, a.1, ad 2: “모든 부정은 어떠한 긍정 안에 근거를 지니고 있다”(Omnis negatio fundatur in aliqua affirmatione).

162. 성 토마스 아퀴나스, 『전능에 관한 논제』(Quaestiones Disputatae de Potentia), q.7, a.5, ad 2. 여기에서 토마스는 디오니시오의 가르침을 해석한다.

163. 성 아우구스티노,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말한다. 당신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만일 당신이 이해한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이다.”(De Deo loquimur, quid mirum si non comprehendis? Si enim comprehendis, non est Deus.: Sermo 117,3,5; PL 38,663); “만일 당신이 마치 파악할 수 있었던 것처럼 생각된다면, 당신의 인식은 당신을 속였던 것이다.”(Si quasi comprehendere potuisti, cogitatione tua te decepisti) (Sermo 52,6,16; PL 38,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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